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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에 흔들린 꽃들 Jan 02. 2023

쓸모없어 보이는 배려들

하인리히의 법칙

미국인 와이프와 한국인 남편의 부부싸움은 어떤 모습일까. 내쪽은 양친이 다 돌아가셔서 시댁은 없다고 봐도 되고, 처가 또한 우리가 사는 메릴랜드에서 5시간 거리에 있기에 시댁이나 처가로 발생하는 문제는 없다. 그럼 우리는 주로 무엇 때문에 싸울까? 내가 느끼기로는 문화의 차이보다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존재하는 화법의 차이가 더 큰 원인인 것 같다. 와이프가 어떤 얘기를 해도 분석을 하고 해결책을 내놓으려는 남편, 그리고 내가 문제에 대해 실질적인 의논을 하려 해도 그저 공감만 하는 와이프. 바로 여기서 문제는 발생한다.


며칠 전, 와이프는 나에게 새해에는 수어를 배워보고 싶다고 말했다. 수어보단 한국어 공부에 더 열중해보는 건 어떠냐고, 나는 대꾸했다. 같이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볼 수도 있고, 아이들의 한국어 교육에도 도움이 될 거란 근거도 제시하며. 그러자 그녀의 안색이 안 좋아지더니, 이내 자신이 무엇을 하든 그냥 응원해줄 수는 없냐고 질색했다. 사실 그녀가 이런 불만을 터뜨린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공감을 원하는 그녀의 바람과는 반대로, 나는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선 공감하는 데 어려움을 겪곤 한다 — 사실 지금도 왜 한국어가 아닌 수어를 배우겠다는지 이해할 수 없다.


와이프와 대화하면서 나도 가끔씩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다. 조만간 집을 장만할 계획이 있어서 우리는 자금에 대해 이야기할 일이 부쩍 늘었다. 그때마다 나는 구체적인 금액과 주식 및 부동산 시장에 대해 열심히 의견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와이프의 생각을 물어보면 늘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잘 되겠지. 그 말 뒤로 어떨 땐 해맑은 미소가 뒤따르기도 하고, 다른 때엔 귀찮은 듯 찡그리기도 하는 그녀다. 어느 쪽이든 대화는 거기서 끝난다. 나는 그녀의 생각을 듣고 싶은데, 다 잘 될 거니까 걱정하지 말란다. 무슨 의논을 더 하겠는가.


간혹 이런 화법의 차이는 부부싸움이라 할만한 상황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대치 상황에서 와이프가 택하는 방법은 일찍 자러 가기, 내가 택하는 방법은 각방 쓰기 — 남는 방이 없어서 내가 갈 곳은 거실뿐. 따라서 이런 저기압이 길어지는 날에는 와이프가 저녁식사 후 일찍이 방으로 향하고, 나는 홀로 거실에 남아 텔레비전을 보는 고독의 밤을 보내게 된다. 원래 늦게 자긴 해도 이런 날에는 유독 잠이 오질 않아 오래도록 깨있는데, 나는 최대한 조용히 움직이도록 노력한다. 문틈으로 불빛이 들어갈까 봐 조명도 최소한으로 켜고서 말이다. 밤잠에 민감한 와이프를 위해서 참 많이도 애쓰는 남편이다. 부부싸움이 전적으로 내 잘못도 아니거니와 화해를 한 것도 아닌데, 내 기분을 망친 와이프가 뭐가 좋다고 거실에 불도 다 끄고 살금살금 걸어 다닌단 말인가.


그런데 이건 와이프도 마찬가지였다. 가끔은 전적으로 내 잘못으로 인한 부부싸움 후에도 최대한 나를 배려하는 그녀다. 내가 빈 상자를 수납공간으로 활용하는 걸 잘 아는 와이프는 얼마 전에도 부부싸움으로 냉기가 흐르는 와중에 한 빈 상자를 버려도 되냐며 물어왔다 — 수제쿠키가 들어있던 빨간색 철제상자였다. 아직 화해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별 것도 아닌 배려가 무슨 쓸모인가. 그런데 조금 생각해보니 아주 쓸모가 없는 것 같진 않았다.


하인리히의 법칙이란 큰 사고가 일어나기까지 수십 개의 작은 사고가 일어난다는 통계를 말한다. 이를테면, 비행기추락이 있기 전에 작은 부품결함이나 약간의 오작동 등이 수없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런 작은 이상이 하나라도 고쳐진다면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는 점이 하인리히의 법칙의 요점이라 해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부부 사이의 쓸모없어 보이는 배려가 부부싸움이 심각한 문제로 발전되지 않도록 예방하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됐다.


국적, 인종, 화법 등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은 우리 부부는 앞으로도 많은 부부싸움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때마다 내가 밤늦게까지 불을 다 켜두고 쿵쾅거리며 거실을 돌아다니면 와이프는 잠들지 못할 것이다. 아직 화해하지도 않았는데, 와이프가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쓸만한 상자들을 내다 버리면 나 또한 성질을 부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살금살금 걷고 와이프는 쓰레기를 버리기 전에 잘 들여다본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런 작은 배려들이 우리 마음속에 미움이 싹트지 않도록 막아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장 좋은 것은 안 싸우는 것이다. 다른 점을 받아들이고 공감을 주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일단 나는 와이프가 무엇을 하든 무조건적인 응원을 해볼 생각이다. 이해 따윈 제쳐두고 그녀가 수어를 배우겠다고 하면, 좋은 생각이라며 맞장구를 쳐줘야겠다. 와이프 역시 주식과 부동산에 관심을 갖게 될지는 미지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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