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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웃사이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아무것도 되지 못한 나

by 남다른디테일

호텔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만날 때면 나를 '호텔 전문가'라고 치켜세워 주시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과거에 호텔에 종사하지 않았냐고, 호텔에 일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감성을 지녔다는 말씀도 하신다.


호텔 오너를 하면 잘할 거라는 말도 듣고, 컨설팅 회사를 차려보라는 분도 계신다.

부동산 계신 분들과 얘기를 나눌 때도 "어찌 그리 아는 게 많냐"라는 반응이 많고, 재테크, 예술 쪽 얘기를 나눌 때도 매우 즐겁다.

지금은 여행과 호텔 얘기를 하는 것이 즐겁지만, 어릴 적 취미가 워낙 다양해서 절대 말발로 지는 경우는 없었다. 한번 관심을 가지면 깊이 파고드는 성격이어서 그런지 한번 입에 문 것은 쉽게 놓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는 어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된 적은 없었던 거 같다. 다양한 분야게 관심은 많았을지언정, 한 분야의 최고가 된 적은 없었다. 그래서 한 분야의 중심에 서지 못했고 그 주변만 맴도는 아웃사이더였다.

주변에서는 호텔에 대해 잘 안다, 호텔 전문가라고 말은 하지만, 어떤 누구도 나와 일해보고 싶다거나 스카우트 제의를 한 적은 없다. 그냥 호텔에 대해 잘 아는 고객, 까칠한 고객으로 날 생각한다.

나도 호텔에 관심이 많고 좀 더 전문적으로 배워보고 싶어 호텔경영대학원에 가볼까도 생각도 했다. 호텔경영 학위라도 있으면, 어디 가서나 검증된 전문가 대우를 받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어서였다.

그러나 지금 이 나이에 대학원 가서 학위를 딴들 어디 자리를 잡을지도 모르고, 막상 월급쟁이 미생 생활을 해보니 대학 등록금이 얼마나 아깝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또 주변에서는 MBA 과정을 가지 호텔경영대학원을 가는 건 별 의미가 없을 거라는 조언도 했다.

결론은 지금 호텔업 인사이드에 들어가는 길은 돈이 많아 호텔을 하나 만들어 오너가 되는 게 가장 나을 듯싶다. 그 꿈이 이뤄질지는 모르겠다.

코로나로 호텔 종사자들의 일자리가 많이 줄어들고, 그들도 다른 일을 찾아보는 이 시국에 대학원을 가고 호텔업 종사자의 꿈을 가진다는 게 참 철없는 생각인 거 같다. 호텔업의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가 무슨 의무가 있는지.


수십 년 인생을 살아오며, 그렇게 큰 실패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안정감을 찾아가고 있고 노후도 큰 걱정 없이 준비하고 있지만, 제일 후회되는 것은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지 못한 것이다. 또 어릴 때의 꿈을 실현하지 못한 게 너무나 후회가 된다.

인생의 큰 그림을 그리고 그에 맞게 차곡차곡 준비했었어야 했는데,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인생을 제멋대로 산 게 후회가 된다.

너무나 하고 싶은 게 많아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뭐든지 다 잘할 자신감은 있었지만, 결국 어떤 것도 되지 못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뭐든지 잘할 수 있는 재능은 가지고 있었지만, 어떤 것도 되지 못한 인생.

자녀가 있는 분이라면 자녀가 꿈이 있다면, 일단 그 꿈을 실현시켜 줄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게 좋다고 권하고 싶다. 절대 자녀의 꿈을 얕잡아 보거나 포기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또 한 분야의 길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쪽으로 올인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좋다고 본다. 아무리 작은 분야이고, 미래 전망이 불투명하더라도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어떤 누구도 가르쳐주거나 길을 안내해주는 이가 없었다. 인생을 차곡차곡 준비하지 않아 지금 이 꼴이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청소년 시기에는 철도 없었고 다양한 재능은 있었지만, 꿈도 막연했고 그 꿈을 위해 준비할 여건도 되지 못했다. 답답한 교실에서 억지로 하는 암기 중심의 교육도 나와는 맞지 않았다. 공부를 못했다. 좀 더 일찍 나의 길을 찾았더라면 그 답답한 교실에서 좀 더 일찍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학교 때부터 공부다운 공부를 한 것 같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수업 듣고 리포트 작성하고 책을 읽는 게 너무나 좋았다. 듣고 싶은 수업을 선택해서 듣는 방식도 좋았고, 어떤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게 좋았다. 자율적인 분위기에서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던 거 같다.

