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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봉 Jan 13. 2023

해외출장이 행복했던 이유

여행과 출장 그 사이 어딘가에서 느낀 행복

직장생활 15년 차에 첫 공식 해외출장이 잡혔다. 

이전에도 유럽으로 업무과 관련 없는 가벼운 출장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나 하늘이 무심하게도 그즈음 첫째의 편도 수술이 어렵게 잡혔다.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다. 


이번 겨울, 급작스럽게 짧은 2박 3일 일정으로 도쿄 출장이 잡혔다. 다행히 큰 부담이 없는 출장이었다. 임원급 상사가 동행하지만 도쿄는 그녀의 주된 무대였다. 영어와 일본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꼰대 기질이 없는 상사와의 출장이라니. 게다가 상사와 다른 직원들은 일정이 달라 모두 먼저 출발했기에 잠시나마 출장이 아닌 나 홀로 여행을 즐길 수 있겠다 싶었다. 무려 9년 만에 떠나는 머나먼 외출로 소풍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설레었다. 


아이와 동행하지 않은 여행이 있었던가. 혼자만의(출장이라 혼자는 아니지만 아이가 없다면 혼자라고 느낄 수 있다.) 완벽한 시간을 위해 야침 차게 구입한 물건들이 오랜만의 자유부인 꿈을 이루는데 큰 일조를 했다.



헝겊이 아닌 가죽 크로스백

새벽 5시부터 일어나 곱게 단장을 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공항에 도착했다. 출국 심사 줄은 길었으나 아이 둘을 데리고 짐을 이고 지고 갈 때 없던 너그러움과 자애로움이 샘솟았다. 새벽부터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선 낯선 가족에게도 부담스러운 큰 미소를 지으며 기꺼이 줄을 양보했다. 아이들과 하던 여행에 문신처럼 등짝에 새겨지듯 매달린 백팩도 없었다. 출장을 위해 구입한 세련된 반짝이는 가죽 크로스백이 날 위해 찰랑이고 있었다. 명품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거금인 35만 원을 들여 디자이너백을 구입했다. 줄을 조절할 수 있어 숄더백도 되었다가 크로스백도 되었다가 전천후로 쓰임새가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A4용지 크기만 한 가방은 수납공간이 3곳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중 가운데 공간은 지퍼가 달려 있어 여권이나 돈을 보관하기 완벽했다. 맨 앞에는 보조배터리와 잡동사니들 맨 뒤에는 여행을 위해 구입한 새 책이 자리했다. 출장 내내 가방 사정은 여유로웠고 심지어 동료의 음료수까지 넣어줄 수 있었다. 뚱뚱한 백팩이여, 잠시만 안녕.





가녀장의 시대

출국심사를 마치자 면세점이 눈앞에 보였다. 쓰윽 무심하게 한 바퀴를 돌고는 자리에 앉았다. 새벽부터 불을 밝히며 여행객을 유혹하는 형형색색의 물건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고요함에 목말라 있었다. 기내용 캐리어와 함께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자유부인 시간을 경축하는 나만의 명상의식을 가졌다. 공항의 와글와글 소리가 백색소음이 되어 오롯이 혼자임을 흠뻑 느꼈다. 영원한 혼자는 두렵지만 순간의 고독이 필요한 삶이다. 짧은 명상이 끝나자 여권만큼이나 놓고 오지 않으려고 여러 번 확인을 거듭했던 책을 꺼내 들었다. 나 홀로 출장길을 위해 가장 완벽한 책을 고르고 고르다 출장 하루 전 배송받은 이슬아 작가 '가녀장의 시대'란 책이었다. 출장길에 동행할 책을 고르는 일에 꽤나 고심했다. 일단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은 제외했다. 잃어버리거나 더러워지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책이 너무 얇아도 두꺼워도 안되었다. 얇으면 2시간 비행 동안 다 읽어버릴 터이고, 두꺼우면 가방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주제는 너무 무겁지 않았으면 했다. 출장길에 많은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가볍게 술술 읽히지만 그렇다고 유치한 책은 싫었다. 적당히 생각하게 하고 위트가 있어 허를 찌르는 그런 책을 읽고 싶었다. 며칠 서점을 들락날락하고 서평들을 보며 가장 적당한 책을 드디어 골랐다. 지루한 비행시간 내내 톡톡 쏘는 사이다 같은 문체가 가슴을 시원하게 했다. 가녀장의 시대를 우리 집에도 불러오는 시원한 상상을 하며 먹보 아줌마가 기내식을 마다하고 읽어 내렸다.



숏패딩

출장에 이건 아니겠지

출장지 날씨를 찾아보니 우리나라보다 따뜻하다고 했다. 미리 도착한 동료들도 숏패딩이 적당하다고 했다. 예기치 않은 날씨차이는 추위를 많이 타 롱패딩만 옷장에 가득한 나에게 큰 고민을 안겨주었다. 집에 숏패딩이 한 개는 있었다. 다만, 이 숏패딩이 과연 출장에 적당한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반짝반짝한 재질의 시뻘건 잠바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꼰대가 아닌 상사와 간다지만 그래도 시뻘건 숏패딩이라니. 며칠을 고민하다 결국 출국 하루 전 퇴근길에 눈 질끈 감고 카키색 숏패딩을 한 벌 준비했다. 필요한 듯 불필요한 소비를 해버렸다. 출장(즉, 여행)이란 게 그런 것 같다. 평소에 하지 않았던 일을 하게 되는 것. 평소의 나라면 숏패딩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다. 혼자 출장을 가는 나는 평소의 내가 아닌 것이다. 다시 찾은 내가 겪게 될 일들이 숏패딩 하나에 설레었다. 





새치 염색


엄밀히 말하면 어떤 물건을 구입한 건 아니지만, 출장을 위해 젊음을 구입했다고 할 수 있겠다. 둘째를 출산하고 나니 한 두 개씩 새치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몇 년 사이 새치가 갑자기 새끼 치기를 급작스럽게 시작했다. 나름 젊은 엄마라고 생각해 왔기에 당혹스러웠다. 내 머리에 이물질 같은 이 하얀 존재들은 뭐지. 가끔 멋있는 백발로 늙어가는 상상도 했지만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몇 센티 자란 머리에 흰색 잔머리들이 존재감을 드러내며 뽀얗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출장이긴 하지만 거의 9년 만에 처음 있는 해외 방문이다. 조금은 더 젊은 나의 모습으로 누비고 싶었다. 워킹맘으로 허덕이다 늙어버린 내가 아닌, 나로 살던 그때로 말이다.





정신없는 2박 3일이 지나고 돌아와서 바리바리 싸 온 선물들을 모두에게 나누어주고 보니 나를 위해 사 온 것은 젓가락 한 세트 단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행복했던 이유는 온전히 나로만 지냈던 시간이 너무 소중했기 때문이다. 시도 때도 없이 아이들로부터 걸려온 전화와 문자가 반가우면서도 살짝 부담스럽긴 했지만 말이다.


여행은 정신을 다시 젊어지게 하는 샘이다.(안데르센)

경주마처럼 달려온 마흔 인생에서 우연히 턱 걸린 출장, 아니 여행이라는 과속방지턱에서 마음이 다시 젊어졌다. 회사 데스크에 앉아 무표정하게 모니터를 바라보며 마음의 소리를 내어본다. "출장, 자주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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