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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흔들린 꽃들
Dec 27. 2022
미국인들은 돈을 모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집세가 워낙 비싸고 물가가 높아서 저축이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은퇴연금제도가 좋아서 저축이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말이 완전히 틀린 것 같진 않다. 적어도 내 와이프가 어땠는지를 떠올려보면 말이다.
내가 그녀를 처음으로 만난 건 거의 십 년 전의 일이다. 미국인인 그녀는 고국에서 영어교육으로 석사를 마치고 한국으로 건너와 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 중이었고, 당시 직장인이 된 지 몇 개월 밖에 안 됐던 나는 자기계발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그녀와 영어를 연습하고자 하는 나는 어느 언어교환 모임에서 첫 만남을 갖게 됐다.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져 첫 만남으로부터 반년 만에 법적으로 부부가 됐다. 그렇게 무턱대고 살림을 꾸리게 되면서 사랑에 눈이 멀어 못 봤던 부분들이 속속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큰 부분은 역시 돈이었다.
스물다섯과 스물여섯, 와이프나 나나 둘 다 사회초년생으로 모아둔 돈이 많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미국에 있는 와이프의 가족들은 시차 때문에 전화통화도 어려웠고, 나 또한 집안에 조언을 구할만한 어른이 마땅치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라 해봐야 아직도 대학생인 친구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나가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둘에게 달린 문제였다. 내가 내린 첫 번째 결단은 서울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당시 와이프는 지방의 한 국립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교원전용 기숙사에서 비용을 면제받고 거주 중이었다. 거주민이 대부분 가족 단위의 외국인 교원들이라 기숙사라기보단 일반아파트에 가까웠다. 그녀 역시 넓은 거실에 방이 두 개 딸린 집을 독차지하고 있었는데, 나는 여기서 저축의 기회를 포착했다. 서울에 직장을 알아보던 와이프에게 그곳에 머무를 것을 권유함과 동시에, 내가 다니던 직장에 지사발령을 요청해 지방으로 내려갈 수 있게 됐다.
다달이 빠져나가는 집세가 없어서였을까?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와이프의 씀씀이를 가까이서 관찰해 보니,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비싼 명품을 사거나 여러 종류의 화장품을 사들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필요 없는 물건을 쉽게 산다는 진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길을 가다가 예쁜 옷이나 가방을 보게 되면 곧바로 지갑을 열었다. 문제는 그렇게 즉흥적으로 구매된 의류들을 한 두 번만 주인을 따라 바깥세상을 구경하고 옷장 한 구석에서 잊힌다는 거였다. 상술이 뛰어난 가게 주인들 덕분에 내가 옆에서 눈치를 줘도 이런 구매는 예방하기가 힘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장을 보러 가도 아주 대략적인 계획만 갖고, 맛있어 보이는 식품들을 일단 장바구니에 집어넣기 일쑤였다. 물론 한 입만 먹고 생각했던 맛이 아니라며 버리는 일이 잦았다. 자기가 번 돈으로 사고 싶은 걸 사겠다는데, 나에게 그걸 막을 권리는 없었다. 대단한 것을 사는 것도 아니고 고작 옷 몇 벌 또는 먹는 것이었으나, 이런 작은 구매가 모여 지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참고 넘기려 했지만, 내가 싫은 소리를 해야만 하는 순간은 와버리고 말았다.
미국인과 결혼해놓고도 미국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던 나는 그곳의 학비가 그렇게도 비싼지 몰랐다. 와이프의 학자금 대출 현황을 보기 전까진. 사립대에서 학사를 받고 주립대에서 석사과정까지 수료한 그녀가 지불한 학비 총액은 10만 달러가 넘었다. 한화로 1억이 훌쩍 넘는 금액이었다. 가족으로부터 별다른 도움도 받지 못해 그 큰돈을 전액 학자금 대출로 납부했던 터라, 내가 그 금액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이자까지 상당히 붙은 뒤였다. 한국에서 받는 그녀의 월급은 미국기준에서 낮은 편으로 구분되어 다행히 납부의무는 면제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민을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미국으로 돌아가면 갚게 될 그 눈덩이 같은 빚은 큰 심적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민을 결정한 뒤로는 단순한 걱정이 아니라 대비해야 할 문제로 다뤄야만 했다. 남편인 나에게 드디어 그녀의 소비패턴에 간섭할 명분이 생긴 순간이었다.
와이프의 눈길이 예쁜 옷으로 갈 때면 그녀의 손목을 잡고서 다음에 와도 그대로 걸려있을 테니 집에 가서 생각나면 다시 와서 사자고 타일렀다. 마트에서 새로운 음식에 관심을 보일 때면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해보고 장바구니에 담도록 유도했다. 내가 쪼잔하다며 인상을 쓸 때마다 하루하루 불어나는 학자금대출을 상기시켰다. 그와 동시에 아끼는 것만이 저축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 이자를 높게 쳐주는 은행계좌를 열어 작지만 꾸준히 들어오는 이자의 맛도 볼 수 있게 해 줬다.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한국인의 저축 강의는 거기서 끝나는 줄 알았다.
결혼 후 1년 뒤에 미국으로 이주한 우리는 한국에서 바싹 모은 돈으로 그럭저럭 빠르게 자리를 잡아갔다. 거대한 학자금 대출은 이제 바다 건너에 존재하는 허상이 아닌 정말로 매달 갚아나가야 할 빚이었기에 우리는 더욱더 허리띠를 졸라맸다. 이민 후에 나는 대학원에 진학해 수입이 없었고, 와이프는 주립대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낮은 월급에 만족해야 했다. 한국에서보다 상황이 더 어려워진 탓에 아껴 쓰는 것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다행히 한국에서 다듬어진 와이프의 소비습관 덕분에, 별다른 문제없이 이민 초기의 어려운 순간들을 넘기고 있었다.
다만 새롭게 등장한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미국의 팁문화였다. 식당에서 값을 지불할 때 세금도 따로 나오는데, 거기에 팁까지 얹어줘야 한다는 사실은 한국에서 몇 백 원을 아끼고자 쿠폰을 쓰던 나에게 큰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에 왔으니 미국문화를 따라가는 게 맞지만, 도대체 얼마를 팁으로 내야 할지는 매번 나를 불편하게 했다. 어떨 때는 너무 많이 내는 것 같고, 또 다른 때는 너무 적게 내는 것 같고. 얼마를 팁으로 남겨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와이프는 달랐다. 아무리 적어도 밥값의 15퍼센트를 냈고, 맛이 있으면 20퍼센트도 흔쾌히 지불했다. 가뜩이나 비싼 물가에 20퍼센트라니! 나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와이프가 특별히 팁에 관대한 게 아니라 다들 그 정도 낸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았단 것이 이민자인 내가 팁문화에 완전히 적응했다는 뜻은 아닐뿐더러, 와이프의 그 무지막지한 학자금 대출이 줄어든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여전히 팁을 낼 때면 와이프에게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저축 강의를 시작하곤 했다. 하지만 여기는 엄연히 서비스를 받았으면 팁을 내는 것이 인지상정인 미국이다. 내가 한국에서처럼 작은 돈을 아끼려 아등바등해봐야 비난만 받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저축강의를 하지 않는다. 대신 밥을 먹고 식당을 나설 때면 조용히 와이프에게 볼펜을 떠넘긴다. 그녀가 팁으로 얼마를 적어내든 상관하지 않으려 애써 시선을 회피한다. 팁은 적당히 내겠지, 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한국에 살 때 그녀가 한국의 문화를 존중해준 것에 대한 나의 작은 보답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