대학교 때 도서관에서 책 읽고 신문 보고 잡지 보는 게 너무 좋았다. 도서관 직원들이 모두 날 알아볼 정도로 도서관에 자주 갔었고, 전국 대학교 신문까지 꼼꼼히 챙겨 봤다.

직원들이 업무를 게을리해서 신착 도서가 늦게 들어오면 컴플레인도 했다.

수업 신청도 전공 수업 이외에 철학과, 국문학과, 국악과, 무용과, 미술과 등을 자유선택으로 수강해서 들었다. 교수님들도 처음에는 이상한 학생이 와서 수업 듣는 걸 반기지 않았지만, 열심히 하는 걸 보고 나중에는 좋아해 주신 경우도 많았다. 지금은 몸이 많이 망가졌지만, 춤도 전공 학생들 못지않게 췄다. 춤은 절대 기교나 테크닉이 아니다. 스스로 느끼고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몸이 언어가 되고 표현 수단이 된다는 건 여간 매력적일 수 없다.

또 수업을 듣는 교수의 주전공과 논문 등도 꼼꼼히 챙겨서 읽어보고, 수업시간에 질문도 하니, 싫어하는 분도 계셨다. 학교 다닐 때 교수의 출신학교, 주전공, 박사학위 논문 등 뒷조사를 하고 들어간 경우도 많았다. 수업 듣는 교수에 대해 알아보는 건 당연한 거라 생각했다.

취업 준비나 자격증 준비도 하지 않았다. 알바 한번 안 하고 공부에만 열중할 수 있게 지원해주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너무나 감사하다.

그리고 너무나 좋아했던 분야이고, 평생 하고 싶었던 일을 찾아 대학원에 진학했다. 학부 전공과는 다른 전공이었지만, 워낙 배경 지식이 많고 공부를 많이 해왔기 때문에 대학원에서의 적응은 무척 빨랐다. 대학원에 입학하자마자 논문 주제를 정했으니.

학생들 사이에서도 "잘 아는 학생"으로 통했다. 그러나 학부 전공이 아니다 보니 학부와 대학원을 모두 같이 한 학생들의 텃새도 없지 않아 있었다. 순혈주의자가 봤을 때 난 잡종이자 혼혈이었다. 당시에 겸손보다는 아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했던 기억이다.

다행히 책과 논문 등으로 접해 많은 걸 배운 교수에게 논문 지도를 부탁드렸고 그분도 나의 연구 주제나 재능 등을 높이사 흔쾌히 지도교수를 맡아주셨다.

석사 과정 3년의 시간은 인생의 황금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지도교수와 현장을 다니면 모두 반갑게 맞아주었고 학자와 연구원으로 대우해 주셨다. 그때 난 인사이더인 줄 착각하고 지냈다.

석사논문이나 박사논문이나 대충 쓰는 건 없고 퀄리티의 차이도 있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석사 논문을 썼다. 난 어떤 일을 하던 논문 표절에는 걸리지 않을 것이다. 논문과 글은 평생 남을 것이라는 생각에 꼭 학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윤리의식을 가지고 논문을 작성했다.

다행히 석사 논문은 잘 통과되었고, 이례적으로 여러 교수님들에게 칭찬도 들었다.

그러나 지도교수는 타학교 분이셨고, 대학원에서도 '인사이더'로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학부와 석사 전공이 다른 나는 '아웃사이더'였고 학부와 석사를 모두 한 학교에서 같은 전공을 한 사람이 '인사이더'였다.

