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지 않아도 떠오르는 생각들
얼마 전 자동결제 해지를 깜빡한 탓에 웨이브 OTT에 7,900원을 다시 쓰게 되었다. 괜히 돈이 아까워서 뭐라도 더 찾아보려 했는데, 마침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예능이 보였다. 이런 탐사보도 성격의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편이라 바로 정주행을 시작했다. 몰랐는데, 이제 정규 편성돼서 매주마다 찾아볼 수 있더라.
시즌2의 8회였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분의 안타까운 사연이 전해졌다. 만화방 가게 주인이자 누군가의 아버지였던 분은, 끝끝내 본인의 무죄를 입증했으나 그게 전부였다. 코로나가 한창인 시기의 에피소드였는지, 면회도 못하는 요양병원에 계신 모습이 보였다.
펑펑 울었다. 그분의 안타까운 사연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아마 아내가 집에 같이 있었다면 결코 울지 않았으리라. 나는 혼자 있었고 화면에 보이는 다 늙은 주인공은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게 만들었다. 그래. 아버지 생각이 나서 울었다. 가장이 된 후로 일부러라도 눈물을 참아왔는데 오늘은 원 없이 울어버렸다. 아무도 없었으니까.
보고 싶어서 뭐 그런 건 아니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의 모습이 자꾸 생각나서 그랬다. 췌장암이 간까지 전이되어 복수가 차올랐고, 그래서 눕기만 하면 통증이 심해 밤새 엎드려 앉아 잠을 청하던 모습이 생각나서 그랬다. 잠? 잠은 무슨. 한 시간 동안에도 여러 번 발작하듯 통증에 신음했고, 너무 아파서 스스로 마약성 진통제를 찾기까지 했다. 근데 망할 꼬꼬무를 보다가 그 모습이 떠올라 이렇게 펑펑 울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가시기 전, 내가 후회하지 않고 싶어서 틈틈이 병간호를 했었다. 당신이 마지막이 되던 날, 그보다 불과 며칠 전. 끝내 터지지만 않았으면 지금만큼 후회하진 않았을 텐데. 당신의 행동에 끝끝내 참지 못하고 터트렸던 그날, 내 발목에 난 상처는 이제 흉터가 되어 잊을 수 없게 만들어놨다.
당신이 마지막이 되던 그날, 앰뷸런스를 불러달라며 애타게 찾았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았으면 지금처럼 후회하지 않았을 거다. 이미 여러 번 응급실을 가서도 별다른 조치를 취할 수 없음을 알고 있어서 그랬다. 보호자 대기 의자에 앉아 기약 없이 기다리기만 할게 뻔해서 그랬다. 근데 결국 심정지 상태로 구급차를 타서 응급실을 가더니 그렇게 저 위로 가셨다.
하필, 항상 잊고 싶어 애를 쓰는 그날의 장면만 생각날까. 그때 내가 한 번만 더 참았으면. 그때 군말 없이 사설 응급차라도 불렀으면. 그날이 필연적으로 가시는 날이었다 한들, 집에서 그 난리를 피우진 않았을 텐데. CPR 하면서 갈비뼈를 부러뜨린 듯한 느낌이 손을 타고 왔는데, 이런 기억까지 가질 일은 없었을 텐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은 결국 원하지 않게 떠오르는 생각으로 치환됐다.
하여간, 조금이라도 덜 후회하고 싶었는데 아주 제대로 후회하고 자책하는 불효자가 됐다. 모두의 앞에서는 담담한 척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행동하는데, 늘상 혼자 있으면 생각나고 잊히지가 않는다. 아침 바쁜 출근 준비 때 양말을 신으면서도 생각난다. 발목에 자리한 흉터가 없어지기 전까진 계속 생각날 거다. 근데 흉터 제거 연고를 아무리 발라대도 없어지지가 않는다. 아마도 평생 가져가야 할 운명인가 보다.
보고 싶다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는다. 살아계실 때에도 잘 찾아뵙지 않았는데 뭘 새삼스레. 그냥 가끔은 살짝 원망스러운 정도다. 췌장암 판정을 받던 그때에도 날 꼼짝없이 불효자로 만드시더니, 가시는 그 날조차 벗어날 수 없는 꼬꼬무를 남겨두고 가셨으니까.
며칠 전 주말 아침, 나 홀로 아버지 수목장을 다녀왔다. 아빠 생각 좀 그만 나게 해달라고 말했다. 어디 하나도 안 아프고 행복하고 따뜻한 곳에서 잘 계시는 건지 못 들으셨나 보다. 그려, 가신지 1년도 되지 않았으니깐 한창 행복하게 계실 테지.
근데 아부지. 즐길 만큼 즐기고 충분히 행복해지면 잠깐 내 목소리 한 번만 들어주소. 내 그 전까진 내가 만든 업보로 여기고 꼬꼬무에 힘겨운 것도 다 인내하고 있을 테니, 어느 날이 되면 두렵고 무서운 생각이 아니라 잠깐이라도 우리 같이 행복했던 생각이 떠오르게끔 해주소. 아무리 애를 써도 행복했던 기억이 쉬이 떠오르지가 않아. 좀 도와줘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