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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상호 Oct 26. 2021

미국서 전복 잡던 일본인들 스파이취급

캘리포니아 남부 옛 화이트 포인트 온천 호텔 

아시아인이 수영장에서 헤엄치면 물이 노래지나. 1900년대 초중반 캘리포니아 남부 공립 수영장에 아시아인은 입장 불가였다. 혹여 일주일 중 하루가 허용되더라도, 수영장 관리인은 아시아인이 사용한 물을 다 갈아버렸다. 백인을 위해서 말이다.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처음 올림픽 금메달을 딴 한인 다이빙 영웅 새미 리(48년 런던올림픽, 52년 헬싱키 올림픽 2연패)도 이런 차별 때문에 수영장에서 훈련을 하지 못했다. 백인 코치에게 지도도 받지 못했다. 로스앤젤레스 인근 패서디나에서 자란 그는 집 뒤뜰에 모래 구덩이를 파서 다이빙 보드를 설치해 훈련했다.



캘리포니아 남부 샌페드로의 화이트 포인트 비치에 아시아인에게 허락된 올림픽 경기장 규모의 수영장이 있었다. 뜨거운 온천수가 흘러, 농사일로 지친 농부와 차별과 멸시를 당하던 철도 노동자, 쉬는 날 없이 가게 문을 열어야 했던 식당 노동자가 고단한 몸을 치유하던 온천 호텔이었다. 이제 그곳은 터만 묘비처럼 남아있다. 


 

▲  옛 화이트포인트 온천 호텔 터다. 화산암 때문에 물이 얕은 자연 수영장이 만들어져 어린 아이가 있는 가정이 많이 찾는다.              ⓒ 황상호


전복잡이, 장거리 수송까지 한 원주민



100년 전 유명 휴양지였던 옛 화이트 포인트 온천 호텔(White Point Hot Springs Hotel)은 캘리포니아 남부 항구도시인 샌페드로(San Pedro)의 작은 만에 있다. 이곳은 5000년 전부터 통바(Tongva) 원주민이 거주하던 땅이다. 그들은 물고기와 조개류, 도토리와 과일 등을 채집해 먹으며 대대로 살았다.



무역이 발달해 잡은 전복을 배에 실어 미 동부 미시시피 유역까지 운송했다. 후일 스페인이 침략해 샌 가브리엘 아칸젤(Mission San Gabriel Arcangel)이라는 미션을 만들고는 원주민을 가브리엘리노스(Gabrielinos)라고 부르기도 했다. 현재 원주민은 거의 살지 않는다. 



해변 이름은 바다를 둘러싼 절벽에서 백각(White Quartz)이라는 광물이 발견돼 '화이트 포인트'라고 이름이 지어졌다는 설과 화이트라는 영국 선원이 배에서 뛰어내려 이곳까지 헤엄쳐 온 뒤 은둔하며 살았다고 해서 이름이 지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1900년대 초 호세 세풀베다라는 목축업자가 땅을 사 목장을 운영하면서 이곳을 화이트 포인트라고 이름을 지었다.


 


▲  화이트 포인트 온천 호텔 터다. 당시 바닷물과 온천수가 야외 수영장으로 들어왔다.              ⓒ 황상호


캘리포니아 남부 어업 장악한 일본인



캘리포니아를 개척한 주역에 일본계 이민자가 있다. 그들의 이민사는 사무라이 22명과 여성 1명이 메이지 정부와 막부 간 내전이었던 보신전쟁(1868~1869) 때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후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기업형 농장인 하와이 설탕 플랜테이션을 통해 이민이 본격화했고, 이어 철도 건설 노동자로 채용돼 캘리포니아 북부에 모여 살았다.



