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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봉 Dec 08. 2022

직업병이 있으십니까


 나에게는 한 가지 병이 있다. 바로 '직업병'.


이 기회에 직업병을 사전에 검색해 보았다.

어떤 특정 직업에 종사함으로써 근로조건이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질환


사전적 의미의 직업병도 있다. 9 to 6 거대한 두 개의 모니터 벽에 가로막혀 사무실에 앉아 있으니 말이다. 거북목은 기본이요, 손목터널 증후군은 애교요, 오후만 되면 이게 오동통 무인지 내 다리인지.






 하지만 신체적 질환의 직업병뿐 아니라, 다른 종류의 직업병이 또 있다.

바로 14년간 행정직으로 근무하면서 얻은 습관들이다. 같은 행정직이라도 부서에 따라 꽤 다양한 일을 하게 된다.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에서 어느 부서든지 공통으로 하는 일은 문서 작업과 민원 응대이다.





 첫 부서는 바쁜 날은 조직 내외부에서 백통 넘게 전화가 오는 곳이었다. 내선 번호 4자리가 찍히며 내부 전화임을 알리는 통화의 첫 시작은 늘 이러했다. 넌 누구니. 난 무슨 부서 누구네. 잘 있었니. 난 죽지 못해 산다. 그리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느 순간 하도 전화를 많이 받다 보니 내선 4자리가 외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화 응대 스타일이 달라졌다.


'어, 3980번 이잖아. 팀장님 안녕하세요. OOO입니다. 뭘 도와드릴까요.'

'4997번이네. 이건 김 과장님! 과장님 안녕하세요. 아까 메일 주신 건으로 전화 주셨나요?'


이렇게 받기 시작하자 '여보세요 누구세요 나는 누구네 너는 누구니' 하는 시간이 단축되어 좋았다. 곧 이상 현상이 일어났다. 차 타고 갈 때 옆으로 지나가는 차들 번호판의 볼록한 차 번호들이 마치 내선 번호 같았다. 저건 박 주임님 내선 번호네, 저 차번호는 2번째와 4번째 자리 숫자 순서만 바꾸면 송 과장님 내선 번호네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었다. 길 가다 간판에 적힌 사업장의 전화번호를 보고 요리조리 조합을 해서 여러 개의 내선번호를 만들어내었다.


전화 응대가 적은 부서로 옮기면서 이 증상은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4자리 숫자만 보면 마음이 두근거린다. 저건 누구 번호였더라.





 또 다른 직업병. 무엇이든지 문서화하고 싶어 한다.

브런치 글을 처음 발행하던 날, 글이 두 개 이상 쌓이면 엑셀로 게시글 올린 날과 제목 순으로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었다.




아이들 방학 스케줄도 여행 계획도 엑셀 파일로 정성스럽게도 유난을 떨며 표를 만들어 준비한다. 나만 보는 문서라도 예쁘게 색도 입히고 글씨체도 요리조리 바꿔본다. 집에는 사무실용 투명 아크릴 꽂이를 벽에 붙여놓고 아이들 유치원, 학교 공지사항이나 식단을 주마다 바꾸어 껴놓는다.


아이들 학교에 제출하는 신청서는 또 어떻고. 출력해서 글씨로 쓰면 될 것을 꼭 타이핑하고  PDF 문서로 변환하여 서명을 깔끔하게 넣고 출력해야 속 시원하다.


선생님들께 쪽지 드릴 때도 이런 말투가 나도 모르게 나온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바쁘시겠지만 한 가지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O월 O일(수)에 우리 아이가 결석할 예정인데 블라블라.' 요일에 괄호는 왜 치니. 정신없이 사무실에서 일하다 선생님께 학교 공지 앱으로 쪽지를 보내고 나면 이거는 원, 팀장님께 보내드린 건지 선생님께 보낸 건지 헷갈릴 정도다. 너 지금 결재받니.






 직업병이 생기기 전의 나는 차 타고 갈 때는 멍 때리기를 즐겼고 일을 계획적으로 세우거나 정리하는 것을 싫어하던 '빈둥이'였다. 그렇게 27년 넘게 살아온 내 인생이 지난 14년간 일터에서 살아남으며 참 많이도 변했다. 물론 아직도 본성이 때때로 튀어나오긴 한다. 아일랜드 식탁에 대충 접어 올려놓은 아이들 학교 공지사항들을 보며 눈을 찔끔 감아보기도 하니까. 그래도 늘 품고 다니는 사표를 휘갈기고 뛰쳐나오지 않는다면 퇴직할 때까지 앞으로도 20년, 그때 나의 모습이 궁금하다.


직업병으로 얻은 행동이 진짜 내가 되어 꼼꼼한 계획적인 할머니가 될 것 인지. 타고난 본성은 못 이겨. 여전한 '빈둥이' 할머니로 불릴지.


*사진출처: Pixa 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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