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봉 Oct 27. 2023

유통기한 없어 좋은 것들

날씨가 선선해져 가족들과 함께 저녁 산책을 나섰다. 동네 새로 지어진 놀이터에도 가보고 아이들과 달리기 시합도 하며 한 시간 정도 걸었더니 갈증이 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동네 슈퍼에 들러 각자 좋아하는 음료수를 골랐다. 남편은 요구르트 음료, 나는 생수, 아들은 평소 즐겨 먹던 이온 음료, 딸은 캐릭터 음료를 골랐다. 차가운 액체가 목구멍으로 지나가자 등골이 기분 좋게 서늘해졌다.


집에 도착해 음료수통을 분리수거함에 넣으려던 아들이 외쳤다.

"엄마, 이거 유통기한 지났는데?"

온 가족이 하던 일을 멈추고 모여들었다. 음료수 목덜미에 선명하게 찍혀있는 까만 숫자들이 경고등처럼 깜박이는 듯했다. 유통기한이 한 달이나 지나있었다.

"맛 이상하지 않았어?"

걱정스레 물으니 아이는 잘 모르겠다고 한다. 유통기한은 시중에 유통될 수 있는 기한이고 쉽게 상하는 종류의 음식이 아니라고 아이를 안심시켰다.


제품에 유통기한이 없으면 좋겠다고 하는 아이에게 말했다. 먹거리는 신선할수록 건강에 좋으니 유통기한이 있는 게 더 좋겠지만 여기 유통기한 없는 엄마의 사랑이 있다며 손으로 하트를 만들어 입에 넣어주는 시늉을 했다. 에미의 끝없는 사랑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깔깔 거리며 도망치기 바빴다.




갈증을 해소해 준 해결사에서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음료수를 버리며 생각했다.

삶에는 먹거리뿐 아니라 유통기한이 길고 짧은 다양한 것들이 존재한다고.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유통기한이 없음에 확실하지만, 그렇지 않은 관계도 다. 아이 친구 엄마들과의 관계가 그렇다. 아이들이 한창 같이 잘 놀 때는 언니, 동생 하며 끈끈한 우정이 끝도 없이 은하수까지 이어지더니, 아이들이 멀어지니 자연스레 멀어진다. 일분이라도 떨어지면 보고 싶어 참을 수 없어 결혼한 남편과는 적당한 거리 두기가 필요해졌다. 아끼던 코트는 오 년 입으니 후줄근해져 얼마 전 옷수거함에 넣어버렸다. 엄마가 남긴 유품인 숄은 십수 년이 지나 보풀로 가득하고 여기저기 해졌지만 방부제를 한껏 머금은 듯 앞으로 십 년은 더 거뜬히 함께할 물건이다. 지저분해진 외관에도 숨겨지지 않는 그리움 한 방울이 묻어 있기에.


덜렁대는 성격이라 먹거리 유통기한을 챙기는 일은 놓치지만 유통기한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자주 생각한다.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 심금을 울리는 문학 작품, 인생의 순간마다 빠질 수 없는 음악,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진심 어린 조언들.


영원히 변치 않음을 무작정 사모하는 것은 아니다. 내 안의 나약함으로 인해 쉬이 변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닌, 굳건하게 곁을 지키며 나로 서게 하는 것들을 알아차리고 붙잡고 싶다.


유통기한 없는 존재를 하나둘씩 발견하고 늘려가며 내 인생의 유통기한 동안 최대한 신선하게 살아가려 오늘도 부단히 노력해 본다. 그것으로 살아 있음을 느낀다.






















작가의 이전글 돌아가신 엄마가 꿈에 나온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