이들이 캘리포니아 남부로 오게 된 것은 1882년 통과된 연방법인 중국인 배척법(Chinese Exclusion Act)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그전부터 대륙횡단 철도공사와 금광 개발에 투입되는 등 피 터지게 일을 했다. 하지만 대륙횡단 철도 공사 완공 후, 중국인이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인식이 퍼졌고 급기야 성문화된 최초의 이민제한법인 중국인 배척법이 통과됐다.



하지만 미국은 철도 건설 등 사회 기반 시설을 닦는 데 여전히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다. 이때 하와이와 캘리포니아 북부에 살던 일본인이 철도 건설을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다. 덩달아 이 지역이 성장하면서 많은 일본인이 전기회사 등에 취업해 산업 인프라를 구축했다(나중에 일본인 인건비도 비싸지자 미국이 이민을 허락한 나라가 조선이다).



1904년 기준, 일본인 거주촌인 리틀 도쿄를 중심으로 로스앤젤레스에는 일본인 2800여 명이 살았다. 이들은 요식업과 농업, 어업, 공예품 제작 등 다양한 산업으로 뻗어나갔다. 1910년도에 들어서자 유학생까지 입국하면서 일본인 수가 8000명 가까이 됐다.


 

▲  드론으로 촬영한 옛 화이트 포인트 온천 호텔 터다.              ⓒ 황상호


인종 혐오에 스파이 누명까지



1898년 화이트 포인트 비치에 일본계 어촌 마을이 형성됐다. 어부 출신 이민자들이 공장 노동자로 취업해 일하다가 일정 적응 기간이 지난 뒤 본업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중 12명이 화이트 포인트 비치에서 전복을 잡으며 터전을 닦았다.



바다 멀리 배를 타고 멀리 나가지 않아도 얕은 물에 전복이 자라고 있었다. 고향 일본 바다보다 수온이 따뜻해 일하기도 수월했다. 어부들은 다이빙을 한 뒤 금속 막대를 이용해 능수능란하게 전복을 잡았다. 



어부들은 그날 잡은 전복을 껍데기와 분리한 뒤 끓여서 건조하거나 통조림을 만들었다. 부패가 빨리 돼 당일 잡은 전복은 바로 가공해야 했다. 일본인들은 주머니에 말린 전복을 가지고 다니며 칼로 썰어먹는 풍습이 있을 정도로 채집과 가공에 능했다.



매년 전복 수천 톤을 수확해 미 서부와 아시아에 수출했다. 건조 전복은 1파운드(453그램)에 20센트, 전복 껍데기는 2톤 당 4달러에 팔았다. 10년 동안 꽤 많은 수익을 거뒀다.



▲  일본계 미국인 어부가 전복 껍데기 더미 앞에 서 있다.              ⓒ 샌페드로 베이 히스토리컬 소사이어티


유색인종이 솔찮이 부를 모으자 지역 내에서는 시기가 일기 시작했다. 급기야 로스앤젤레스 지역 신문들은 이들을 스파이라고 보도했다. 캘리포니아 남부 해안선을 측량한 뒤 일본 정부에 넘긴다는 것이다. 인종 혐오 정서는 법제화됐다. 캘리포니아주는 1905년 일본인이 어업을 못하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들은 화이트 포인트 비치를 떠나 남쪽으로 약 8킬로미터쯤 떨어진 터미널 아일랜드(Terminal Island)와 윌밍턴(Wilmington)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북쪽으로는 채널 아일랜드(Channel Island)로 이동했다. 전복 사업이 지역 경제에 이바지했던 바가 컸던터라 전복 채취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  캘리포니아 남부 샌페드로 일대에서 일했던 일본 어부다.               ⓒ 샌페드로 베이 역사 소사이어티


터미널 아일랜드에는 금세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두 번째로 큰 일본인 마을이 형성됐다. 비결은 어로 기술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어부들은 정어리를 잡는 촘촘한 그물로 흰날개다랑어(Albacore Tuna)를 잡았는데 다랑어가 그물에서 몸부림을 쳐 상처가 너무 심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살아있는 멸치를 뿌려 다랑어떼를 유인한 뒤, 미늘이 없는 낚시 바늘로 덩치 큰 물고기를 찍어 갑판에다 던졌다. 수면을 두드려 물고기떼를 유인하기도 했다. 잡은 물고기에 상처가 덜 나 상품성이 높았다. 이들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1910년대 이 지역 일본인 인구는 3000명 정도가 됐다. 어부들은 영어와 일본어, 낚시 용어가 섞인 터미널 아일랜드 방언을 썼다.



