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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봉 Mar 03. 2023

진로를 고민하는 그대에게

틀니 셔틀의 악몽

학사모를 공중에 휘날리며 교내 곳곳에서 사진을 찍는 졸업생과 가족들이 안개꽃처럼 만개했던 2월 마지막 주. 바로 졸업 시즌이었다. 어떤 이는 졸업과 동시에 취업했고, 어떤 이는 아직 진로를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졸업을 앞두고 오랜 시간 함께한 애정하는 조교와 함께 식사를 했다. 아직 진로 방향을 정하지 못한 그녀가 고민을 털어놨다. 그녀는 전공 분야가 취업문도 좁고 워낙 밤낮없이 일하는 산업이라며 걱정을 한 무더기 안고 있었다. 한 마디로 '갈리며' 일을 해야 하고 결혼, 출산과 동시에 그만두는 선배들이 많아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게 현명한 선택일지 고민 중이었다.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안정적으로 보이는 교직원이나 공무원 시험에 관심이 간다며 정보를 구했다. 15년 전, 첫 직장에 들어섰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첫 직장은 화려한 빌딩숲에 위치했다. 취업의 기쁨도 잠시, 멋들어지게 코팅된 유리창 안에는 밖에서는 가늠조차 하지 못했던 정글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회식에 동기들과 나는 탬버린 치다 허벅지에 피멍이 들기도 하고 말끔히 정장을 차려입은 채로 크라잉 넛의 말 달리자를 무아지경으로 춤추며 불러재껴야 했다. 큰 대접에 따라주는 술을 받아마시고 화장실에 가서 게워내고 또 받아 마셔야 했다. 동기들끼리 쓰러지지 말라고 서로 몰래 꼬집어 주며 깨워주었다. 살아남아야 했다. 선배들은 하나같이 무서웠고 안경을 쓰고 다니면 못생겨 보이니 렌즈를 끼고 다니라는 의도를 알 수 없는 충고를 받아가며 하루하루 힘겹게 출근했다.






어느 날 사무실에 웬 노인이 한 명 찾아왔다. 일흔이 훌쩍 넘어 보였다. 모두 분주하게 그를 맞이했다. 지팡이를 짚고 있던 그는 나를 보며 반가워했다. 신입 직원이 왔냐며. 그 후로 나는 그의 전담 직원이 되었다. 원래는 내 뒤에 앉은 주임님이 전담이었다 한다. 한 때 정부 요직에 있던 자이고 그래서 아직도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들었다. 그는 올 때마다 커피를 내려놓고 자리로 돌아가려는 나를 불러 회의 테이블 옆에 앉혀놓고 문자 보내는 법을 배운다던지 쓸데없는 호구 조사를 한다던지 하며 내 시간을 갉아먹었다. 개인적인 심부름도 도맡아 해야 했다. 돈 몇 만 원을 쥐어 주며 회사 근처 백화점에 가서 아내가 좋아하는 꽈배기를 사 오라고 시켰다. 잔돈으로 너도 꼭 꽈배기 하나를 사 먹으라는 말을 덧붙였다. 꽈배기는 먹지 않았다.



그날은 장마철이라 유난히 날이 어둡고 습했다. 사무실 문이 열리며 탁탁 소리가 들렸다. 그의 나무지팡이 소리였다. 소름이 돋았다. 오늘은 또 뭘 시킬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은 믹스커피만 고집하는 그에게 은빛 티스푼이 아닌 믹스 봉지로 커피를 휘휘 저어 주는 게 고작이었다. 커피 드릴까요 묻는 나에게 그는 고개를 젓더니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다가가자 회의 테이블 중앙에 놓인 크리넥스 휴지 한 장을 뽑아 들었다. 휴지는 그의 손에 얌전히 안착했다. 다른 한 손을 입가로 가져가더니 천천히 텅 빈 입 속에서 무엇인가를 끄집어내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넋을 놓고 있으니 쑤욱 빠져나온 분홍빛 물체가 어느새 휴지 위에 살포시 얹혀있었다. 그것의 정체는 틀니였다.


"이거 OO건물 지하에 가면 내가 다니는 치과 있어. 거기에 맡기고 오면 돼. 미리 얘기해 뒀어."


힘없이 틀니를 받아 들던 팔이 덜덜 떨렸다.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는데 여린 휴지 조각 사이로 정체를 알고 싶지 않은 습기가 서서히 배어 나오며 손바닥을 마비시켰다. 어찌어찌 그 노인이 말한 치과에 가서 휴지 한 겹에 성의 없이 싸인 틀니를 내보이며 이름을 대고 초조히 기다렸다. 간호사 선생님이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틀니를 받아갔다. 밖으로 뛰쳐나가 화장실을 찾아 손바닥이 찢어져라 씻었다.


그 후 4번째 틀니 셔틀이 시작되기 전 사표를 던졌다. 입사 11개월 만에. 같은 해 동기 절반이 퇴사를 결정했다.





세상은 젊은이들에게 도전해 보라고 손짓한다. 도전, 혁신, 패기. 확신에 찬 두 글자 단어들이 도처에 도사리며 뭐라도 하라고 그들의 등을 떠민다. 하지만, 날갯짓을 하다 막다른 벽에 부딪혀 나락으로 떨어지는 젊은 영혼에게 내밀어 주는 손길은 찾기 어렵다. 그렇다고 시작도 하기 전에 끝을 알 수 없는 길은 험난하니 발을 들이지도 말라고 하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 길을 찾아 헤매는 졸업생에게 쉽사리 답을 할 수 없었다. 내뱉는 말의 무게가 무거움을 알기에.


어떤 선택을 하던지 그 속에 기쁨과 슬픔, 만족과 후회가 공존할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조언이었다. 비록 머리를 굴려가며 일한 것이 아니라 음주 가무가 주 업무였고, 보고서를 나른 것이 아니라 틀니를 날랐지만 그 속에서도 어렵사리 피어난 한 떨기 꽃은 있었다. 지금 직장에서도 어제는 퇴사를 꿈꾸고 오늘은 충성을 외친다.


멋들어진 조언을 해줄 수가 없어서 마음이 아팠지만 한 가지만 만큼은 자신 있게 말하며 헤어지는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언제든 찾아와. 술 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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