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과 진화를 가르는 것
조직은 언제나 '성장'을 꿈꾼다.
매출과 인력, 영향력이 커지는 외형적 성장은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주목하는 기업들의 공통점은 단순한 성장을 넘어선 '진화(Evolution)'를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성장이 양적 확대라면, 진화는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며 생존과 도약을 동시에 이뤄내는 과정이다.
지금까지 '문화는 구조를 타고 흐른다' 연재를 통해 조직성장단계별로 조직이 어떤 특징과 구조를 갖게 되는지, HR아키텍처라는 설계도 관점에서 제도와 구조의 운영원리를 살펴봤다.
시계열로 조직을 보고, 설계의 관점으로 구조와 제도를 보고,
그 공백에서도 조직이 운영되게 하는 판단의 관점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그것을 조직의 시간 속에서 떠받치는 윤리와 거버넌스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구조를 설계하고 제도를 마련하더라도, 그것이 실제 조직 안에서 살아 움직이지 못하면 공허한 그림에 불과하다. 조직이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실제로 이행하고, 설계한 것들이 현장에서 작동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변화다. 그리고 그 변화를 흘려보내지 않고, 휩쓸리지도 않으며, 스스로의 방향으로 통과시키는 역량이 필요하다.
많은 조직을 들여다보면서, 수개월에 걸쳐 공들여 설계한 제도가 도입 1년이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봐 왔다. 정교하게 구축한 역량모델이 조직 개편과 함께 폐기되고, 완벽하게 설계된 평가제도가 유명무실해지는 것은 물론, 단순한 미수용을 넘어 현장의 저항이 터져 나오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변화과제 프로젝트는 끝났지만, 의도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때마다 느꼈던 공통점은 '설계'와 '실제' 사이의 거대한 간극이었다. 설계의 목적은 완성도가 아니었다.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었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조직 안에서 실제로 작동하게 하는 것까지가 바로 설계의 목적인 것이다. 조직이 성장하고, 재조직화하고, 때로는 쇠퇴하다가 다시 재기하려 할 때,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새롭게 정렬해 가는 일. 그것을 구조와 사람의 시간 속에서 지속적으로 다루는 것, 그것이 곧 변화관리다.
변화관리를 둘러싼 가장 큰 오해는 그것을 '특별한 프로젝트'로 여기는 것이다.
이벤트로 다루는 순간 노하우와 경험은 흩어지고, 조직은 서서히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
2000년대 초반, 국내 리더십 교육 현장에서 존 코터의 『Leading Change』가 자주 언급되던 시기가 있었다. 변화를 단계적으로 설계하고 추진하는 방법론으로서 많은 조직의 변화관리 실무에 영향을 미쳤다. 다만 그때의 초점은 변화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것, 즉 프로젝트로서의 변화에 가까웠다.
2010년대까지도 변화추진 TF는 많은 조직들이 선택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지고 있다. HRBP의 확산이 보여주듯, 변화관리의 무게 중심이 일회성 프로젝트에서 현장의 일상 운영으로 이동하고 있다. 변화를 설계하는 사람과 변화를 운영하는 사람이 분리되지 않는 구조, 그것이 지금 조직 현장이 향하고 있는 방향이다.
결국 변화관리가 조직의 일상 안에 뿌리내릴 때, 조직은 비로소 변화에 끌려다니지 않고 스스로의 속도로 움직일 수 있게 된다.
변화관리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당시 많은 조직들이 변화관리를 일상과 분리된 특별한 이벤트로 다루었다. 시작과 끝을 선언하고, 그 안에서 완결 짓는 방식이었다. 현재 상태에서 미래 상태로의 계획된 이동, 경영진이 방향과 실행 모두를 주도하는 톱다운 구조, 준비→실행→정착의 선형적 단계, 저항을 주요 이슈로 보고 이를 최대한 줄이려는 노력. 그것이 당시 변화관리의 개념이었다. 코터의 8단계 모델은 변화를 실행하는 프레임으로서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많은 조직들이 이를 한 번 완수하면 끝나는 프로젝트로 다루고 말았다는 점이다. 변화관리의 한계는 모델이 아니라, 그것을 이벤트로 소비한 방식에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 흐름이 달라졌다. 변화의 빈도가 높아질수록, 변화를 다루는 방식 자체를 상시적인 조직 내 역할로 만들어가고 있다. 2023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현대 직장인이 경험하는 기업 차원의 계획된 변화가 2016년 연간 2건에서 2022년 연간 10건으로 급증했다고 보고했다. 전략적 방향은 여전히 톱다운으로 설정되지만, 실제 변화를 이끄는 주체는 현장의 리더들이 되었다. 중간 관리자들은 단순히 전달자 역할을 넘어서 각자의 자리에서 변화를 해석하고, 구성원들과 소통하며,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가는 변화 주도자가 되어야 한다.
