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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봉 Aug 29. 2023

여행의 기쁨과 슬픔(1)

이번 여름 휴가지는 강원도로 정했다. 몇 해전 강원도에 숙소까지 다 잡아놓고 태풍 소식을 마주한 적이 있다. 일부 비용까지 지불하고 취소한 여행이었기에 재도전하고 싶었다.


여행 떠나기 며칠 전부터 고막을 틀어막고 싶은 소식이 들리기 시작했다.

'태풍 카눈 동해로 방향 틀었다.'

뉴스 기사들은 '태풍, 한반도 관통, 동해' 등 무시무시한 말들을 쏟아냈다.  

아아, 왜 아니겠느냐. 우리 가족이 여행을 간다는데...


그렇다. 우리 가족 여행은 늘 시련의 연속이었다.




셋이 되어 떠난 첫 여행이 떠오른다. 첫째 7개월 무렵, 강원도 정동진으로 여름휴가를 떠났다. 잠자리에 예민한 아이라 걱정이 되긴 했지만, 너도 나도 떠나는 여행에 굳이 우리도 발 뺄 필요가 있나 싶었다. 여행 2일 차, 생글생글 웃던 아이가 갑자기 밤에 열이 나기 시작했다. 해열제를 먹이려 애를 썼지만 아이는 열나는 것도 서러운데 이따위 포도향약을 주느냐며 퉤퉤 뱉고 허리를 활처럼 접으며 강력히 저항했다. 급하게 뛰어나가 약국에서 난생처음 좌약 해열제를 받아왔다. 기저귀를 빼고 불타오르는 엉덩이 앞에서 머리를 맞대고 한참을 연구했지만 초보 에미 에비의 좌약 투여 솜씨는 어설펐다. 불쑥 들어온 이름 모를 불청객 때문에 어린 생명체는 극대노에 이르렀고 밤새 울어재꼈다는 슬픈 이야기가 우리 집 대대로 전해 내려온다.


그 뒤로 간이 코딱지만 해진 부부는 호캉스로 전략을 바꿨다. 아이가 차 안에서 호통칠 겨를도 없이 도착할 수 있으며 세련된 인테리어와 폭신한 침구가 긴장한 초보 부모의 마음을 녹여준다는 그곳. 야침 차게 준비한 호캉스는 하루 전 구내염에 걸려 열이 난 아이 덕분에 십원 한 장 못 돌려받고 취소하기에 이른다. 탄식을 내뱉는 일이 여러 번 반복되자 한동안 여행은 금기어가 되었다.






둘째가 태어났지만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한동안 돌에 박힌 이끼처럼 동네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러나 두 아이를 키우느라 기억력이 많이 감퇴해 버린 우리 부부는 어느 날 홀린 듯이 7살, 3살 두 아이를 데리고 제주도로 여름휴가를 떠났다. 아아, 어리석은 인간이여. 어째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 제주도 도착 첫날부터 열이 나기 시작한 둘째는 3박 4일 내내 불덩이였다. 여름휴가가 아닌 여름 병가였다.


어이없게도 1년 뒤, 제주도로 다시 떠났다. 아픈 시절을 기억할리 없는 아이들은 비행기, 바다를 외쳤고 반짝거리는 4개의 눈을 외면할 수 없었다. 비장하게 준비하고 제주도행 비행기를 탔다. 상냥한 승무원의 송별을 받으며 제주도에 착륙한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둘째는 승무원 코앞에서 화려한 분수토를 하고 말았다. 아임 쏘리, 스미마셍, 뚜이부치 뭔 말을 가져다 붙여도 시원치 않았다. 괜찮다며 닦지 않아도 된다고 만류하던 그분들 앞에 경건히 무릎 꿇고 전광석화의 속도로 꺼낸 봉지와 물티슈로 기내 바닥이 뚫리도록 닦아냈다. 불화살을 온몸으로 막아내는 용맹한 장수처럼 여행 내내 아이 입에서 나오는 분수를 받아냈다.


세 번째 제주도 여행에 대해서 쓰려니 일단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 와야겠다. 태풍과의 인연은 이때부터였나 보다. 다른 곳으로 간다던 태풍이 여행 출발 이틀 전 심술쟁이처럼 제주도로 방향을 틀었다. 불안한 마음을 가득 안고 탄 비행기에서 둘째가 난데없이 구토를 시작했다.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하겠느냐. 숙련된 N연차 에미로 주머니에 시크하게 꽂아둔 검정 비닐봉지를 꺼내 아이 귀에 걸었다. 작년처럼 바닥을 닦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도 잠시, 아이는 점점 뜨거워졌고 아름다운 제주 땅에 도착할 때 즈음 체온계는 시뻘건 불빛을 내뿜으며 39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공항에서 내려 처음 간 곳은 파도치는 바닷가가 아닌 바닷가 앞 소아과였다. 한 시간 넘는 대기시간을 견뎌내고 약 수만 개를 받았다. 숙소로 가는 길에는 연약한 나무들이 도로 곳곳에 버림받은 여인처럼 쓰러져 있었고, 차는 내 마음처럼 흔들거렸다. 여행 내내 주위를 맴돌던 태풍은 물러갔으나 아이를 지배한 열감기는 떠나지 않고 망할 거머리처럼 집으로 함께 돌아왔다. 


여행 와서 흑돼지 한 번 못 먹고 수액만 맞다니

이쯤 되니 주변에서는 제주도는 쳐다보지도 말라했지만 제주를 사랑하는 남편은 모든 게 다 우연의 일치라며 포기하지 않았다. 긍정 에너지를 뿜어내며 그는 작년 여름, 4번째 제주도 여름 여행을 계획했다. 부정 에너지를 내뿜던 내가 몇 번이나 제주 여행에 훼방을 놓았지만 정신 차려보니 비행기 안이었다. 공항 근처 관광지 한 곳을 둘러보고 숙소로 가려는데 둘째 아이가 처졌다. 또 그분이 오셨구나. 직감할 수 있었다. 이마에 손을 짚고 체온을 가늠해 보았다. 한... 38.3도 정도 되려나? 체온계를 찾아 재어보니 정확히 38.3도. 쓸데없이 인간 체온계임을 증명하며 화려한 여행을 시작했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게도 열은 여행 내내 내려오지 않았다. 낯선 소아과에 누워 수액을 꽂고 힘없이 누워있는 아이를 보며 당분간 여행은 없다고 소리 낮춰 중얼거렸다.




그렇게 또 제주도까지 가서 바닷물에 발끝도 적셔보지 못하고 육지로 돌아왔다. 제주도에 간 것인지 부티 나게 비행기씩이나 타고 다른 동네 병원에 다녀온 것인지 헷갈렸다. 




1년 동안 긴 여행을 계획하지 않았다. 이번 여름휴가 계획을 얘기하며 남편이 '제...' 하는 순간 멀리서부터 날아가 입을 틀어막아버렸다.


그렇게 사이좋게(?) 정한 여행지가 강원도였다.

오랜만에 주어진 4박 5일 휴가에 콧구멍이 벌름벌름거렸다. 아이 상태도 괜찮아 보였다. 무엇보다 비행기 타고 가는 무리한 일정이 아니고 둘째도 초등학생이 되었으니 체력이 좋아졌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여행을 떠나요~ 푸른 언덕에~ 배낭을 메고~~ 년생을 짐작하게 할 수 있는 노래를 부르며 수영복을 챙기던 나와 남편은 갑자기 속보로 뜬 태풍 소식에 아연실색하고야 말았으니...


"남편아, 또 태풍이란다"

남편의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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