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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목 Apr 22. 2018

개와 고양이를 위한 시간

헤어짐도 삶의 일부임을 인정한다면 ... 

           

“복순이(이모가 기르던 삼색고양이의 이름이다)는 신부전으로 고생했어. 나이가 들어서는 제대로 밥도 먹지 못했지. 당연히 오줌을 눌 때마다 고통스러워했어. 나중에는 합병증으로도 고생했지.” 나와 해원은 듣기만 했다. “그래서 내가 병원에 데려갔어. 그리고 주사를 놓아줬지. 오래 걸리지도 않더라. 정말이지 잠든 것 같았어.” 

                                                                                                소설가 정영수의 단편소설 <더 인간적인 말> 中 



반려동물에 관심을 갖게 된 이후로 전 같으면 그냥 넘어갔을 소설이나 영화의 어떤 대목들이 종종 목에 가시처럼 그냥 넘어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위에 글은 며칠 전 단편소설을 읽다 문득 멈춘 대목입니다. 

소설 속에서 이모는 어느날 조카에게 유산을 남깁니다. 아직 죽지도 않았고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알고보니 이모는 스위스로 떠날 결심을 이미 한 후였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긴 여행을 떠날 바로 그 결심 말입니다. 그리고 가족에게 자신의 선택을 인정받기 위해 자신이 키웠던 고양이 복순이를 보냈던 이야기를 합니다. 

비슷한 사연을 한 고양이 클럽의 인터넷 게시판에서 보았습니다. 17살 먹은 반려고양이가 신부전 말기로 병원에서 완치불가 판정을 받은 후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고양이 집사분은 사료를 삼킬 수 없어 강제급식을 해야하는 상황, 그리고 뼈만 남은 몸으로 화장실 문턱조차 넘지 못하는 고양이를 바라보며 이젠 그만 고통을 덜어주는 게 고양이를 위해서도 더 나은 선택은 아닌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성적인 마음과는 별개로 아직은 고양이를 보내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자신을 돌아보며 역시나 힘든 시간을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댓글에 힘내세요 라는 말 밖에는 해 줄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슬픔과 맞서는 법


반려동물을 잃고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한 치유모임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취재를 갔습니다. 앞선 6화에서도 언급했듯 펫로스로 인해 힘들어하는 이들이 호소하는 고통중에는 타인의 슬픔을 자신만의 기준으로 함부로 재단하고, 심지어 하찮게 바라보는 주위의 폭력적인 시선들이 큰 몫을 차지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같은 상처를 공유하는 이들이 함께 모여 슬픔을 나누고, 궁극적으로 그 슬픔을 객관화해 가는 과정은 나름 의미있어 보였습니다. 


일반적으로 펫로스 증후군은 반려동물과 사별의 경험을 한 후 적절한 애도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인간세계에서 장례절차는 그 자체로 문화입니다. 나라마다 사회마다 절차가 다 다르고 그 안에서도 종교에 따라 또 추모의 형태가 달라짐을 떠올려보면 그것이 왜 문화로 불리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접하는 삼일장, 사십구제 등은 이별에 따른 최소한의 애도의 과정을 보장해주기 위한 일종의 사회적 약속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언젠가는 겪게 될 이별을 대비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에 반해 반려동물과의 이별은 아직은 낯선 영역입니다. 그렇다보니 어떤 애도의 과정을 거쳐야 할지도 모른 채 성급한 이별을 겪은 후 깊은 상실감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치유모임의 형태는 여러가지인데 제가 취재를 간 곳은 미술치료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모임에 처음 참석한 날, 내담자분들은 “나의 편안함은 이렇게 생겼어요”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도움 : 플로리다마음연구소)

추상적인 표현도 있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편안함도 있었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난 후에는 각자 어떤 상황에서 편안함을 느꼈는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대형견을 키웠던 한 분은 아이슬란드에 여행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느꼈던 이야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서는 대형견을 데리고 산책을 한다거나 했을 때 주위의 불편한 시선을 받을 때도 많고 또 도시에서 대형견이 마음껏 뛰놀만한 공간도 부족한데 아이슬란드에서 만난 개들은 마음껏 뛰놀고 또 사람들의 시선도 너무 편해서 행복해보였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당연히 그랬던 경험은 이제 짙은 아쉬움으로 남았을 겁니다.

(도움 : 플로리다마음연구소)


그림을 그리고 난 후에는 보드판 조각을 이용해 함께 했던 반려동물을 위한 집을 만들었습니다. 모임에 오신 분들은 미술과는 관련이 없는 분들이었지만 마치 초등학교때 공작시간에 집중하듯 다들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색색깔의 점토(Clay)로 반려동물을 빚어 집안에 넣어주었습니다. 

만드는 과정은 흥미로웠습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한가지 일에 집중하는 건 그 자체로 슬픔을 잊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습니다. 함께 만들며 자연스레 웃고 또 지나간 추억들을 떠올리고 완성된 집과 점토로 다시 살아난 아이를 보고는 눈물도 지었습니다.


그쯤 되서 깨달았습니다. 아 … 우린 아직 충분히 슬퍼하지 못했구나. 어쩌면 유난스럽다는 주위의 시선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또 어떻게 슬퍼해야 하는지 몰라서였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제 잊을 때도 되지 않았냐고 쉽게 말하지만 여전히 가방에 달린 노란 리본을 뗄 수 없는 것 역시 같은 마음일런지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못다한 애도의 과정이 남아있었습니다.

어느새 일주일이 지나고 또 다시 만났습니다. 그날은 함께 살았던 반려동물을 각자 그린 후 그 아이들에게 주고 싶은 것들을 그림으로 선물하고, 마지막은 옆사람의 반려동물에게도 선물을 하는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평소 야구공을 갖고 놀기를 좋아했던 아이에겐 야구공 그림이 그려졌고 좀 더 나은 치료를 해주지 못한 마음은 좋은 약이 든 선물상자로, 혼자가 외로워보였던 아이에겐 고양이 친구를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들이 그림으로 살아났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평소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 분들이 그린 그림이고 저로서는 본 적없는 아이들이지만 살아있을 때 그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도 생생하게 연상이 되었던 점입니다. 바로 사랑과 진정성이 담긴 그림의 힘이겠지요.

 

삶은 유한하고 이별없는 삶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하지만 불행이 없다면 행복 또한 그 의미를 잃어버릴 겁니다. 이별 후의 상실감은 이젠 다시 만질 수 없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식에서 비롯합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를 또 살아가게 하는 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아닐까요. 함께했던 시간, 이제는 추억이 된 기억들 … 그런 것들이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합니다.   

어쩌면 위로는 그렇게 어렵지도, 또 대단한 게 아닌지도 모릅니다. 함께 그림을 그리고 각자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그렇게 때론 웃고 또 울먹이는 시간들. 슬픔을 나누고 상대의 아픔을 존중하는 그 시간들 안에 위로가 있었습니다. 

사랑했던 기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취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개와 고양이를 위한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작은 위로가 되고 또 응원이 되는 그런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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