두 흐름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은 변화가 보인다.
변화에 대한 관점은 일회성 이벤트에서 상시 운영되는 역량으로,
리더십 구조는 경영진 중심 톱다운에서 전략은 위에서 정하되 실행은 현장에서 완성되는 방식으로,
접근 방식은 선형적 단계별 과정에서 순환적 학습과 적응으로,
저항에 대한 관점은 최소화해야 할 장애물에서 조직 활력의 신호로,
구성원 역할은 수동적 수용자에서 공동 설계자로 이동했다.
변화관리를 다루어야 할 이벤트로 보는 관점에서, 조직이 상시적으로 운영해야 할 역량으로 정의하는 방식으로. 변화관리를 바라보는 본질이 달라진 것이다.
변화관리에 대한 우리의 접근법이 왜 이렇게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을까. 지난 수십 년간 조직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를 살펴보면 그 흐름이 보인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변화 자체의 빈도와 속도의 증가다.
예전에는 ERP 도입, 조직 개편, 새로운 사업 진출 같은 대형 프로젝트가 몇 년에 한 번씩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원격근무 전환, 공급망 재편, 새로운 규제 대응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면서 변화가 특별한 이벤트가 아닌 일상의 상수가 되었다.
두 번째로 주목할 점은 구성원들의 변화에 대한 태도가 이전과 달라졌다는 것이다.
변화 지지 의향이 2016년 74%에서 2022년 43%로 급락한 것은 단순한 수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변화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구성원들이 느끼는 피로도 함께 쌓인다는 뜻이다. 반복되는 변화 속에서 통제감 없이 따라가기만 하는 경험은 그 피로를 가속시킨다. 기존의 톱다운 변화관리 방식으로는 이 피로를 감당할 수 없다. 구성원들은 더 이상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라 변화의 능동적 주체가 되기를 원한다.
사실 참여형 접근법 자체는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다. SK는 일찌감치 다양한 변화과제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의견을 수렴하고 협의하기 위해 캔미팅을 정기적으로 열었다. 대표이사부터 현장 구성원 일부가 참여해 의견을 나누고, 앞으로의 변화 과정에 대한 경영진의 생각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2010년대 중반 휴맥스의 인사제도 혁신 프로젝트에서도 경영진 회의체와 현장 리더 회의체를 별도로 운영하며 의견을 수렴했었다. 방식은 달랐지만 둘의 공통점은 설계 단계부터 현장 의견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 과정 자체가 변화 수용도를 높이는 일이었다는 점이다. 비단 이 두 회사뿐만 아니라, 많은 조직들이 새로운 시스템과 제도를 도입할 때 현장의 의견을 수렴하고 참여를 이끌어내는 방식을 택해왔다.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달라진 것은 참여의 방식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기대 수준과 참여에 대한 인식 자체이다. 캔미팅은 SK가 경영 철학으로 실천해 온 구성원 참여 방식이었다. 의사결정자와 실행자, 현장이 함께하는 것 자체가 가치였다. 다만 변화관리의 맥락에서 보면, 그 안에는 암묵적인 전제가 있었다. 현장의 참여는 변화에 대한 저항을 줄이고 수용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구성원은 여전히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대상이었다.
지금은 그것이 당연한 권리가 되었다. "우리 의견을 들어주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우리 의견이 실제로 얼마나 반영되었는가"를 더 중요하게 본다. 구성원들은 이제 변화의 동반자가 아닌 공동 설계자가 되기를 원한다.
세 번째는 조직 복잡성의 폭발적 증가다.
