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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상호 Mar 21. 2018

‘눈물 뚝뚝’ 지상파 기자, 미국 취업 돌파기

4화 아내의 미국 회사 취업기 첫 번째

-아내 편


사르르 입 안에서 녹는 조각 케이크처럼 달콤한 시간이고 싶었다. 남편과 약속한 취업 준비 기간은 6개월. 한국에서 옷깃 휘날리며 혼이 빠지게 일했던 내겐 은총의 시간이었다. 나는 지역대학교인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영어 수업을 들으며 차근차근 미국에 대해 알아가고 있었다.      


각서라도 받을 걸 했나. 남편은 얼마 지나지 않아 “5개월 안에 취업해야 한다”라고 하더니 또 며칠 지나지 않아 “3개월 안에 취업하면 안 되겠냐”며 채근했다. 그럴 거면 애초에 약속이나 하지 말던가. 어이없고 미운 마음이 들었다. 웨얼 이즈 마이 캘리포니아 드림! 하기야 이해는 갔다. 남편 혼자 벌어온 돈으로는 매달 가계부가 마이너스였고 반년도 안 가 한국에서 가지고 온 돈마저 바닥이 날 게 뻔했다.


'까짓, 한국에서 언론사 공채도 통과했는데 미국에서 일자리 하나 못 찾겠나. 시작해 보자'


‘워크퍼밋’부터 받아야 했다. 내가 가진 투자자 비자(E2)의 배우자 비자는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일하려면 이민국이 발행하는 취업 허가증인 ‘워크퍼밋’이 필요하다. 비용은 서류 신청비 410달러를 포함해 변호사 선임비 등 약 900달러가 든다.      


요즘은 땅 파면 지렁이도 안 나온다. 돈을 아끼기 위해 인터넷을 뒤졌다. 대학원생 시절 방송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프로듀서 언니에게 배운 인터넷 ‘신상 털기’ 실력이 있었다. 인터넷 자료 검색은 껌이었다. 하지만 인터넷에는 시민권자와 약혼한 배우자가 받는 K1비자에 대한 정보만 많고 E2 배우자 비자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K1 비자를 받는 사람들의 절차를 따라 워크퍼밋을 신청했다. 혼인 증명서와 남편의 재직 증명서 등 서류 10여 개를 준비했다. 서류 중에 한 가지라도 실수하면 진행기간이 한 달씩 연기된다. 꼼꼼하고 차분해야 했다. 최종 작성한 서류에 첨부한 문서의 목차도 만들어 붙였다. 과연 잘 처리될까. 서류 봉투에 걱정도 무겁게 담아 우체국으로 보냈다.


3월의 LA 다운타운 전경이다. 일년 내내 푸른지만 이맘때면 가끔 비가 온다. 저 빌딩 숲에서 영화 '트랜스포머1'이 촬영됐다.


대박! 서류를 발송한 지 두 달 반 만에 이민국이 워크퍼밋을 집으로 보냈다는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보통 석 달 반은 걸린다고 들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한 달이나 빨랐다. 분홍색 잠옷 차림으로 우편함으로 달려가 워크퍼밋의 쌩얼을 확인했다. 운전면허만 한 크기에 이민국에서 부여한 일련번호가 다다닥 박혀 있었다. 얼떨떨했다. 감격스러웠다. 또 다른 감정도 가슴을 노크했다. 두려움. 서른 넘은 여자 나이에 낯선 나라에서 다시 일을 할 수 있을까.     


취업 정보를 찾았다. 주로 방문했던 취업 사이트는 ‘인디드(Indeed)’다. 한국의 대표적인 취업 사이트인 ‘사람인’이나 ‘인크루트’ 같은 곳이다. 원하는 분야를 검색하면 나의 정보가 등록돼 접속할 때마다 관련 업체가 자동으로 뜬다. 아마존에서 관심 있는 물건을 한번 검색하면 유사한 상품이 자동으로 뜨는 것과 비슷한 시스템이다. 프로필을 업데이트해두면 회사가 내 프로필을 검색해서 볼 수 있는 ‘LinkedIn’이나 이력서를 웹 사이트에 등록해 두면 적성이나 선호에 따라 내게 어울리는 회사들을 추천해주는 ‘Monster’도 있다.      


한국계 회사 정보는 지역마다 다르다. LA 지역은 라디오 방송사 웹사이트인 ‘라디오 코리아’와 취업사이트 ‘잡코리아 USA’에 주로 있다. 한인 물류회사와 병원, 법률사무소, 옷가게 등 크고 작은 회사에 대한 정보가 있다. 샌프란시스코 등 북부 캘리포니아는 한인 커뮤니티인 ‘SF Korean’, 시애틀 등 워싱턴 주는 한인 커뮤니티 ‘K seattle’, 뉴욕 등 미 동부는 취업 사이트 ‘헤이 코리안’이 있다. 나라가 엄청 커서 각 지역을 대표하는 한인 커뮤니티가 다르다.

 

다만 한국 회사 취업은 주저됐다. 미국 회사보다 연봉이 낮고 의료보험이나 휴가 등 복지혜택이 나빴기 때문이다. 특히 의료 보험의 경우 규모가 있는 회사는 해당 직원뿐만 아니라 배우자와 자녀들의 보험도 지급한다. 하지만 아닌 경우 배우자나 아이들을 위해 최소 200달러 이상은 매달 보험금으로 따로 내야 했다. 가까운 지인은 매달 500달러를 아내 보험금으로 내고 있다. 후들후들이다. 심지어 의료 혜택이 전혀 없는 회사도 천지다. 나 역시 반년 가까이 무보험으로 살았다. 나를 지켜줄 최소한의 보호막도 없었다. 서글펐다. 남편이 회사에서 제공하는 독감 예방주사를 맞을 때 나는 보건소를 찾아가 저소득층이나 홈리스가 이용하는 무료 예방 접종을 맞았다.      
 

