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에서 콘텐츠 작가로, 콘텐츠 작가에서 스타트업 대표로.
이직을 준비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력서 작성이 아닐까. 어떤 기업에 입사할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나의 이력을 정리해 두어야 했다. 보통 방송작가에게 이력서를 제출하라고 하면 일했던 프로그램명, 재직 기간, 직책(메인작가, 서브작가, 보조작가 등)만 작성한다. 그야말로 일한 내역, ‘이력’인 것이다.
방송작가는 어떤 프로그램에서 일했는지, 프로그램의 이름이 곧 내 이력의 얼굴이 된다. 유명한 메이저 프로그램이나 힘들다고 소문난 프로그램, 유명 PD와 유명 작가가 있는 프로그램 이력이 있다면 ‘오~ 어느 정도 실력이 있나 보다’라고 인지하기 때문에 딱히 자기소개가 필요 없다.
그러나 일반 기업에서 원하는 이력서는 이와 매우 다르다. 가장 기본이 되는 자기소개, 출생 배경, 지원 동기, 입사 후 포부 등과 더불어 이력에 대한 포트폴리오, 경력증명서 등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형식의 이력서는 막내 작가로 처음 프로덕션에 입사할 때만 작성해 본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해왔던 사람인데 자기소개서쯤은 쉽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는데, 그건 오산이었다.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돌아볼 일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어려웠다. 나는 어떤 사람이지?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싶지? 내 경력으로 이 직무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지? 정말 막막했다.
지금이라면 챗지피티의 도움이라도 받아 볼 텐데, 이직할 당시에는 그런 건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방송 프로그램 구성작가로만 살아온 게 단조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프로그램 이름만 다를 뿐, 아이템 서치 및 구성, 출연자 및 로케이션 섭외, 촬영 구성안 작성, 편집 구성안 작성, 원고 작성, 자막 작성 등 기본적인 업무의 연속이어서 오히려 다른 일을 좀 해봤어야 하는 것 아닐까 후회가 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 일을 14년 동안 우직하게 해왔다는 게 나의 자부심이었다. 이 꾸준함을 알아봐 주는 회사에 가고 싶었다. 그래서 이력서의 제목도 이걸 활용해서 썼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유치하다.)
‘성실함을 증명한 14년, 새로운 분야에 도전합니다.’
이력서 제목만 보고도 내가 일한 경력, 그리고 이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 도전하는 데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내 이력서는 열람률이 꽤 높았고 헤드헌터들의 연락도 꽤 들어왔었다. 생각보다 금방 이직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이직의 세계는 냉정했다. 나는 방송국, 프로덕션이라는 조직에서 일했지만 ‘프리랜서’라는 이름에 갇혀 버렸다. 그리고 이건 이직에서도 매우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