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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의 위대함’ 재인식하게 된 국립극단 <조씨고아>

국립극단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관극 체험과 나의 삶

by 남다른디테일

얼마 만에 보는 연극인가. 나에게 연극은 정말 사랑하지만 밉고, 위대하지만 절대 세상을 바꿀 수 없는, 예술인 거 같으면서도 아마추어들이 많은 집단인 거 같고, 매우 모순적이고 이중적이고 애매한 분야로 각인되어 있다.


미술과 음악을 하려면 영재교육도 받고 유학도 다녀와야 인정받고 평생을 바쳐서 그 업에 종사해야 인정을 받을까 말까 하는데, 연극은 체계적인 교육체계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고 무대에 서는 배우는 얼마나 트레이닝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 때도 많다.


우연히 연극을 하게 됐다는 사람들도 많고 또 TV와 영화에서 활동하던 연예인들이 연극을 한다고 하면 이슈가 되는 현실이다.


또 연극을 하는 많은 배우들이 연극무대보다는 영화나 TV 드라마로 가고 싶어 하니 연극에는 '인재'를 만나기란 매우 어렵다.


관객 입장에서도 연극을 보는 행위는 매우 큰 수고로움을 각오해야 한다. 티켓을 예매해야 하고 옷을 깔끔하게 입고 공연장을 찾고 길면 2시간 이상 무대에서 꼼짝 않고 앉아 있어야 한다. 또 공연이 끝나고 커피나 식사를 할 때도 많다.


게다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제대로 된 연극'을 보게 되는 경우는 50편 중 1편 정도 될까? 연극을 보는 행위는 '실패할 확률'이 매우 높다. 검증된 뮤지컬, 영화, 유명 미술가의 전시, 세계적인 뮤지션의 내한 공연 등은 대부분 검증이 된 예술이라 실패할 확률이 매우 낮다.


그러나 연극을 보는 관극 행위는 성공할 확률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매우 높다. 연극을 보면서 "돈이 아까웠다", “앉아있는 시간이 아까웠다", "불편한 의자에 앉아 허리와 엉덩이가 아팠다" 등의 말이 나오는 것도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연극이 대중으로부터 소외된 것도 이런 영향이 클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위대한 연극 한 편을 건진다는 것은 위대한 발명품을 개발하듯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반증한다. 전 세계 어디를 가든 셰익스피어와 안톤체홉의 작품이 올라가고 재창작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나는 어릴 적 연극을 매우 많이 보면서 성장했다. 정말로 허리와 엉덩이, 무릎이 아플 정도로 많이 봤다. 지금은 호텔과 여행에 빠져 지내지만, 당시에는 연극에 미쳐 마니아처럼 지냈다.


나는 한 분야에 빠지면 그 깊이를 알 수 있을 때까지 파고드는 성격이다. 누군가에게 지는 것도 별로 안 좋아했다. 거기서 끝을 보고 인사이더로 들어가야 하는데, 한편으로는 인사이더가 되지 못해 항상 아웃사이더에 머물다 보니 지금 내 팔자가 이리된 거 같기도 하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나는 항상 아웃사이더였던거 같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감동적인 연극을 많이 봤었다. 연극의 위대함을 나는 안다. 반면 주변에서는 연극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이 봤다. 끼 있는 사람들이 그 끼를 주체 못 해서 하는 자위행위로 보는 시각, 아마추어 연기자들이 영화로 가고 싶어서 대학로에서 연극한다는 말도 들었다. 일부 맞는 말일 수도 있고 틀린 말일 수도 있다.


연극판에도 정말 실력 없는 사람들도 많고 아마추어도 많고 지원금 받으려고 있는 사람 등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난 '위대한 연극'에는 연극판에서만 볼 수 있었던 위대한 배우, 연출가, 작가 등이 있었다.

그들을 만나려면 연극을 봐야 했었다.


그 작은 소극장 무대에서 기적을 이끌어낸 연극인을 떠올리면 존경스러워진다. 아무도 가지 않을 거 같은 시골 논밭에서 야외무대를 펼치는 연극인, 그걸 보겠다고 전국에서 수백 명이 몰려드는 광경,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뛴다.