과거의 조직은 상대적으로 단순했다. 본사가 설계하고 현장이 실행하는 위계 구조 안에서, 변화는 위에서 아래로 흘렀다. 그러나 지금의 조직은 다르다. 매트릭스 구조, 애자일 워킹, 원격 협업, 크로스펑셔널 팀, 스포티파이 조직, 자포스식 홀라크라시까지 얽히면서 누가 무엇을 결정하는지, 변화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가 불분명해졌다. 변화를 실행해야 할 현장은 여러 팀에 걸쳐 있고, 의사결정 경로는 복수로 존재하며, 같은 변화라도 팀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환경에서 과거처럼 A에서 B로 가는 선형적 변화관리는 작동하지 않는다. 수많은 변수가 상호작용하는 복잡계 속에서, 변화는 설계한 대로 흐르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저항이 엉뚱한 곳에서 터지고, 잘 설계된 제도가 현장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는 일이 반복된다.
이 세 가지, 빈도와 속도, 구성원의 기대 수준, 조직 복잡성은 서로 맞물리며 변화관리의 판 자체를 바꿔놓았다. 변화가 잦아질수록 구성원은 지쳐가고, 복잡한 조직 안에서 톱다운 방식은 더 이상 구석구석까지 닿지 않는다. 변화를 설계하는 사람과 변화를 살아내는 사람이 분리된 채로는 어떤 제도도 현장에 뿌리내리기 어렵다. 구성원은 이제 저항을 관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변화를 함께 구성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 인식의 전환이 지금 변화관리의 출발점이다.
스타트업으로 급성장한 조직에서 OKR을 설계하고 조직에 도입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바로 제도설계의 끝은 변화관리로 지속되다가 다음 제도개선이나 재설계일 때라는 것이다.
매 분기 목표를 정렬하고, 중간 점검에서 방향을 수정하고, 회고를 통해 다음 사이클에 반영하는 그 과정 전체가 기획이고 설계이면서 동시에 변화관리였다. 완벽한 합은 없었다. 맞춰가는 과정 자체가 목적이었고, 그것이 제도를 살아있게 했다.
변화관리는 프로젝트가 끝난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프로젝트 TF가 해체되고, 보고서가 제출되고, 킥오프 발표가 끝난 그 이후에 실제로 조직 안에서 계속 움직여야 할 무언가가 있다. 그것이 바로 변화관리를 해내는 역량이다. 프로젝트는 종료되지만, 역량은 조직에 남는다.
변화를 역량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변화의 성격을 읽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떤 변화인지 모른 채 역량을 쌓으려 하면, 방향 없이 힘만 기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조직이 마주한 변화는 어떤 성격인가를 알아야 한다.
변화는 단일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깊이와 규모라는 두 차원 위에서 나타난다.
여러 산업과 조직의 변화관리 경험을 지나며, 서로 다른 성격의 변화가 혼재될 때 조직이 혼란에 빠진다는 점을 반복해서 보아왔다. 그 경험을 지나오며 정리한 관점이 바로 성장과 진화라는 두 축이다. 많은 조직이 변화관리에서 어려움을 겪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 두 차원을 구분하지 못한 채 변화에 뛰어들기 때문이다.
하나는 깊이, 즉 진화다.
조직은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사업의 기본 가정이 있다. 우리는 어떤 산업에 속해 있는가, 무엇으로 경쟁하는가, 무엇을 성과로 보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굳어진 것, 그것이 전제다.
진화란 바로 이 전제가 바뀌는 것이다. 기존 방식의 개선과 효율화인지, 사업 모델이나 조직 정체성의 근본적 전환인지 등 기존 대비 본질적 변화의 깊이를 다룬다.
다른 하나는 규모, 즉 성장이다.
조직의 크기와 영향력이 얼마나 확장되는가. 현 상태를 유지하거나 선택과 집중을 하는지, 아니면 양적 확장과 시장 점유율 증대를 추구하는지 등 외형적 확장의 정도를 다룬다.
성장은 기존 공식의 확장이고, 진화는 공식의 재정의다. 전제가 바뀌는 순간 조직의 정체성도 달라진다.
전제가 바뀌어도 조직의 외형은 그대로일 수 있고, 외형이 커져도 전제는 유지될 수 있다. 이 두 차원이 서로 독립적으로 움직일 때 네 가지 변화의 시나리오가 만들어진다. 이것이 성장×진화 매트릭스다.
