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맘 상담소(나 편)
추석이 길다.
길어서 좋다.
설마 지루하려고. 지루할 틈이 없을 거야.
지루할 틈이 정말로 없었다.
열흘이 이토록 빨리 지나갈 줄이야.
여행을 간 것도 아닌데.
눈 감았다가 뜨면 하루가 지나가 있었다.
더 쉬고 싶다. 더 놀고 싶다. 더! 더!
오늘이 오늘이 아니라고 말해줘. 오늘이 추석전날이라고 말해줘
아들들에게 나는 연휴를 멈춰달라고 수없이 부탁을 했다.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거늘.
그렇게나 멈추고 싶었나 보다.
(첫째 날) 9일, 시간을 나노 단위로 쪼갠 하루다.
7:59 라운딩. 레이크사이드 cc 비교적 가까운 거리의 클럽이라 매우 가벼운 마음이었다.
전날 레슨을 하고 살짝 자신감도 있었다.
워낙에 체력과 운동 신경이 별로라서 어지간하면 결과에 만족한다.
이 날도 점수는 별로였지만, 잘 친 것만 기억해 본다.
기억의 왜곡은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선택적으로 나쁜 기억을 지워버릴 수 있는 능력이 키워졌다.
건망증과는 다른 나만의 비법이다.
하지만 좋은 기억도 통으로 삭제되는 단점도 있다.
어쩔 수가 없다.
16:30 피부과로 향한다.
울쎄라, 써마지, 물광보톡스 등등 리프팅으로 확 당기는 시술은 하지 않는다.
워낙에 살이 없는터라 그런 시술은 더 늙어 보이게 만든다.
그냥 잡티 없이 깨끗함을 유지하고자 토닝, 피지제거, 보습 위주의 케어만 받는다.
자연스럽게 늙고 싶다. 하지만 피부과는 간다.
아이러니하다.
난 늘 모순덩어리가 된다.
19시 시댁식구들과 저녁식사다. 오랜만이라, 반갑게 만나 즐겁게 식사를 마친다.
9월 생일자, 10월 생일자들을 세어보니, 어머니, 시동생 2명, 나, 울 아들까지 총 5명이다.
촛불을 켜고 노래를 부르고 다시 촛불을 켜고 노래를 부르고. 3번은 축하노래를 불렀다.
21시 집이다.
생일 전야날이라,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또 생일축하 노래를 받았다.
올해 내 생에 가장 많은 생일 축하 노래를 받았다.
(둘째 날) 내 생일이다.
생일은 무릇 즐겁고 재미있고 행복해야지. 아침에 신랑에게 꽃과 커피 선물을 한 아름 받은 나는!
또 만족하고 있다.
가족들과 아웃백에서 점심을 먹고 쇼핑을 하러 아웃렛으로 향했다.
아웃백은 정말이지 그만 가고 싶다.
내 생일인데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못 먹고 둘째 아들이 먹고 싶은 것을 먹어야 하는 나!
그래, 먹자.
어쩔수가 없다.
첫째 아들에게는 양말 3켤레를 둘째 아들에게는 편지와 양말과 소금빵과 젤리를 받았다.
내가 좋아하는것들을 엄선한듯 하다.
다이소, 빵집. 이마트 3군데나 들렸다고 한다.
추워지니 양말이 필요한데 잘 신고 다닐거 같다.
(셋째 날) 오늘은 미용데이다. 머리 하는 날!
나는 뿌리염색과 두피관리, 신랑은 헤어컷, 첫째 아들은 다운펌, 둘째 아들도 헤어컷 각자의 헤어스타일을 만든다.
첫째는 오늘도 학원을 간다.
라이딩을 해주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온다.
(넷째 날) 추석이다.
월요일이 추석이라 아직도 휴일은 저만치 남아있다.
정말 꿀이다. 개꿀!
시댁에 방문해서 차례를 지내고 친정으로 넘어가 늘어지게 자고 저녁까지 알차게 얻어먹고 휴일동안 먹을
양식을 한 아름 받아왔다.
둘째 아들은 그곳에 머문다고 해서 나랑 신랑, 첫째 아들만 집으로 돌아왔다.
(다섯째 날) 첫째는 또 학원이다. 게다가 둘째 아들이 없다.
둘째 아들이 없으니 자유롭다.
그냥 누워서 OTT만 보았다. 다 이루어질지니(15회)
(여섯째 날) 오늘도 라운딩이다.
오후 라운딩이라 요가를 1시간가량 하며 몸을 풀었다.
몸을 풀면 잘 칠 줄 알았다.
그럴리가 없다. 못 쳤다.
14:03 신랑 포함 학교 선배님들과의 라운딩이라, 긴장했나 보다.
생각보다 힘이 들어갔다.
분명 며칠 전에 만족스러웠는데, 오늘은 무슨 일이니. 무슨 일이야.
9홀 이후 점차 나아지긴 했으나, 오늘은 그냥 꽝이다.
일주일에 한 번 연습이 곧 레슨인 나에게 연습을 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잘 치고 싶다는 욕망도 생겼다.