#조광화 의 #남자충동 의 빠른 극회전과 탄탄한 극작술, 배우들의 치밀한 연기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에너지 넘치는 #김광보 의 #에쿠우스 #종로고양이

#박근형 의 #청춘예찬 에서의 드러난 신사실주의와 #박해일 이라는 배우의 발견

#정의신 의 #야키니쿠드래곤 에서 눈물을 펑펑 흘렸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난다.

지금은 미투 때문에 감옥에 들어간 #이윤택 은 분명 나쁜 짓을 한 인물은 맞으나, 연극 하나로만 봤을 때는 대단했다. 그의 연극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웃고 울고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연극만이 줄 수 있는 위대한 감동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일본연극에서 본 그들의 오타쿠적인 기질과 장인정신은 대단했다.


지금 나에게 한국연극사를 기술하라고 하면 며칠 만에 쓸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연극 마니아였다. 대학로에서 수많은 연극을 본 것을 비롯해 판소리부터 굿판까지 연극의 원류를 찾아 홀로 전국을 다닌 적도 있다.


그런데 아무리 연극을 좋아하고 많이 봤으면 뭐하나. 현장에서 일한 것도 없고 전공을 한 것도 아닌데. 나는 아웃사이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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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언젠가부터 나는 연극을 보지 않았다. 연극 말고도 더 다양하고 재미난 세상이 있다는 걸 알았다. 어릴 때 어두컴컴한 공연장에 있었던 시간이 아까웠다. 해외여행을 다니면서도 연극이나 뮤지컬을 본 건 몇 번 되지 않는다. 공연을 보려면 너무나 시간을 많이 소요됐다. 티켓을 예매하고, 옷도 좀 갖춰입고 늦지 않게 도착하고, 공연 스토리도 좀 파악해야 하고 몇 시간 앉아 있어야 한다. 또 그 공연 100% 만족감을 줄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반면 미술관이나 갤러리는 내가 시간을 컨트롤할 수 있고 복장도 큰 제약을 받지 않는다. 사진도 자유롭게 찍을 수 있다. 게다가 무료로 볼 수 있는 기회도 많고 유명 작가의 작품은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다.


특히 연극을 잊고 싶었다. 어릴 때 연극에 빠져 살았던 시간을 보상을 받지 못할 망정, 더 이상 빠져 살고 싶지 않았다. 연극의 세계에 빠진다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전 누군가에게서 #조씨고아 를 꼭 보기를 추천받았다. 알아봤더니 2015년에 초연을 했었다. 5년 이상 그 좋다는 공연을 보지 않은 걸 보면, 나도 참 연극에 무관심했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얼마나 좋은 작품이길래 5년 이상 롱런하고 있는지 궁금해 #명동예술극장 으로 향했다.

이 극장은 1950년대 시공관으로 지어졌고 70년대까지 국립극장으로 사용됐다가 2009년에 연극전용으로 명동예술극장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현재는 #국립극단 전용 극장으로 사용되는 걸로 알고 있다.



일본에만 가도 가부키 전용극장을 시내 한 복판에서도 볼 수 있다. 명동 한복판에 이런 극장을 만든 것도 우리의 극예술 발전과 전통예술 보존 등을 목적으로 지어졌을 텐데 그 취지에 맞게 운영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알면 알수록 우리의 공연예술은 너무나 일천한 거 같다. BTS와 같은 엔터테인먼트 쪽은 잘될지 몰라도 순수예술이나 공연예술은 그것을 연구하는 학자와 보존 발전시키는 공연자, 지켜보는 관객, 정부의 지원 등에서 전문가를 만나기가 너무나 어렵다.


명동예술극장도 엄청 자주 지나갔지만, 들어가 보고 싶은 욕구가 안 생겼다.