다만 이 매트릭스를 적용하기 전에 짚어둘 것이 있다. 조직은 하나의 성장 단계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한 조직 안에서도 사업과 산업의 성장 곡선은 서로 다른 속도로, 서로 다른 시점에 움직인다. 성숙한 주력 사업을 운영하면서 동시에 초기 단계의 신사업을 키우는 기업은, 같은 조직 안에서 전혀 다른 성장 논리를 다루고 있는 셈이다. 이는 일정 규모 이상의 조직에서는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따라서 성장×진화 매트릭스는 기업 전체를 하나의 칸에 고정시키기 위한 틀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 사업, 이 전략, 이 의사결정이 어떤 성격의 변화 위에 놓여 있는지를 가늠해 보기 위한 관점이다.
※ 성장x진화 매트릭스 읽는 법
Y축 — 진화(깊이):
조직이 당연하게 여겨온 전제가 얼마나 바뀌는가. 우리는 어떤 산업에 속해 있는가, 무엇으로 경쟁하는가, 무엇을 성과로 보는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온 이 답들이 달라지는 것, 그것이 진화다.
- 높음 : 사업 전제, 정체성, 구조의 근본적 전환
- 낮음 : 기존 전제 유지, 현 방식의 반복.효율
X축 — 성장(규모):
조직의 외형적 크기와 영향력이 얼마나 확장 또는 축소되는가.
- 높음 : 인력, 매출, 시장 확장
- 낮음 : 축소, 유지, 선택과 집중
혁신과 전환 — 전제가 바뀌어야 하는 상황에서 구조를 스스로 재정의하는 과정. 일시적 규모 축소를 감내하는 가장 어려운 구간이다.
혁신성장형 — 혁신과 전환이 성공한 이후 규모까지 함께 실현된 상태. 현실에서 처음부터 이 사분면에 진입하는 경우는 드물다.
확장성장형 — 검증된 공식으로 규모를 키운다. 안정적이지만 다음 전환을 가장 어렵게 만드는 토양이 쌓인다.
위기관리형 — 전제가 무너졌는데 구조는 그대로인 경우이다. 과거의 성공을 지키려는 구조가 오히려 현재의 생존을 방해하기 시작한다.
관성 구간 — 시스템은 작동하고 실적도 유지된다. 그러나 전제를 다시 묻지 않는다. 안정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가장 위험한 구간이다.
확장성장형(진화 낮음 + 규모 높음) — 성공이 구조로 굳어지는 구간
이 사분면에서 전제는 흔들리지 않는다. 방향은 유지된 채 스케일이 커지고, 구조는 정교해진다. 시장 적합성이 검증된 이후의 구간이다. 통제가 필요해지고, 시스템이 생기며, 창업자적 직관은 프로세스로 대체된다. 성공 공식이 작동하고 있다는 확신 위에서 그것을 더 크게, 더 넓게 확장하는 단계다.
스타벅스가 표준화된 커피숍 모델을 전 세계로 확장한 과정, 무신사가 국내 패션 플랫폼의 성공 방정식을 공고히 하며 외형을 키워온 초기 성장 국면이 여기에 해당한다.
성공 공식이 정교해질수록 조직은 더 잘하는 법에는 능숙해지지만, 다르게 하는 법에는 둔해진다. 성장 이후의 관성과 관료화의 씨앗은 바로 이 시점에 뿌려진다. 겉으로는 안정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미래의 전환을 가장 어렵게 만드는 토양이 축적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한때 확장성장형의 전형이었던 Kodak과 Nokia가 이후 관성 구간으로 미끄러진 것처럼, 성공 공식이 강고해질수록 그것을 스스로 해체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혁신성장형(진화 높음 + 규모 높음) — 전환을 통과한 기업들이 도달하는 구간
이 사분면은 다른 세 구간과 성격이 다르다.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늠하는 위치가 아니라, 혁신과 전환을 제대로 통과한 결과로 도달하게 되는 구간이다.
처음부터 이 사분면을 목표로 설정할 수는 없다.
전제를 바꾸는 과정을 먼저 통과해야 하고, 그 위에서 새로운 성장이 만들어질 때 비로소 이 구간에 위치하게 된다. 지금 우리가 주목하는 성공한 기업들 대부분은 결국 이 과정을 거쳐왔다.
관성 구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확장성장형의 성공 공식이 굳어지면서 질문이 멈춘 자리에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이 매트릭스에서 우리가 실제로 진단해야 할 구간은 확장성장형, 혁신과 전환, 위기관리형이다. 지금 우리 조직이 어떤 변화를 안고 있는지를 읽는 것이 출발점이다.