석사 졸업을 하고 진로 상담을 하는데 지도교수는 다니던 대학에서 박사를 하는 게 좋다는 의견을 주셨고, 대학원 교수는 지도교수를 따라서 그 학교로 가서 박사학위를 하라고 권하셨다. 타학교로 박사를 가면, 거기도 분명 카르텔이 있을 것이며, 지도교수라고 해도 나를 얼마나 챙겨줄지 모를 일이었다. 그 학교에도 분명 순혈 제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저기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아웃사이더'였다.

박사 학위를 미국이나 유럽 쪽으로 갈까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렵게 박사학위를 따고 귀국한들 지도교수가 받아줄까, 내가 졸업한 대학원에서 반겨줄까.

박사학위를 따고 와도 교수될 가능성도 없어 보였고, 집에서도 더 이상 지원해 줄 형편도 되지 못해 그냥 직장을 알아봤다. 전공과 관련된 일을 찾아보았으나, 운이 안 좋았던지 그런 일을 찾을 수 없었다. 전공과는 다른 직장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 선택이 제일 후회가 된다. 당시에 좀 힘들더라도 전공과 관련된 일, 하고 싶었던 일을 지속적으로 찾았다면 지금 '아웃사이더'가 되어 있지 않을 텐데.

또 그때 유학을 가지 않은 게 많은 후회가 된다. 당시에도 박사학위자가 많다, 박사학위 받아도 학교에 자리를 잡기 어렵다는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미국이나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면, 영어도 더 확실히 배울 수 있었을 것이며 좀 더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세상을 보지 않았을까 싶다. 거기서 꼭 학위를 못 따더라도 더 넓은 세상에서 다른 가능성을 찾아봤을 수도 있었을 거 같다.

뉴욕에서 공부했다면, 나의 또 다른 재능을 찾았을 수 있고 다양한 세상을 경험하고, 기회를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또 박사 학위자가 많다 많다 하더라도, 그때 나와 같이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친구들은 어딘가에서 전공을 살려 자리를 잡았다.

가끔 동창들이 어떻게 살고 있을까 검색해보면, 전공을 살려 유학을 다녀와서 박사학위를 받고 학교에 자리를 잡은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30대 때 모교에 정교수로 임용된 친구도 있었다.

질투 아닌 질투도 생기고 잘 안되길 바라는 못된 마음도 생길 때도 있다.

전공 기준으로 봤을 때 그 친구는 성공한 케이스이며, 나는 실패한 케이스다.

나도 만약 박사학위를 받고 좀 더 고생했다면, 학교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을까? 아마 박사학위를 받고 와서도 길을 찾지 못해 방황했을 거 같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건 한길만 보고 계속해서 걸어가지 못한 나의 인생이다. 호기심이 많아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봐야 적성이 풀리는 성격.

어쩌다 이런 성격을 타고나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인간이 됐는지 모르겠다.

호텔이나 여행에 대한 관심도 언젠간 시들해질 것이며, 그냥 '잘 아는 고객' 정도로 그칠 가능성이 크다.

나도 내 인생을 잘 모르겠다. 나의 인생이 어떻게 끝날지 나 스스로 궁금해질 정도다. 절대 자살은 하지 않을 것이다. 끝까지 나의 인생을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외로움이 가장 큰 병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외로움을 잘 견디고 노후를 어떻게 보낼지도 관심 사항이다.

그래도 과거 미술관에서 근무하시다 퇴직한 분을 만났는데, 그분의 말씀이 기억이 난다. 미술관 일은 그만뒀지만 "평생의 취미"가 생긴 건 큰 다행이라고. 그분은 평생 미술관이나 미술 관련 서적 등을 보면서 취미로 즐길 것이다.

나도 나의 관심사나 전공이 '전공을 못 살린 실패한 분야'가 아닌 '평생의 취미'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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