나쁜 한인 회사도 있다. 영주권을 미끼로 직원에게 불합리한 근로조건을 제시하는 경우다. 같은 서핑 모임에 있던 친구는 한인 의류회사에 다녔다. 재계약이 다가오자 회사 대표가 무급으로 2년 일하면 영주권을 스폰서 해주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거절하고 한국으로 갔지만 음지에서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일이다.       


미국 회사에 떡하니 취업하면 좋겠지만 영어가 걸림돌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한인은행과 한인병원, 변호사 사무실 등 50여 곳을 닥치는 대로 지원했다. 스타벅스도 50군데 정도 문을 두드렸다. 경력에 대해 고민할 겨를도 없었다. 통장 잔고가 바닥을 향해 정주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복지가 좋다는 한인은행이나 한국 공공기관은 면접 기회조자 주지 않았다. 영주권이 없어서였다.      


왼쪽은 LA 한인타운에 위치한 사우스웨스트 로스쿨이다. 1929년 고급 백화점 건물로 지어진 뒤 현재 학교로 사용되고 있다. 구리로 덮혀진 첨탑은 녹색으로 변했다.


처음 면접 기회를 준 건 한인 안과였다. 병원 매니저가 한 달 뒤 출산이라 매니저 어시스트를 급히 찾고 있었다. 긴장하고 찾아간 동네 작은 병원. 병원 매니저는 깔보는 듯한 말투로 영어 인터뷰를 했다. “영어도  못하고 경력도 없는데 왜 병원에 지원했어요?”라 물었다. 영어를 못한다는 지적에 주눅이 들었다. 나는 한국에서 기자로 일하며 의료 분야에 대해 취재를 했다, 병원 운영과 관리에 관심이 많았다고 말했다. 거짓부렁이었다.


이삼 주 동안 병원은 나를 뽑겠다 안 뽑겠다 간을 보더니 결국 합격시켰다. 병원에서 제시한 임금은 시간당 12달러. 그것도 LA시가 2017년 7월부터 직원 26인 이상인 회사의 최저시급을 12달러인상한 덕에 받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낯선 땅에서 받은 최저임금이라.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자괴감이 들었다. 더군다나 의료 보험 제공이 안 됐다. 거절했다. 속이 시원했다. 한국에서 낙타 바늘 통과하듯 어렵게 언론사에 취업했는데 미국에서 또 겪는 취업난이라니. 앞이 캄캄했다. 이명박, 박근혜를 지나 도널드 트럼프. 이 어찌 기구한 운명의 장난인가. 


한인 언론사에도 이력서를 냈다. 카메라 테스트와 논술 시험도 쳤다. 영문 번역이 버거웠지만 아는 만큼 적었다. 시험을 치고 오매불망 일주일을 기다렸다. 결과는 좀처럼 발표되지 않았다. ‘그냥 탈락한 건가’ 낙담하고 있다. 그런데 웬일! 메일함에 면접을 보러 오라는 이메일이 떡하니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날짜는 이미 지난 뒤였다. 회사에 전화해서 사정했다. 냉담했다. ‘회사 직원을 뽑는 마지막 과정인데 전화 한 통을 안 하나’ 억울하고 분했다. 자다가도 이불킥을 했다.     


그러다 지난해 9월쯤 한인 여행사에 첫 출근을 했다. 주로 카카오톡 메신저로 여행객과 숙소를 연결해주고 여행객의 불만을 처리하는 고객 관리 업무였다. 사장님은 친절했고 점심도 잘 챙겨줬다. 늘 맛집! 하지만 종종 손님들은 “숙소 주인과 연락이 안 된다”며 책임지라고 거칠게 불만을 제기했다. 원칙적으로 나는 숙박업주와 손님을 이어주는 것이지 업주에게 뭔가를 지시할 권한이 없었다. 일은 할수록 보람이 없었다. 영어를 배울 수도 없는 점도 답답했다. 의료보험도 안 됐다. 이러다 덜컥 임신이라도 하게 되면 어쩌나 걱정만 쌓여갔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에서는 무보험 상태에서 맹장만 터져도 수 천 만원이 나간다. 고민하다 한 달 반 만에 사표를 냈다.     


막막했던 상황. 하지만 첫 직장을 나오자마자 한인타운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면접을 보자는 제안이 왔다. 처음으로 미국 회사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임금은 많지 않았지만 의료 보험 등 복지가 완벽한 회사. 영어를 쓸 수밖에 없는 업무 환경.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뛰었다. 예상 인터뷰 질문을 만들고 남편과 수 십 번 예행연습을 했다.

그렇게 나는 미국 바리스타가 됐다. 진짜 아메리카노의 고장에서 말이다. 미국에 온 지 5개월 만에! 주위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나를 봤다. 진짜냐며 확인까지 했다. 한국 지상파 기자에서 미국 바리스타가 된 것이다. ‘눈물 뚝뚝’ 미국 취업 돌파기는 또 이어진다.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LA한인타운의 한 몰이다. 한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종이 한식집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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