#고선웅 이라는 연출가는 과거에 #칼로막베스 를 본 적이 있는데, 고전을 해체하고 빠른 템포와 위트있는 연출을 했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배우 #하성광 은 야키니쿠드래곤 등 여러 작품에서 봤는데 장수할 배우로 여겨졌는데 역시 대성하는 군.

오랜만에 앉아보는 공연장. 음악을 듣기 위해 공연장을 자주 갔었는데 연극을 보기 위해 공연장을 찾은 건 정말 오랜만이다.


인터미션 포함해서 공연 시간이 2시간 30분. 요즘처럼 인스타그램에 10초짜리 동영상이 금세 화제가 되는 세상에 2시간 30분 동안 인내심을 지키며 바라볼 관객들이 아직도 있다니.



연극을 보는 행위는 대단히 아날로그적이고 인내심과 여유가 있어야 하는 거 같다.


조씨고아의 원작은 중국이며 진나라 대장군 도안고라는 사람이 권력을 얻기 위해 조씨 가문의 멸족을 행한다.

조순도 죽고 그의 아들 조삭과 그의 아내가 임신을 했는데, 그 아이가 조씨고아였다.

조씨고아는 태아 나자마자 도안고에 의해 죽을 운명에 처한 것이다.


이때 의사 정영(하성광)이 조씨 가문의 핏줄인 조씨고아를 살려야 할 상황이 발생했고, 조씨고아를 살려야만 도안고를 복수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를 위해 자신의 자식과 아내 목숨과 바꿀 처지에 놓인 것이다.


정영 역시 45세에 얻은 첫아들인데, 조씨고아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아이와 조씨고아를 맞바꿔야 하는 현실, 그 과정에서 정영의 아내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본인의 친자식을 조씨고아와 맞바꿔야 하는 정영과 그의 아내의 연기가 이어질 때 객석 곳곳에서는 눈물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정의와 의리를 지키기 위해 친자식을 버려야 하는 정영의 마음, 남편이 미치지 않고서 어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그의 아내, 끝내 자살을 하고 마는 아내의 연기는 정말 연극 무대에서만 볼 수 있는 매력이 아닐 수 없었다.


정영의 마음이 이해하기는 어려웠으나, 그가 처한 복잡한 심리를 연기를 잘 풀어낸 하성광의 연기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극 전개는 햄릿과 오이디푸스가 연상되기도 했으나, 배우의 연기가 많은 울림을 주는 연극이었다.


도안고를 연기한 배우 #장두이 는 평소에도 참 도적 같다는 이미지가 많았는데, 캐스팅을 정말 잘한 거 같다. 도안고는 장두이를 위한 역할이었다.


연출 고선웅은 심플한 무대에서 특유의 간결함과 위트를 무대에 잘 녹여내려고 노력했다. #오태석 의 연출도 연상되었지만, 그 만의 위트와 간결함은 관객을 울리고 웃기는데 큰 역할을 했다.


마지막 커튼콜에서는 사진과 동영상 찍는 걸 허용하는지 직원들이 통제하지 않았다.

공연이 끝나고 배우들이 인사를 하는데 많은 관객들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기립박수를 받는 배우들은 얼마나 감동에 벅차오를까.

연극은 뭐니뭐니해도 배우의 예술이 맞는 거 같다.


정말 오랜만에 위대한 연극을 본 거 같아 가슴이 벅차올랐다. 요즘 같이 빨리 변하는 시대에 이렇게 묵묵히 연극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좋았고, 모두가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 빠져 살고, 그것을 해야지만 트렌드에 앞서가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변하지 않는 연극의 가치를 일깨워줬다.

2시간 30분을 지켜보는 관객도 대단했다.



모두가 변해야 살아남는다고 말하는 시대에 변치 않는 연극의 가치를 일깨워준 연극이었다.


연극을 좋아했고, 연극을 알게 된 게 후회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동영상은 찍지 않았지만 마지막 장면에 배우들이 모두 함성을 지르는데 소름이 돋더라.


다음에 또 공연을 하면 보러 갈 것이다.


#조씨고아후기 #조씨고아관극후기 #조씨고아복수의씨앗 #국립극단조씨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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