혁신과 전환(진화 높음 + 규모 낮음) — 가장 굳어 있을 때 가장 크게 바꿔야 하는 구간
이 사분면에서는 두 가지 변화가 동시에 진행된다. 밖에서는 산업과 시장의 전제가 바뀌고, 안에서는 조직의 정체성이 재정의를 요구받는다. 시장의 전제가 달라지면 그 위에 세워진 전략과 구조도 더 이상 그대로 유지되기 어렵다.
문제는 이 변화가 위기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외형적 성장은 아직 유지되고, 시스템도 안정적으로 작동한다. 성과 기준과 의사결정 방식, 보상 체계는 기존 전제 위에서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당장 큰 균열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조직이 전략을 일부 조정하는 수준에서 대응하려 한다.
그러나 전제를 바꾸는 일은 전략 수정과 다르다. 그것은 구조의 중심축을 옮기는 일에 가깝다. 조직은 “무엇을 더 잘할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하는 조직인가”를 다시 묻게 된다.
Netflix는 DVD 우편 대여 모델을 더 정교화하는 대신 콘텐츠 소비 방식 자체를 스트리밍 중심으로 전환했다. 기존 공식을 개선한 것이 아니라, 사업의 출발 전제를 바꾼 선택이었다. 이는 성공 공식을 스스로 해체한 전환 사례에 가깝다.
Sony Group Corporation의 경우는 장기적 이동에 가깝다. 소니는 오랫동안 전자제품 제조업의 상징과 같은 기업이었다. 그러나 영화, 음악, 게임과 같은 엔터테인먼트 사업이 성장하면서 수익 구조의 중심이 점차 콘텐츠와 IP 기반 사업으로 이동했다. 이는 단순한 사업 다각화라기보다 ‘제품을 만드는 회사’에서 ‘콘텐츠와 경험을 설계하는 회사’로 전제가 이동한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전제가 이동했는데도 기존 구조가 그대로라면 새로운 사업은 주변부에 머물 수밖에 없다. 성과를 측정하는 기준이 과거 사업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고, 투자 우선순위와 의사결정 권한이 이전 모델에 묶여 있다면 자원 배분은 왜곡되고 실행 속도는 느려진다. 전환은 선언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구조의 중심이 실제로 이동해야만 사업이 제대로 작동한다.
이 사분면에서 중요한 것은 단기 실적이 아니라 전제와 구조의 정렬 여부다. 전제가 달라졌는데 구조가 따라오지 못하면 성과는 일정 기간 유지될 수 있어도 지속되기는 어렵다. 전환의 성공은 전략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관성 구간(진화 낮음 + 규모 유지/정체) — 전환을 유예하는 안정 구간
이 구간도 혁신성장형과 유사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관성 구간은 확장성장형에서 흘러들어온다.
성공 공식이 강고해지면서 조직은 점점 더 잘하는 법에만 집중하고, 어느 순간 전제를 다시 묻는 질문이 사라진다. 그 결과로 자리 잡은 상태가 바로 이 구간이다.
또한 이 구간은 가장 안정적으로 보이는 시기이다.
실적은 유지되거나 완만하게 증가하고, 시스템은 무리 없이 작동한다. 내부 갈등도 크지 않다. 겉으로 드러나는 위기는 없다. 그래서 조직은 이 상태를 지키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한다.
문제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안정이 확인될수록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의지는 더 강해진다. 구조를 흔드는 시도는 불필요한 위험으로 간주되고, 기존 모델을 보호하는 일이 경영의 중심 과제가 된다.
조직이 방향을 잃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존 방향이 여전히 옳다고 믿는다. 다만 그 전제를 다시 묻지 않는다.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는 실행과 반복이 남는다. 효율은 높아지지만, 가정은 검증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조직도 나름대로의 충분한 합리성이 있다.
작동하는 구조를 스스로 약화시키는 결정은 쉽지 않다. 매출 목표와 이익률 관리, 분기 KPI는 안정적 성과를 요구한다. 불확실한 실험은 그 성과를 훼손할 수 있다. 그래서 변화는 검토되지만, 실행은 유보된다.
그러나 바로 그 합리성이 한계를 만든다.