또 가고 싶다.
이 고되고 힘든 운동을 또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진화했다.
둘째 아들을 친정에서 데리고 왔다.
자유는 끝났다.
(일곱째 날) 아들 대치동 학원 라이딩을 하고 OTT만 보았다.
이두나!(9회)
분명 나는 추석 전에 책 4권을 빌려왔는데, 책은 저만치 멀어져 있다.
첫째 아들은 추석 다음날부터 일주일 내내 수학 2과목을 들으러 학원을 다녔다.
5일은 기하학 5일은 2학기 기말고사 대비, 총 67.5만 원이다. 일주일에 67.5만원!
음. 돈 먹는 하마다.
나는 놀고먹고 있는데 아들은 학원을 잘도 간다.
둘째 아들이 저녁 6시가 넘어 또 전철을 타고 외할머니댁에 갔다.
왜 가냐고 물으니, 맛있는 거 얻어먹으러 간단다.
가지 말라고 말렸다.
내일 엄마 휴가니 같이 미술관을 가자고 졸랐으나 할머니댁에 간단다.
오늘도 자유다.
하지만 외롭다.
첫째를 기다려 본다.
신랑은 어디 갔지?
(여덟째날) 혼자다. 나 혼자다. 집에 아무도 없다.
신랑은 라운딩을 갔고 첫째는 또 학원을 갔고 둘째는 여전히 할머니댁이다.
나는 자유부인이다.
9시 차량점검, 커피숖에서 글 쓰기, 플랫화이트를 시켰다.
따뜻한 히터에 후드득 빗소리에 커피 향이 온몸을 휘감는다. 이 감미로움이란
좋다. 글이 막 써진다.
이내 차량정비가 끝나서 호출이다. 아쉽다.
글이 막 써지는 순간인데.
계속 쓰고 있긴 싫다.
순간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미술관이 기억났다.
그래 미술관을 가자.
10:30 예술의 전당, 이자벨 드 가네.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루앙에서 태어나 풍경화를 그린다.
인상주의 화풍!
솔직히 오르세 미술관을 보고 싶었으나 너무나 많은 인파에 이자벨 드 가네를 선택했는데 신의 한 수였다.
조용히 파리의 추억을 더듬으며 그림을 감상할 수 있었다.
팔레 루아얄 지하철역, 에펠탑, 파리의 다리, 몽마르트르 언덕, 생트 주느비에브 강둑, 루앙의 새벽 등
챗 gpt로 사진으로 지역을 검색하여 풍경화와 비교해 보니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도록과 가벼운 가방, 마그네틱을 구매하여 어디론가 향한다.
12:30 사우나, 묵은 떼를 벗겨내러 급 선택한 장소!
세신이 13시 마감이다. 14시까지 점심시간이란다.
세신사에게 10분 만에 등만 부탁, 25천 원의 거금을 들여 깔끔함을 얻었다.
매우 시원하다.
오늘도 만족스럽다.
집에 오니, 2시가 넘었다.
라면을 끓여 먹고 있으니 신랑이 라운딩을 끝내고 둘째를 데리고 들어온다.
반가운 얼굴들이다.
이런 게 가족이겠지?
(아홉째날) 둘째 아들 성장클리닉을 갔다.
둘째는 키가 작다.
스스로가 키가 매우 작다고 느끼고 있다.
키가 크고 싶단다.
형아는 크다. 고1인데 183cm, 첫째는 항상 얘기한다. 아니 키가 알아서 클 건데 왜 성장주사를 맞는 거야. 이해가 안 되네.
하지만 둘째는 콤플렉스가 어마무시하다.
항상 반에서 젤 작다고 슬퍼했다.
작년 5월부터 지금까지 매일 성장 주사를 맞고 있다.
아플 텐데 키를 키우기 위해 애쓴다.
작년 5월에는 72등이었는데 이제는 32등으로 많이도 올라왔다. 40등이나 뛰어올랐다. 평균적으로 말이다.
가시적으로 보이니, 안 맞힐 수도 없다.
(열흘째 되던 날) 연휴의 마지막날이다.
낼 출근이 아니라고 말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오늘이 연휴의 마지막날이 아니라고.
또 라운딩이다. 열흘 중 3번째 라운딩이다.
7:25, 집에서 40분 거리에 있다.
오늘도 잘 치고 싶은데, 가능할는지. 오늘은 거리가 짧고 9홀 반복이라 나름 만족스럽다.
게다가 4시간 만에 끝나서 식사까지 마치니 12시다.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쉴 시간이 많이 확보되니 이 또한 좋다.
나머지 휴일을 만끽해 보자.
오자마자 요가를 30분 진행한 후 침대와 한 몸이 되었다.
출근하기 싫다.
휴식이 끝났다.
회사 가자. 이제.
돈 벌러 가자.
열흘동안 쓴 돈을 생각해 보라.
돈을 벌어야겠지?
(끄덕끄덕)
그래도 출근은 싫다.
어쩔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