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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봉 Feb 06. 2023

메뚜기 권법 사용기

"엄마, 수학숙제 해야 하는데 오늘따라 집중이 안 돼요"

아이는 어제도 그제도 집중이 안 된다고 했지만 어금니를 꽉 물고 최대한 인자하게 얘기해 본다. 집중해서 하면 두어 장은 금방 풀 거라고. 하기 싫은 마음으로 억지로 푸느라 집중이 안되면 속도도 늦어지고 계속하기 싫어진다고.


"어떻게 집중해요?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요?"

아이의 물음에 번뜩 떠오르는 추억이 있었다.

"엄마가 옛날이야기 하나 해줄까?"

숙제를 잠시 미룰 수 있기에 아이는 반색하며 이야기를 들으러 뛰쳐나온다.






옛날 옛날 한 옛날에 아리땁고(믿거나 말거나) 기운 펄펄 넘쳐 이단 옆차기 돌려차기 하던 20대 엄마가 살고 있었단다......


20대 초반, 중환자실에 뇌졸중으로 입원한 엄마가 회복하기를 기약 없이 기다리던 휴학생 시절. 과외가 주업이었지만 학기 중이라 낮에는 일이 없었다. 게다가 중환자실 면회는 오전 1번, 오후 1번이라 오전 면회 후에 중간에 집에 다녀오기도,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애매했다.


자연스레 30분 거리에서 하숙을 하며 국가시험을 준비하던 그녀와 자주 만남을 가졌다. 그녀와 나는 타지에서 처음 만나 가깝게 된 지는 2년이 채 안 되었는데도 서로를 어버린 언니, 동생쯤으로 여기는 사이가 되었다. 하루는 공부가 잘 안 된다고 서로 하소연하다 급히 둘만의 스터디 그룹을 결성했다. 살다 보면 그런 관계인 사람들이 있다. 만나기만 하면 의욕이 샘솟아 새로운 구상을 하고 일을 벌이는. 우리가 그랬다. (아직도 그러고 있다.)


처음에는 카페에서 만나 공부하다 수다 떨다 하면서 스터디 모임인 듯 사랑방인 듯 시간을 흘려보냈다. 워낙 죽이 잘 맞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 나누다 테이블 위에 놓은 책이 머쓱해질 정도로 눈길 한 번 안 주고 헤어지는 날이 잦아졌다. 우리 만남은 늘 유익했지만 말이 떠나고 난 자리에 남는 건 추억뿐이었다. 아름다운 기억만 쌓기엔 당면 과제가 있어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스터디를 시작한 지 한 달 즈음 지나가고 있던 어느 여름날. 얘기 나누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중환자실 면회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래도 그날만큼은 목표치 공부를 하자고 마음을 굳게 먹고 만났던 터인데. 그러자 그녀가 오후에 시간이 남는다며 지하철에서 못다 한 공부를 하자고 제안했다. 시끄러운 지하철에서 공부가 될까? 의심하면서도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잽싸게 자리를 맡았다. 일단 책을 펼쳤다. 어색함도 잠시, 덜컹거리며 쇳소리를 내는 지하철 소음이 백색소음이 되어 뜬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이내 우리는 30분이라는 제한적인 시간과 지하철이 만들어 낸 폐쇄적인 공간이 빚은 투명한 시공간 속에 완벽하게 정착했다. 그리고 30분 후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어리둥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 같으면 1시간 넘게 걸릴 분량을 30분 만에 완벽히 해낸 것이었다. 면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도 시간의 마법을 경험했다.


우리는 이날부터 이 기이한 공부법을 '메뚜기 권법'으로 부르기로 했다. 폴짝폴짝 2호선, 3호선 뛰어다니면서 공부하는 모습이 메뚜기처럼 느껴졌다. 이후로 우리는 그녀 학교 앞 커피숍에서 만나지 않았다. 학교 앞 지하철 역에서 접선했다. 그리고 아무 곳이나 20-30분 근거리를 정해놓고 지하철로 펄쩍 뛰어들어 책을 펼쳐 들었다. 비교적 사람이 많지 않은 낮시간대라 자리는 여유로웠고 아낌없이 나오는 에어컨 바람이 카페에 대한 아쉬움을 가뿐히 날려주었다. 도착역 근처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오며 또 한 번 진하게 집중했다. 이렇게 우리는 메뚜기처럼 지하철로 돌아다니며 몇 달을 함께 공부했다. 그 후, 혼자서라도 도서관이나 집에서 공부가 잘 안 되는 날이 있으면 훌쩍 가방 메고 초원처럼 끝없는 2호선 한 바퀴를 돌며 메뚜기 권법을 시전 했다.


바쁘다, 바쁘다 했지만 그래도 지금에 비해선 시간이 남아돌던 시기였으니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늘 나노 단위로 살아야 하니 메뚜기 권법 사용자가 아니라 메뚜기 그 자체로 살고 있는 듯하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뒷다리가 남아나질 않도록.





엄마의 메뚜기 권법 얘기를 듣더니 아이가 타이머를 쌍절곤인양 멋들어지게 들고 비장하게 방으로 향했다.

"엄마, 오늘 숙제는 평소 30분 정도 걸릴 분량인데요, 20분만 맞춰놓고 해 볼게요. 내가 쿵후는 좀 하잖아요." 권법이라고 하니 쿵후랑 연결 짓는 아이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라떼시절' 얘기에 타박하지 않고 마음을 다잡아 주니 그것만으로도 오늘 공부는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20분 후 '띠디디디' 알람 소리가 울리자마자 아이가 해맑게 웃으며 폴짝 뛰어나왔다.

"엄마 다 했어요~~!"


메뚜기 권법 효과가 한 일주일은 갈 테고, 새로운 권법을 궁리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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