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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봉 Jan 04. 2023

사내커플로 살아가기

똥꼬 발랄하던 27살, 두 번째 직장으로 이직을 감행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8살 많은 그를 만났다. 한참 위의 선배였지만 어찌어찌 몇 번 사적인 모임에서 만났고 문자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는 요즘말로 썸을 타던 어느 초여름, 그가 드디어 정식 데이트를 신청했다. 잠시 고민했다.


'혹시 몇 번 만나고 흐지부지 되어 헤어지고 사내에 소문나버리면 난 평생 시집도 못 가는 거 아냐?'


하지만 걱정도 잠시. 난 일명 '금사빠'다. 남편, 운도 좋다. 덜컥 연애를 시작했다.

질러는 봤지만 남편도 신입사원에 8살이나 어린 나와 연애를 막상 시작하려니 겁이 났나 보다.  데이트 장소는 대부분 직장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접선 장소도 사무실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잡았다. 작전을 수행하는 요원처럼 좌우를 휙휙 살피고 0.1초 안에 차에 올라탔다. 걸릴까 떨리면서도 희한하게 스릴 있었다.






한 번은 퇴근 후 일부러 1시간이 걸리는 파주까지 장작구이 삼겹살을 먹으러 갔다. 아무도 마주칠 걱정하지 않고 편히 고기로 배를 채우고 싶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 앞 흔들 그네에 앉아 후식으로 나눠준 군고구마를 원숭이처럼 신나게 킥킥 거리며 까먹는데 누군가 쳐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기분 탓이라 생각하고 고구마 한 개를 더 까먹으려 손을 뻗는데 멀리서 누군가 급하게 뛰어오더니 아는 체했다.


"아니 이게 누구야. 두 사람 여기까지 와서 뭐 해?"


급하게 한 발짝 옆으로 떨어져 앉아 봤지만 무슨 소용이 있겠으랴. 이미 꼴값을 떨면서 군고구마를 서로 먹여주고 있는 모습을 멀리서부터 보고 온 눈치인데. 평소에도 깐죽거리기로 유명했던 남편보다 더 위의 그 선배는 실실 웃으면서 남편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사귀는 거야? 잘~해봐."


고구마 백 개가 턱 막힌 기분으로 집으로 오면서 사내연애를 처음으로 후회했다. 구성원이 거의 안 바뀌는 조직 특성상 한 번 소문나면 많은 이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것이 자명했다. 다음 날 떨리는 마음으로 출근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하루, 이틀, 한 달이 지나도 회사에 크게 소문이 나지 않았다. 보기보다 의리가 있었던 선배였다.


남편도 그 일이 있은 뒤 안전한 곳은 없다고 느꼈는지 한 달 안에 화끈하게 프러포즈를 해버렸다. 연애 시작한 지 4개월 조금 지났을 때였다. 그리고 몇 달간 소리소문 없이 결혼 준비를 하고 결혼 한 달 전 사내에 공표했다.


다들 심심했는데 마침 잘 되었다는 듯이 조언인 듯 악담인 듯 말을 보탰다.

부서 간 회식을 하던 자리에서도 첫 대화 주제는 내 사내연애와 결혼발표였다. 상대팀 팀장님이 하이톤으로 호들갑을 떨면서 말했다.


"아니, 내가 예전에 OOO 씨(남편이름) 휴가날 회사에 잠깐 나온 걸 봤는데, 반바지를 입고 온 거야. 근데 세상에 털이.. 다리 털이 그렇게나 많더라고."


"........."


그때 깨달았다. 아, 사내커플이란 이런 것이구나. 내 남자 다리털의 수북함까지 회사 사람들과 공유를 해야 하는 운명이구나. 내가 뭘 잘못하면 쌍으로 욕을 먹을 수 있겠구나.






결혼 후에도 돈관리부터 가족계획까지 지나치게 많은 훈수를 받으며 벌써 10년 넘게 사내커플을 유지하고 있다. 스트레스받지 않고 사내커플로 살아가기 위해선 무엇보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 권법이 최고다.  그게 될까 싶었는데 하도 많이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된다.


남편 나이가 8살이나 많아 그의 퇴직이 몇 년은 더 빠를 예정이다. 사내커플의 장점이 없었겠냐만은 그래도 남편이라는 꼬리표 없이 온전히 '나'라는 사람으로 살아가보고 싶은 작은 소망이 있다. 'OOO의 와이프'가 아닌 내 이름 석자로만 나를 알릴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은근히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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