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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봉 Jan 03. 2023

울 시간에 어머님 다리 한 번이라도 더 주물러드려라.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


자정이 다가오는 시간, 어둠보다 나를 무겁게 짓누르던 것은 당장 혼자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엄마의 용변을 처리하고 자세를 바꿔야 한다는 중압감이었다. 6인실 병실에 사는 모든 이가 겨우 잠이 든 상태였다. 숨죽이며 홀짝홀짝 울고 있던 나에게 옆 병상 할머니의 보호자로 와있던 아저씨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울 시간에 어머님 다리 한 번이라도 더 주물러드려라."


짧은 한 마디 말이 서늘하게 가슴을 파헤치고 들어왔다.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고 대들고 싶었다. 당신은 내 나이의 두 배쯤 돼서 어려운 일을 견딜 수 있겠지만 나는 아니라고 울부짖고 싶었다.

마흔 즈음이 되자 가끔 아저씨가 떠오르며 그의 진심이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가 툭 내뱉은 말은 나의 힘듦이 결코 쉬워 보여 서가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도 나만큼이나 똑같이 힘들었을 거다.






십수 년 전 겨울, 엄마는 친구들과 함께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고 나오던 길에 갑자기 찾아온 깨질듯한 두통과 구토로 쓰러져 근처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옮겨졌다. 하필 그날 응급실에는 환자가 차고 넘쳐 복도에서 대기를 해야 했다고 한다. 기다리다 못한 아빠는 엄마를 동대문에 있는 다른 대학병원으로 옮기셨다. 그리고 응급수술에 들어갔다. 병명은 당시에는 너무나도 생소했던 '지주막하 출혈'. [지주막하 출혈은 뇌 표면의 동맥이 손상되면서 발생하는 질환이다. 뇌졸중의 일종으로 뇌를 손상시킬 수 있다. (출처:서울아산병원)]


엄마가 생사를 가르며 힘겹게 싸우고 아빠는 수술실 앞 대기실에서 얼굴을 두 손에 파묻고 괴로워할 때, 나는 지구 반대편에서 평온하게 일상을 시작하고 있었다. 수술이 끝나고 중환자실로 옮겨지자 아빠는 해외에 있던 나와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쓰러져 뇌수술을 했고 지금 중환자실에 있다고 담담하게 전했다. 학기 중에 돌아와도 하루에 2번 허용되는 30분간의 면회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찬찬히 학기를 마치고 들어오라고 당부까지 했다.


아빠 말대로 착실하게 학기를 마치고 귀국해서 처음 중환자실을 찾았다. 뇌수술을 위해 뼈를 일부 제거해 한쪽 머리가 푹 꺼진 모양으로 엄마는 의식 없이 누워 있었다. 이따금씩 반사 반응과 같은 손발의 움직임만 있을 뿐이었다. 전화기 너머의 아빠가 너무 침착해서 이런 모습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엄마는 반혼수 상태였다.







그 길로 오빠는 군입대를 신청했고 나는 휴학을 하고 본격적인 보호자 세계에 뛰어들었다. 중환자실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내고 몇 달 만에 겨우 6인실 병실로 배정받았다. 급하게 구한 간병인이 엄마와 같은 천주교신자여서 내심 마음이 놓였다. 평일은 간병인이 봐주고 낮에만 면회를 갔다. 주말에는 아빠와 돌아가며 하루종일 엄마의 병실을 지켰다. 그 당시 뇌질환은 나라의 재정지원이 거의 없었을 때다. 수술이 더 남아 있었고 병원비, 간병인비, 각종 의료용품으로 나가는 돈이 다달이 몇백은 되었다. 나도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나는 무려 7건의 과외를 시작했다.


그날도 6시간 연속 과외를 뛰던 금요일 저녁이었다. 갑자기 전화를 걸어온 간병인이 당장 그만두겠다고 선포했다. 엄마도 너무 무겁고 다른 간병인들 텃세에도 못 견디겠다며 지금 짐을 싸겠다고 통보하고는 나를 만나지도 않은 채 병원을 나갔다.


당장 보호자 없이 혼자 덩그러이 있을 엄마를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가래라도 끼어 괴로워할 때 간병인이 없으면 누가 가래를 빼주랴. 용변이라도 보면 어쩌나. 대충 사정을 알고 계시던 과외학생 부모님께 설명을 드리고는 광명시에서 동대문까지 버스 타고 지하철 갈아타며 뛰고 또 뛰었다. 땀에 흠뻑 젖은 채로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9시가 넘어 병실은 소등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불이 꺼지기 전에 부랴부랴 급한 처치를 하고 나니 진이 빠졌다. 그리고 몇 시간을 멍하니 있다가 시간이 되어 엄마의 용변을 살피고 자세를 바꾸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에 엄마를 혼자 돌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소리를 안 내고 조용히 하려니 도저히 힘에 부쳐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무력감이 들이닥치며 울음이 터져 나왔다. 고요한 방에서 크게 소리 내지 못하고 숨죽여 울었다.


보호자 간이침대에서 자다 할머니의 자세를 고쳐주러 일어난 마흔 즈음되어 보이는 아저씨가 나를 보고 울 시간에 엄마 다리라도 한 번 더 주물러 주라고 했다. 엄마처럼 반혼수 상태로 누워 있는 분들은 쉽게 다리가 굳는다고 덧붙였다. 울음을 삼키며 엄마의 다리를 주섬주섬 만지기 시작했다. 마사지를 했던 건지 엄마의 약한 체온에 의지하고자 했던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결국 엄마의 상태는 10년이 넘어도 좋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후 새로운 간병인이 오셨고 그분은 엄마와 병원을 옮겨 다니며 오랜 시간 함께 해주었다.






20여 년 전 아무것도 못하고 흐느끼며 울고 있던 나에게 조언하던 아저씨는 어쩌면 힘들게 일하고 퇴근해서 새우잠을 자다 몇 시간마다 깨어 잠든 어머니의 자세를 바꿔줘야 하는 본인에게도 하는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마흔이 되어도 여전히 울고 싶은 날이 많다. 아이가 몹시 아플 때, 남편과 지지리도 의견이 안 맞을 때, 회사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물론 울고 싶으면 울어야 한다. 아이들에게도 크리스마스 캐럴송을 바꿔서 불러준다. '울어도 돼, 울어도 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도 선물을 주~신데요.' 하지만 마흔이 되서야 짐작해보건대 아저씨는 장시간 싸움이니 마음 단단히 먹으라는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고 싶었을 것이라고 마음이 열어진다.


결국 아저씨 말처럼 엄마의 다리는 생각보다 빠르게 굳어 갔다. 한 번 굳으니 아무리 주물러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가끔 울며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을 때 그래서 포기하고 싶을 때 아저씨의 말을 떠올린다. 우는 건 나중에도 할 수 있으니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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