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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흔들린 꽃들
Jan 09. 2023
마당이 딸린 집에 살고 싶어
난 아파트에 살고 싶어
곧 네 번째와 두 번째 생일을 맞는 딸과 아들을 둔 부모로서, 우리 부부는 집을 장만할 계획이 있다.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에 집을 사려다가, 내가 이직을 준비하면서 무산됐던 바 있다. 다행히 이직은 성공적이었으나, 새로운 직장이 있는 워싱턴 디씨로 지역을 옮기는 바람에 유주택자의 꿈은 잠시 보류될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집값은 천정부지로 올랐으며, 덩달아 오른 금리 덕분에, 우리의 꿈은 잠에서 깰 때처럼 흩어져 버렸다.
그러나 언제까지 좋은 때만 기다릴 순 없다. 집값도 저렴하고 금리도 낮은 그런 세상이 다시 오기까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어쩌면 그런 기회는 다시는 오지 않을 가망도 있다. 그래서 일단 조만간 집을 사는 것, 그것만은 우리 부부가 합의한 부분이다. 빠르면 렌트 계약이 끝나는 올여름, 늦어도 내년 상반기 중에는 이 거대한 구매를 완료할 계획이다 — 말이 좋아서 구매지, 무지막지한 빚을 진다고 해야겠다.
그렇다면 무슨 집을 살 것인가? 이 부분은 합의는커녕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시골에서 자란 와이프는 단독주택에 익숙하다. 앞마당과 뒤뜰이 있고, 옆에는 커다란 나무가 지붕을 덮고 있으며, 큰 가지에는 그네도 달려 있는, 그러한 전원주택 말이다. 한국에서는 도시 외곽으로 나가야 보이는 전원주택이란 나에겐 멀리서 볼 때만 좋은 집이다. 들어가서 산다는 건, 주말마다 집을 보수하고, 잔디를 깎고, 날씨가 안 좋을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피곤을 의미한다. 반드시 단독주택에 살아야만 한다면, 사실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주택들이 모인 동네에 마트도, 식당도, 그 어떤 것도 가까이 있지 않다. 풀이 무성한 산책로와 텅 빈 도로 따위만 있을 뿐이다. 와이프에겐 그런 동네의 단독주택이 화사한 컬러사진으로 보이겠지만, 내 눈에는 휑뎅그렁한 흑백사진으로 보인다.
반대로 높은 빌딩과 시끌벅적한 식당과 가게들이 즐비한 도시는 내 눈에만 생기 있게 보인다. 나는 그런 곳에 가서 살고 싶다. 집 밖을 나서면 어디든 걸어갈 수 있고, 거리의 다양한 사람들과 마주칠 수 있는 동네 말이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로선 자연스러운 선호라 해야겠다. 물론, 나 역시 서울의 복잡함에 진저리가 났던 때가 있었고, 와이프의 조용한 고향집에 갈 때면 세상에서 잊힌 듯한 기분을 즐기기도 한다. 하지만 와이프가 고향집을 첫 집 구매의 기준점으로 잡듯이, 나도 서울의 공동주택을 기준점으로 잡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의논만 벌써 수개월째, 와이프는 교외의 단독주택, 나는 도시의 아파트, 의견이 좁혀지지 않고 있다. 아이들이 태어난 이후로 쭉 내가 외벌이 중이라, 내쪽의 입김이 더 클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과거 와이프가 외벌이를 했던 적도 있고 육아에 더 큰 헌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 쪽의 의견도 공평하게 반영될 수 있도록 신경 써야 한다. 이를테면, 미국의 도심에 사는 것은 서울에서 사는 것과 많이 다르다는 의견 말이다. 그 부분은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한다. 집 밖에 나가 모퉁이를 돌면 분식집이 있다 거나,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줄지어 들어선 거리를 산책한다 거나, 그런 생활은 도시라 할지라도 미국에선 기대하기 어렵다 — 뉴욕이라면 모를까.
이 논쟁은 어떻게 끝나게 될까? 나는 왠지 답을 알 것 같다. 나와 와이프 중에 한쪽이 양보하는 모습보다는, 첫째 딸이 곧 학교에 들어간다는 변수가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경우를 예상한다. 자녀가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다면, 마당의 크기나 도심의 소음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된다. 새해의 시작과 함께, 어느새 딸아이가 학교에 갈 시기가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꼈던 것이다. 그런 자각은 우리 부부를 각성시켰다. 집 구매는 부부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의 문제였단 사실을. 이제는 서로의 문제를 볼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똑같이 주어진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 문제들이 이제 시작이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은퇴할 날을 기다리게 된다. 언제쯤 우리 부부가 진정으로 원하는 집에 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