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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봉 Apr 24. 2024

홍시 네가 먹었지?

저녁밥을 먹고 나른하게 쉬고 있는데 둘째 딸꾹질이 시작되었다. 아이는 익숙한 듯 옷을 따뜻하게 껴입더니 인사하는 자세를 하며 따뜻한 물을 마셨다. 오늘따라 딸꾹질은 아스팔트에 달라붙은 껌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딸꾹질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9살 딸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날이 떠올랐다. 딱 저 나이만 한 때였다. 30년도 더 된 일인데 그곳으로 돌아간 듯 집안 냄새가 코 끝에 서렸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엄마는 부엌에서 설거지 중이었고, 부엌과 이어진 거실에 아빠와 나 둘이 앉아 있었다. 오래된 검은 소파 검은 가죽이 보기 싫게 뜯어져 살구색으로 천갈이를 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알싸하게 퍼지는 가죽 냄새가 불쾌하면서도 중독성이 있어 계속 킁킁거리며 공상에 빠져있었다. 갑자기 딸꾹질을 시작했다. 물도 마셔보고 뛰어도 보고 옷도 껴입었는데 몇 분 동안 멈추지 않았다. 얼굴이 폭탄처럼 터지기 일보직전까지 숨도 참아봤지만 딸꾹질은 이

모든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계속 찾아왔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던 아빠가 짐짓 화난 표정으로 신문을 소리 내어 접더니 거실 탁자 위에 탁 올려놓았다. 그리곤 내 이름 석자를 또박또박 불렀다. 아이들은 부모가 '성'까지 부를 때 머리털이 쭈뼛 서는 법. 놀란 눈으로 아빠를 바라봤다.

"너, 식탁 위에 있던 잘 익은 홍시 한 개 못 봤어?"

"못 봤는데요."

"아빠가 저녁 먹고 간식으로 먹으려고 했는데 없어졌어. 네가 먹었지?"

"아니에요, 나 홍시 별로 좋아하지도 않아요."

"엄마는 설거지하고, 오빠는 방 안에서 안 나왔고, 거실에는 너와 나 둘 뿐인데 그럼 누가 먹었겠어?"

뭔가 논리적인 게 아빠 말이 맞는 것 같았지만 난 맹세코 홍시를 먹지 않았다. 그놈의 홍시가 어디 있는지 두리번거렸지만 야속하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평소에 아빠는 화내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유치하게 홍시 하나 가지고 성을 내는 아빠에게 서운해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진짜 아니에요, 나 안 먹었어요."

별안간 아빠가 세상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딸꾹질 멈췄지?? 아하하하하하"

당했다. 분했지만 은근히 재미있었다. 따라서 박장대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로 딸꾹질할 때마다 아빠 주위를 맴돌며 불호령을 기대했다.




딸아이 이름 석자를 저음으로 불렀다. 성까지 불려 잔뜩 긴장한 둘째가 나를 빤히 봤다.

"엄마가 밥 먹고 먹으려고 식탁 위에 빵 사다 놨는데 없어졌네. 네가 먹었니?"

"네? 전 빵 보지도 못했어요."

"지금 집에 너랑 나 단 둘인데 누가 먹었겠어. 네가 빵을 좋아하니까 몰래 먹은 거 아니야?"

자기는 절대 아니라며 원망의 눈빛을 쏘아대는 둘째가 너무 귀여웠지만 모른 척하고 씰룩거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너....."

"네?"

"딸꾹질 멈췄지!!"

"엄마~!!!!"

와락 달려와 안기는 아이를 달래며 홍시 얘기를 해주었다. 다 듣고 난 딸아이가 할아버지는 정말 장난꾸러기 라니까 하면서도 놀라게 하는 게 딸꾹질을 멈추게 하는 최고의 방법이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날 밤 이부자리를 펴고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이가 또 딸꾹질을 시작했다. ‘그거'를 해달라며 그 시절 나처럼 내 주위를 맴돌았다. 바로 또 하면 효과 없다는 말에 실망한 얼굴이었다.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를 힐끔거리며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타이밍을 기다렸다. 지금이다!

"어헝!!!!!!!!"

단전에서 끌어올린 깊은 포효를 아이 얼굴 위로 내뱉었다. 머리 위로 두 팔을 과장스럽게 들어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수면잠옷을 입어 흡사 곰과 같았을 내 모습에 아이는 꺄아아아 하고 기분 좋은 비명을 질렀다.

"엄마가 안 해주는 줄 알았어. 이제 멈출 거야. 진짜 놀랬거든."

"타이밍을 기다렸지. 엄청 놀라게 해 주려고. 이제 안 하지?"

하하 웃는 사이 아이 입이 다시 뽀글 거렸다.

'딸꾹'

우리는 떼굴떼굴 구르며 눈물 나게 웃고는 몇 번의 어헝, 어흥, 커억을 주고받다 결국 10분 만에 딸꾹질을 몰아냈다. 너무 웃어 눈가에 눈물이 맺힌 아이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아빠도 그때 반짝이던 내 두 눈을 보았으려나. 그랬으면 좋겠다. 그 후에 내가 자주 보인 눈은 도끼눈 아님 흐리멍덩한 눈이었을 테니.

홍시 사건도 기억하려나.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딸꾹질할 때마다, 홍시를 볼 때마다 난 아빠가 생각나니까 말이다. 그날 기억은 홍시를 닮은 주황빛 노을처럼 내 어린 세상을 따뜻하게 물들였는데, 그날이 아빠 생에 따뜻했던 작은 한 조각으로 남아있길 바라본다.



*사진출처@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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