조금 이른 저녁을 먹고 소파에 누워서 자주 보던 채널을 보고 있었다.
엄마의 밥상이라는 프로그램으로 PD총각이 신청자 엄마를 도와 아픈 손가락인 자식에게 줄 엄마표 음식을 만드는 과정과 그렇게 만들어진 정성 가득한 음식을 자식에게 전해주고 음식을 받은 자식이 엄마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날의 엄마는 둘째 딸에게 음식을 해주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딸에 대한 이야길 들려주었다.
둘째인 딸이 오빠와 둘이 외지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오빠 밥을 해주다가 어린 딸이 어느 추운 겨울날 연탄가스를 마셔서 못 깨어났다며 울먹이던 엄마는 둘째 딸 이야기를 하면서 끝내 눈물을 훔쳤다. 그 이후로도 공부 때문에 동생들까지 같이 살게 되면서 엄마의 역할을 둘째 딸이 하였다고 엄마는 회한의 눈물과 함께 딸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엄마가 해준 음식을 PD총각으로부터 전해받은 둘째 딸은 음식을 먹으며 엄마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울고 있었다. 티브이를 보다기 둘째 딸의 울음에 나도 같이 울었다.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훌쩍이는데 남편이 나를 빤히 본다. 우냐고?
남편은 내가 우는 이유를 알고 있다.
우리 집은 4녀 1남이고 그중 내가 둘째로 위로는 언니가 있다.
언니는 약하게 태어나서 4살이 되도록 걷질 못했다고 한다.
그 당시 결혼적령기보다 조금은 늦은 나이에 결혼한 아버지는 서른이 넘은 나이에 낳은 첫딸이 약해서 애지중지 키웠다고 한다. 막내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이니 맏이인 언니는 집안에서는 귀한 존재였다.
언니의 생일이 되면 생일 파티를 열어주고 우리의 생일은 미역국만 끓여줬다.
우유는 언니 혼자서만 먹었고 그때엔 원기소라는 영양제가 있었는데 언니를 주려고 장롱에 숨겨둔걸 엄마 몰래 동생들과 훔쳐먹으며 서러운 둘째의 인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엄마는 언니에게는 빨간 리본이 달린 구두를 사주었고 나는 파란 운동화를 신게 하였다.
책가방도 남자애들이 매고 다니던 로봇 그림이 있는 파란색 가방을 사주었다.
아들이 없던 우리 집에서 나는 사내아이 같은 딸이어서 남자아이들이 하던 딱지치기를 자주 하였는데 특히 나는 동그란 딱지를 많이 땄다. 구슬치기는 소질이 없어 늘 구슬을 잃었고 겨울이면 동네 오빠들을 따라다니며 썰매 타기 등 액티비티 한 것들을 하다 보니 언니가 물려준 옷은 팔꿈치나 무릎에 구멍이 나기 일쑤였다.
언니는 어릴 때부터 약하여 '비쩍 말라비틀어진 갈비"라는 별명을 가진 저체중 언니 덕에 동생들은 건강한 내가 챙기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K 장녀의 임무가 시작되었다.
아들인 막내 남동생이 태어난 무렵 아버지는 약한 언니가 아닌 건강한 둘째인 내게 "막내 대학은 아버지가 나이가 많아 못 시키게 되면 누나인 네가 대학을 시켜야 한다."고 귀에 딱지가 않을 만큼 말씀하셨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는 귀하디 귀한 아들을 내게 보라고 하였다.
언니와 막내 남동생은 12살 차이 나는 띠 동갑이다.
막내 남동생이 태어날 때 중학생이 된 언니는 집에 있는 일이 거의 없어서 아기였던 동생을 데리고 친구들과 놀곤 하였다. 동생들은 어려서 못 맡기고 언니에게는 맡기 질 않으니 막내는 내 차지가 되었다.
그렇게 어릴 때 때부터 세뇌가 된 아버지의 말씀으로 나는 책임감 강한 둘째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한 둘째이다 보니 아버지께서는 퇴근하시고 들어오시면 저녁 늦게 숙제검사를 하셨는데 아버지께 혼날까 봐 동생의 숙제를 내가 하기도 하였다. 추운 겨울 학교 갈 때면 동생이 추울까 봐 두 살 아래 동생을 업고 가기도 하였다. 4자매들 중 키가 제일 작은 나는 부모님의 듬직한 둘째로 유년시절을 보냈다.
막냇동생 조카들이 둘째여서 작은 이모인 내가 키가 작아 작은 이모인 줄 알았다고 한다.
커면서 내겐 K장녀의 무게가 점점 버거워졌다.
책임강이 강한 둘째로 살던 그 시절이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지나온 시간 중에 내겐 가장 힘든 시기였다.
힘겨웠던 그 시절 삶에 무게를 가진 유년의 나를 생각하면 연민으로 맘이 조금 아려온다.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다가 PD총각이 전해주는 엄마가 손수 해준 음식을 받고서 눈물 흘리며 우는 둘째 딸이 내게 투영되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다 흐느꼈다.
어릴 때 "막내를 네가 꼭 대학 보내야 한다"며 강한 둘째로 이끈 아버지도, 아기였던 남동생을 항상 내게 보라던 엄마도 지금은 안 계신다.
동생들이 학교를 졸업하면서 나도 자연스레 K 장녀의 자리를 내려놓았다.
둘째들은 알 것이다.
맏이에게 치이고 동생들에게 밀리는 언제나 강제에 의한 양보의 아이콘인 그 서러움을.
어른이 되고 나서는 이젠 서러웠던 둘째는 없다.
이제 우리 5남매는 가끔 어릴 적 이야길 하며 커피타임을 즐긴다.
1남 4녀라는 딸이 많아 창피하던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여전히 약한 언니와 사십 대 중반이 된 막내가 아직도 어리게 느껴지지만 나이가 들어가는 자매님들과 더불어 나이가 익어가다 보니 형제가 많음이 이제는 든든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