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직?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지

방송작가에서 콘텐츠 작가로, 콘텐츠 작가에서 스타트업 대표로.

by 최희진

서류 지원도 하지 않았는데 나를 면접에 부른 회사는 펀딩 대행사였다. 크라우드 펀딩이란 와디즈, 텀블벅 같은 펀딩 플랫폼에 제품이나 서비스를 런칭한 뒤 대중에게 후원을 받는 일이고, 런칭 절차가 꽤 까다롭기 때문에 개인이나 기업을 대신해 해당 업무를 보는 곳이었다. 이 또한 광고·홍보업에 가까운 업무여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고민하며 면접에 응했다.


이곳도 다른 회사들과 비슷하게 직원들은 모두 업무에 열중하고 있었지만, 하나 다른 점은 면접자 담당이 따로 있었다는 점이었다. 실장이라는 직함의 사람은 나와 이전 면접자의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자리를 안내해주고, 추운 날 오느라 고생했다며 따뜻한 차를 한 잔 내주었다. 별일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런 작은 배려가 회사 전체의 이미지를 좋게 보이게 만들었다.


5분 정도 대기한 후 실장의 안내를 받아 회의실로 들어갔다. 회의실에는 회사 대표, 콘텐츠 감독, 팀장 PD가 앉아 있었고, 나를 안내해준 실장도 면접관으로 함께했다. 간단한 아이스브레이킹과 함께 면접이 시작됐고, 회사 소개와 업무 설명이 이어졌다. 구직 사이트에 올려둔 내 이력서를 보고 경력이 마음에 들어 먼저 손을 내밀었다고 했다.


내가 맡을 직무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요청했고, 내 업무는 펀딩 페이지에 삽입되는 제품 스토리 기획, 보도자료 작성, 고객사와의 소통 등이 주된 업무라고 이야기했다. 이는 작가 경력 14년 차였던 나에게 무척 익숙한 일이었다. 혹시 그 외에 더 할 수 있을 것 같은 업무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고, 나는 펀딩 영상 기획, 광고 이미지 기획, 유튜브 채널 기획도 가능하다고 답했다. 촬영 기획, 섭외, 촬영 구성안, 편집 구성안 등의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 업무였다.


이 외에도 3분짜리 영상을 기획·제작해 마스터가 나올 때까지 예상 소요 시간은 얼마인지, 제품 하나의 기획 페이지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어느 정도인지 등 작업 기간에 대한 질문을 상세하게 받았다. 매주 생방송 프로그램을 만들던 나에게는 큰 시간이 필요 없는 일이었지만 혹시 몰라 꽤 여유 있게 예상 일정을 대답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대답한 시간은 회사에서 생각한 예상 시간보다 두 배는 빨랐다.)


면접은 꽤 긴 시간 이어졌다. 심지어 다음 면접자가 도착한 것 같았는데도 15분 정도를 더 본 것 같았다. 콘텐츠 감독과 팀장 PD, 실장은 웃는 얼굴로 나를 배웅해줬지만, 회사 대표는 포커페이스여서 의중을 알기 어려웠다. 그렇게 면접을 마치고 결과를 기다렸지만 일주일이 다 되도록 연락이 없었다. 어차피 내가 지원한 회사도 아니었으니 크게 의미 두지 말자고 했지만, 면접 분위기가 좋았던 만큼 아쉬움이 남았다.


아쉬운 마음을 안고 머리도 식힐 겸, 운동도 할 겸 안양천에서 달리고 있을 때였다. 평소라면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지만, 직감적으로 이 전화는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받은 전화는 면접 본 회사의 대표였다.


“적합자라고 생각하긴 하는데, 우리 업무를 얼마나 잘 해낼지는 확신이 없네요. 서로 리스크를 안고 있다고 생각하고 계약직으로 시작해보는 건 어때요?”


14년간 방송작가를 해오면서 계약직은 너무도 익숙했지만, 이직한 회사에서도 계약직이라니.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 또다시 구직시장에서 험난한 생활을 하느니 지금부터 제대로 된 자리를 찾아보는 게 낫지 않을까. 수많은 생각이 스쳤지만,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네, 알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그때의 나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고정 수입이 없어진 지 4개월 차였고, 모아둔 돈으로 버틸 수는 있었지만 더해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직’이라는 첫 계단을 오를 기회였다. 해보고 후회할 바엔, 안 해보고 후회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이직에 성공했다.

작가의 이전글조직생활 할 수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