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30대 시절에는 연배가 위로 10살 이상 차이가 나는 사람을 부담스러워했다. 회사 회식자리에서도 가까이 가면 두드러기라도 생기는 것처럼 최대한 연장자들과 멀리 앉으려 동년배들과 눈치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40대가 되자 10살 이상 차이가 나도 그전에 느끼던 만큼의 세대 차가 느껴지지 않는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여서 일까.
지난 1월 새로 발령받은 부서에서 아주 오랜만에 막내가 되었다. 나이차가 가장 많은 선배는 나와 띠동갑이다. 같은 부서여도 사무실이 달라 한 달에 두세 번 보는 사이라 아직 서로가 많이 편한 상태는 아니었을 때였다. 하루는 선배가 친정부모님 기일이라 산소에 다녀왔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마음 한편이 찔린 듯 묻지도 않은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엄마를 뵈러 자주 못 간다고, 운전을 잘 못해 미로 같은 고속도로를 지나 남양주까지 가기도 힘들고, 애들 데리고 주말에 다녀오기엔 길이 막혀 못 갔다고. 몇 년 전에 휴가를 내고 친정아빠랑 다녀왔는데 최근엔 휴가가 늘 부족해 못 갔다고 덧붙였다. 그러자 선배가 말했다. "아고, 가야 해요. 혼자 가기 어려우면 남편 보고 운전해 달라고 하고. 어떻게 해서든 가서 뵙고 와야죠."
평소 내 또래 지인들과 이런 얘기를 나누면 다들 내 편에 서서 이야기해 주곤 했다. "그래, 하루 휴가 내기가 얼마나 힘들어.", "일하고 애 둘 키우기 쉽지 않지." 자기 합리화에 더하여 나를 걱정하는 지인들의 지원사격을 받아 수년동안 엄마를 보러 다녀오지 않아도 괜찮다 여겨 왔다. 매년 명절과 기일에 아빠댁에서 추모예배를 드리는 걸로 만족해 왔다. 추모하는 마음만 있으면 어디 있든 되는 거 아니냐 생각했다. 친정 오빠가 가끔 추모공원을 다녀왔다며 사진을 보내오면 마음이 한 번씩 무거워지긴 했다.
선배가 이어서 말했다. "어렵지만 시간 내서 막상 가서 뵙고 오면 참 좋을 거예요. 함 다녀와요." 다정하게 타이르는 듯한 말투에 없는 큰언니가 살아 돌아온 것 같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친하지 않은 직장 동료에게 그렇게 얘기해 주기 쉽지 않았을 거라 짐작한다. 내가 무슨 일을 하던 잘했다고 믿어주는 지인들의 응원과 위로가 피로를 싹 씻겨주는 반신욕 같은 존재였다면, 선배의 말은 한겨울 냉수마찰처럼 눈을 번쩍 뜨게 하는 힘이 있었다. 10년 전의 나라면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달랐다. 진지하게 그의 말을 곱씹었다.
아이들 위주로만 써오던 휴가였다. 연말이 다가올수록 영하의 기온에 뚝뚝 떨어지는 기온계처럼 휴가가 뚝뚝 떨어져 갔지만, 하루 시간 내어 친정아빠 차를 얻어 타고 엄마와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모셔 놓은 추모공원에 다녀왔다. 그날따라 가을 하늘은 계곡물처럼 시리고 투명했다. 쌀쌀한 날씨에도 묘비석에는 햇볕이 쏟아졌다. '사는 게 뭐 이리 바쁘다고 몇 년 만에 왔을까, 엄마' 하고 속삭이자 내리쬐는 가을볕처럼 내 눈물도 쏟아졌다. 오랜만에 와보니 선배의 말이 무엇인지 알겠다. 추모예배는 10년 가까이 이어진 탓인지 어느덧 형식적인 절차가 되어갔다. 종이에 쓰인 대로 읽고 기도하고 다 같이 식사하는 시간이 무심히 흘러간다. 추모공원에 직접 와서 엄마에게 말을 건네는 내 모습이 낯설면서도 기분 좋게 울컥했다. 몰려드는 그리움에 심장이 울렁였지만 엄마와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었다.
선배를 만나 자랑하듯 얘기했다. "저 그때 말씀 해주셔서 엄마 오랜만에 뵈러 다녀왔어요. 정말 좋더라고요."
"잘하셨어요. 자주 가보세요." 하며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어린 시절, 나이 든 사람들이 해주는 조언들이 괜스레 듣기 싫고 사정도 모르면서 자기 말만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들이 무슨 조언이라도 할라치면 삐딱해진 마음으로 설렁설렁 들었다. 나이가 든 것인지, 철이 쥐똥만큼이나 마 들어가는 것인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연장자의 진심 어린 조언들이 어느 순간부터 삶의 지혜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진다. 나도 준비가 되었을 때 살아온 경험들을 누군가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 물론 아무 말이나 하면 안 될 테고, 타인을 향한 애정을 먼저 담뿍 담는 일이 먼저겠다. 상대가 듣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되는 말이 무엇인지 잘 가려내고 적절한 시기에 툭 하고 던져줄 수 있는 그런 혜안을 가진 자가 되고 싶다. 이것이 내가 계속해서 읽고 쓰며 수양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지금 하는 걸 봐서는 50년은 족히 걸릴 것 같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