▲  역사 유적지가 된 ‘터미널아일랜드 일본 어촌 메모리얼’이다. 어부 두 명이 그물을 만지고 있는 모습을 조형물로 만들었다.              ⓒ 황상호


하지만 화이트 포인트 비치에서는 더이상 법적으로 전복 채취를 할 수 없었다. 일본인들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바로 해안가로 뿜어져 나오는 유황 온천이었다. 농부였던 토주로 타가미와 타미지, 즉 타가미 형제는 고된 농사로 악화한 류마티즘을 치료하러 1910년 이곳에 왔다. 그때 형제는 온천욕을 하다 이곳의 상업적 가치에 눈을 떴다. 




▲  드론으로 촬영한 팔로스 버디스 반도다. 해양판 위에 있으며 육지 아래에는 바닷물이 흐른다.              ⓒ 황상호


이곳 지형을 팔로스버디스 반도라고 부른다. SBS 드라마 <상속자들>과 이병헌 주연의 드라마 <올인>이 촬영됐던 곳이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바다를 옆에 두고 직각 절벽 위를 차로 달리면 항공 카메라가 그 모습을 뒤쫓으며 부감을 찍는다. 이곳의 전형적인 구도다.



이곳은 지구의 시선으로 봤을 때 육지가 아니라 섬이다. 지하 수천 미터 아래에 바닷물이 흐른다. 200만 년 전부터 태평양 해양판이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 해양산맥이 북미 대륙판과 만나 충돌했다. 이때 해양산맥이 대륙판과 밀착하면서 땅이 휘고 균열이 생겼다. 마그마와 함께 가까이 카브릴로 단층도 형성됐다. 



이 때문에 이곳 해안가 15미터 아래 수백 곳에서 온천수가 흐른다. 이 영향으로 바다 수온도 따뜻해 다양한 어류와 수생명체가 살고 있다. 다이빙 명소로도 인기가 있다. 간조 때가 되면 짙은 색의 화산암이 해변가에 모습을 드러낸다.


 


▲  화이트 포인트 비치를 둘러싼 절벽이다. 땅이 휜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 황상호


오락시설 분리주의



타가미 형제는 리틀 도쿄 상인에게 후원을 받아 1917년 세풀베다 가족의 땅을 임대했다. 땅을 파 온천수를 더 확보했다. 형제는 1925년 2층짜리 호텔에 올림픽 경기장 크기의 바닷물 수영장과 무도장, 도박장을 만들었다. 새와 원숭이를 구경할 수 있는 작은 우리도 만들었다. 



야외에는 돌로 의자를 만들고 화로를 설치했다. 또 다른 일본인 미츠오 엔도는 해안가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바지선을 설치해 낚시터를 만들었다.



이곳은 지역 대표 관광지가 됐다. 일본인 거주촌 로스앤젤레스 리틀 도쿄에서 무료 셔틀버스가 다녔고 신혼 부부가 허니문 여행을 왔다. 의사들은 환자를 이곳으로 보내 온천 치료를 하도록 했다.



193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미국 올림픽 때는 일본 카약 국가 대표팀과 달리기 대표팀이 이곳에 머무르며 대회 준비를 했다. 형사물 영화 딕 트레이(Dick Tracy)가 촬영됐다.




