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생활 할 수 있겠어요?

방송작가에서 콘텐츠 작가로, 콘텐츠 작가에서 스타트업 대표로.

by 최희진

면접 제의를 받았던 광고회사는 역삼역 근처에 있었다. 여의도와 상암이 주 생활권이었던 나에게 강남은 무척 생소하고 복잡하기만 한 곳이었는데, 앞으로 내가 출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 좀 두근거렸던 것 같다. 면접 시간에 맞춰 회사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본 건 회사의 규모와 일하던 직원들의 모습이었다. 10여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파티션도 없는 책상에 앉아 열심히 작업하고 있었다. 외부인에 대한 관심은 하나도 없어 보일 만큼 여유가 없어 보이는 게 첫 인상이었다.


면접에는 인사담당자와 기획팀장이라는 사람이 들어왔다. 명함을 주고받으며 통성명을 하고 면접이 시작됐다. 사는 곳, 오는 교통편 등을 물으며 가볍게 아이스 브레이킹을 하고 본격적인 업무 이야기를 나눴다. 회사에서 원하는 직무는 크게 콘텐츠 기획, 콘텐츠 촬영 보조, 광고 릴리즈, 광고 분석이었다. 콘텐츠 기획과 촬영 부분에서는 경험이 있어서 막힘없이 대답했지만, 광고 관련해서는 조금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 부분은 마케팅팀에서 붙어서 같이 진행하며 배우실 수 있겠냐고 해서 충분히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면접 분위기는 상당히 좋았다고 느꼈는데, 흐름을 바꾼 건 기획팀장의 질문이었다. 그는 누가 봐도 어려 보였는데(30대 초반으로 보였다), 내가 입사하게 된다면 그가 내 상사가 될 것이었다. 그가 “본인보다 어린 상사의 지시는 잘 들으실 수 있겠어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방송계에서는 나이보다 경력이 우선이기도 했고,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경력 많은 선배들과 일해 본 경험이 많아서 나는 이런 예시를 들며 문제없다고 대답했다. 그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는지 그는 연이어 질문을 했다. “조직 생활 할 수 있겠어요?”


그렇다. 그는 내 경력이 ‘방송국 소속의 정직원’이 아니라는 점을 꼬집고 싶었던 거다. 그 얘기를 듣자,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머리가 아팠다. 방송계는 정직원의 개념이 없다는 것을 설명해야 하나. 그럼 나영석이나 김태호 PD, 이우정 작가는 직원이 아니냐? 연봉 얘기 나오던데 그건 뭐냐? 프리랜서면 집에서만 일한 거 아니냐? 출근이라는 걸 하긴 하냐… 예상 후 질문들이 우르르 머릿속에 쏟아졌다.


방송계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방송계의 실태를 낱낱이 하나하나 말해야 하는 상황에 조금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최대한 이해하기 쉽고 간단하게 얘기하기로 했다. 방송작가는 90% 이상이 프리랜서 형태로 고용되고, 메인·서브·자료조사의 직급이 있고, 크게는 방송국–프로덕션–프로그램별의 조직이 구성된다. 혼자 하는 일이 절대 아니고 각자 체계와 시스템이 있는 업무들이다. 오히려 여러 프로그램을 경험하면서 다양한 조직 형태를 만나게 되고, 그것에 빠르게 적응해 가며 업무를 하는데 그런 순발력 또한 갖추고 있음을 어필했다.


내 설명에도 그는 찜찜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때 느꼈다. 이런 회사라면 내가 들어와서도 일하기 쉽지 않겠다고. 인사담당자는 나를 꽤 마음에 들어했고, 구체적인 입사 가능 날짜, 출퇴근 거리, 주변 맛집 등을 얘기해주며 분위기를 풀어주었지만 기획팀장은 그저 예의를 차린 미소뿐이었다.


면접을 끝내고 회의실을 나오면서 본 사무공간의 공기는 여전히 삭막했다. 키보드 타자 소리와 마우스 클릭 소리만 가득한 사무공간, 곳곳에 쌓여 있는 택배박스, 탕비실 없이 정수기만 한 대 있는 공간. 과연 이런 곳에서 내가 행복하게 일할 수 있을까? 아니, 이런 공간이라도 이직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 여러 생각에 복잡한 하루였다.


며칠 뒤, 예상한 대로 나는 면접에서 탈락했다. 예상한 일이었지만 마음이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내 자존심을 더 내려놓고 저자세로 면접을 봤어야 했나, 내가 너무 말대답하듯 반박하듯 내 상황을 설명했나, 역시 이직하기에는 역량이나 자격이 부족한가… 여러 생각에 며칠 동안은 구직활동을 중단했다.


그야말로 현타가 와서 의욕을 잃은 지 며칠째, 핸드폰이 울렸다. 내가 지원했거나 알아봤던 기업의 이름이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000 인사팀입니다. 사람인에 올리신 이력서 보고 면접 제안 드리고 싶어서 연락드립니다.]


내가 지원하지도 않은 회사의 면접 제안이었다.



작가의 이전글배운 게 도둑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