조직이 가장 안정적으로 운영될수록, 전환의 필요성은 가장 약하게 느껴진다. 새로운 전제에 대한 질문은 줄어들고, 실험의 밀도는 낮아진다. 실패를 감내하려는 에너지도 점차 약해지고,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는 감각은 무뎌진다. 조직은 효율적으로 운영되지만, 환경이 바뀔 가능성에 대비하지는 않는다.
이 상태는 외부 변화의 신호가 감지되더라도 아직 실적에 반영되지 않을 때 나타난다. 위기가 숫자로 드러나지 않으니 긴박감도 형성되지 않는다.
즉, 안정은 강화되지만 대응은 늦어진다.
Kodak은 디지털 기술을 알고 있었지만, 필름 사업의 수익성이 견고했던 시기에 그 구조를 스스로 해체하지 못했다. Nokia는 피처폰 시장에서 지배력을 유지하던 동안 스마트폰 전환의 속도를 충분히 높이지 못했다. 이들 모두 위기를 몰랐던 것이 아니라, 기존 구조가 잘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환을 미뤘다. Blockbuster 역시 같은 흐름 위에 있었지만, Netflix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전제가 흔들리기 시작한 시점부터는 관성 구간을 넘어 위기관리형으로 빠르게 이행했다.
관성 구간은 위기가 아니라 안정으로 인식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장 위험하다.
안정이 길어질수록 선택지는 조용히 줄어들기 때문에, 외부 충격이 현실화되면 준비된 전환이 아니라 대응을 위한 구조조정이 먼저 시작된다. 이를 가르는 차이는 안정적인 상황에서도 우리의 전제가 여전히 유효한가를 지속적으로 질문하는가에 달려 있다.
위기관리형(진화 낮음 + 규모 낮음/단, 전제 붕괴 상태) — 전제가 붕괴됐는데 구조는 기존 그대로 있는 상태
이 구간은 외부 충격이 이미 현실화된 시점이다.
시장이 축소되거나, 기술 패러다임이 전환되거나, 고객의 정의 자체가 바뀌었다. 변화는 더 이상 신호가 아니라 조직이 직시해야 할 현실이다.
그런데 조직 안에서는 기존 통제 구조와 의사결정 방식이 그대로 유지된다.
과거의 성공 공식이 오히려 현재 생존을 방해하기 시작한다. 내부에서는 책임 공방이 늘고, 의사결정은 지연되며, 구조 개편이 반복된다. 그러나 핵심 전제를 다시 묻는 질문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언뜻 관성 구간과 유사해 보이지만, 차이는 명확하다. 관성 구간에서는 전제가 유지된 채 안정이 지속되지만, 위기관리형에서는 전제가 붕괴된 상태에서도 구조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다. 조직은 이미 변화를 감지하면서도 기존 방식으로 대응하려 한다.
레고는 2000년대 초 디지털 게임과 전자 장난감의 급부상으로 블록 완구 시장이 흔들리자, 테마파크·의류·시계 등으로 사업을 무분별하게 확장했다. 핵심 전제를 바꾸지 않은 채 외형으로 대응한 것이다. 2003년 역대 최대 손실을 기록하며 사실상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
레고가 다시 살아난 것은 2004년 새 CEO 예르겐 비그 크누스토르프(Jørgen Vig Knudstorp)의 결단에서 시작됐다. 그는 취임 직후 조직이 위기 상황에 놓여 있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며 확장했던 사업들을 과감히 걷어냈다. 레고랜드 테마파크 4곳을 매각하고, 의류·시계 등 비핵심 사업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사업의 본질과 핵심으로 돌아갔다.
'레고는 무엇으로 경쟁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레고 브릭이라는 본질적 경쟁력에 다시 집중하고, 무분별한 확장이 흐려놓은 전제를 다시 세운 것이 출발점이었다.
위기관리형은 결과가 정해진 구간이 아니다. 레고처럼 전제를 다시 묻고 재설계하는 선택을 하면 위기는 전환의 계기가 된다. 그 선택을 미루거나 회피하면 쇠퇴의 시작이 된다. 조직이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우리는 어떤 산업에 속해 있는가, 무엇으로 경쟁하는가, 무엇을 성과로 보는가—을 다시 정의할 수 있는가. 그것이 이 구간의 핵심 질문이다.
조직은 하나의 사분면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매트릭스 안에서 기업은 하나의 사분면 안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지속 가능한 성장을 추구하는 조직이라면, 기존 사업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면서 동시에 미래 먹거리를 탐색하는 활동을 병행해야 한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장기 생존을 위한 경영의 핵심 과제인 것이다.