▲  100년 전 온천 호텔이 만든 해변가 화로와 돌의자다.              ⓒ 황상호


특히 이곳은 일본인 이민자에게 안식처였다. 그 당시만 해도 유색인종이 무도장과 공원, 도박장을 이용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오락시설 분리주의로 유색인종은 놀이시설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인종이 섞이면 무질서해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인종, 봉기, 그리고 롤러코스터, 미국 내 오락시설 차별에 대한 투쟁(Race, Riots, and Roller Coasters, The Struggle over Segregated Recreation in America)>을 쓴 사회과학자 빅토리아 월콧은 책에서 "여러 인종의 젊은 남녀가 한 공간에서 야한 옷을 입고 함께 있는 모습은 인종 간 성관계 같은 끔찍한 상상을 하게 하고, 무질서 속 젊은 백인 여성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백인들은 생각했다"고 썼다. 이런 차별은 1964년 민권운동이 일어난 뒤 지역에 따라 법적으로 금지됐지만 현재까지도 백인 문화 깊숙한 곳에 망령처럼 남아있다.



▲  올림픽 경기장 규모의 수영장에는 바닷물과 함께 따듯한 온천수가 들어왔다.              ⓒ 샌페드로 베이 히스토리컬 소사이어티


배제당하던 아시안들, 태평양전쟁에 결국 수용소로



1928년 폭풍이 덮치면서 온천 야외 수영장이 부서졌다. 이어 1933년 120여 명의 사상자를 낸 롱비치 대지진으로 온천수 줄기가 끊겼다. 대공황(1929~1939)의 충격도 잇따라 받으면서 운영에 차질을 빚었다.



타가미 형제는 온천을 계속 운영하고 싶었다. 땅 주인도 형제에게 땅을 팔고 싶었지만 현행법상 판매가 안 됐다. 1913년 시행된 외국인 토지법에 따라, 시민권을 받을 수 없는 이민자는 땅을 살 수 없었던 것이다.



1930년대 말 온천은 결국 폐쇄됐다. 해당 토지법은 1952년 위헌 판결이 났다(앞서 소개한 한인 스포츠 영웅 새미 리도 1950년대 땅을 사려고 했지만 부동산 업자들이 여러 핑계를 대며 주택을 팔지 않으려고 했다. 그 당시에는 그는 의사였고 입증된 스포츠 스타였는데도 말이다).



▲  해변 언덕에 설치된 나이키 미사일 포대다. 그 흔적만 방치돼 있다.              ⓒ 황상호


진주만 공습(1941년 12월 7일)이 터지자 일본인들은 사실상 스파이로 간주됐다. 미국에서 태어난 2세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해, 검은색 자동차와 챙이 짧은 중절모를 쓴 FBI 요원이 국가 안전을 이유로 타가미 가족과 낚시터를 운영하던 엔도를 체포했다. 이듬해 4월까지 어촌 마을에서 살던 많은 일본인이 붙잡혀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연방정부는 일본인 거주지를 빼앗아 포트 맥아더 군사 보호 단지에 통합시켰다. 호텔 건물도 박살냈다. 언덕과 해변가에는 미사일 포대와 방벽, 방공호를 만들었다. 포문은 일본을 향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그들은 수용소에서 풀려났지만 소수만 이곳으로 돌아왔다.



1960년대 캘리포니아주가 이 해변을 샀다가 1995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로 팔았다. 1997년에는 카운티가 200만 달러를 투자해 놀이터와 화장실 등을 설치하는 재건공사를 했다. 개관식 때 타가미 가족 후손이 초대됐다. 



차별받았던 이민자 역사는 해변 언덕 위 화이트 포인트 자연 보호구역에 설치된 빛바랜 안내판에만 몇 줄 소개돼 있다. 무연고 묘지처럼 말이다.



▲  해변 위 언덕에 있는 화이트 포인트 자연 보호구역이다. 언덕 끝에 방공호 두 개가 설치돼 있다.              ⓒ 황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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