그 결과, 하나의 조직 안에서는 서로 다른 성격의 변화가 동시에 나타날 수밖에 없다. 주력 사업은 확장성장형의 논리로 운영되면서 안정과 효율을 추구하고, 신사업은 혁신과 전환의 압력을 받으며, 일부 사업부는 관성 구간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사업별로 성질, 시작 시점, 시장 환경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 네 가지 시나리오는 순차적 발전 단계가 아니다.
공존의 지도이며, 조직 안의 동시적 변화와 속도 차이를 읽는 도구이다. 삼성전자가 C랩을 통해 기존 사업과 다른 실험을 병행하고, 현대자동차가 42dot 인수를 통해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역량을 별도 조직으로 운영하는 것처럼, 한 조직 안에는 서로 다른 변화의 성격이 공존한다.
이 매트릭스의 진짜 질문은 "우리 회사는 어느 사분면인가"가 아니다. "지금 이 사업 결정은 전제를 바꾸는 것인가, 아니면 기존 공식을 확장하는 것인가"를 묻는 것이 출발점이다.
변화가 실패하는 이유는 대부분 실행력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를 잘못 읽은 데서 시작된다.
네 가지 변화 유형을 구분하는 것은 단순한 분류가 아니다. 각 유형이 완전히 다른 변화관리 접근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전환이 필요한 전통 제조업체가 직원 교육을 강화하고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는 정도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확장성장형 접근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실제로는 고객 접점 방식, 의사결정 구조, 심지어 핵심 인재상까지 모두 바뀌어야 하는 혁신과 전환형 변화가 필요한 상황일 수 있다. 마치 집을 조금 넓히려고 망치와 못을 준비했는데, 실제로는 기초 공사부터 다시 해야 하는 상황과 같다.
더 큰 문제는 구성원의 반응이다. 초기에는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되겠다"라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들이 예상한 변화와 다르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낀다. 신뢰가 흔들리고, 저항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이처럼 변화관리 실패의 가장 흔한 원인은 조직이 처한 변화의 성격을 잘못 읽는 데서 시작한다.
변화를 시작하기 전, 경영진과 HR은 서로에게 솔직해져야 한다.
지금 추진하려는 변화는 기존 사업의 연장선 위에 있는가,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판을 짜는 것인가.
이 변화는 조직의 크기와 영향력을 확장하는 방향인가, 아니면 선택과 집중에 기반한 전략적 재편인가.
변화 이후에도 우리의 핵심 역량과 경쟁우위가 여전히 유효한가.
우리 조직이 어느 사분면에 있는지 아는 것은 변화관리의 절반이다.
진단이 정확하다면, 나머지 절반은 이미 방향이 잡힌 것과 다름없다.
진단 이후에 남는 핵심 과제는 사람이다.
사람의 행동을 바꾸려면, 그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구조가 바뀌면 행동이 달라지고, 그 행동이 쌓이면 문화가 된다. 결국 변화관리란 사람을 설득하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 다르게 행동할 수 있도록 구조를 설계하고 그 설계가 조직에 스며들도록 하는 과정이다.
그 구조가 실제로 사람을 어떻게 바꾸어 가는지에 대해, 다음 회차에서 글을 이어간다.
존 코터, 『Leading Change』(『기업이 원하는 변화의 리더』), Harvard Business School Press, 1996 — 8단계 변화 모델 최초 제시. 코터는 이후 『Accelerate』(2014), 『CHANGE』(2021)에서 이를 8개의 가속기(Accelerators)로 발전시키며 상시 운영 방식으로 모델을 진화시켰다.
Gartner Research, "Employees Are Losing Patience with Change Initiatives", 2023 (Harvard Business Review에 인용 게재) - 변화 빈도 연간 2건→10건 수치 및 변화 지지 의향 74%→43% 수치 포함
James G. March, "Exploration and Exploitation in Organizational Learning", Organization Science, 1991 : 조직은 기존 사업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면서 동시에 미래 먹거리를 탐색하는 활동을 병행해야 한다는 논거의 학문적 근거
Jørgen Vig Knudstorp, HBR Interview, 2009 / David C. Robertson, 『Brick by Brick』, Crown Business, 2013 : 레고 위기관리형 사례 및 팩트 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