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복 8차선 빨간불 앞, 우리는 모두 배우가 된다

묘한 대치 상황

by 무명초

세상에서 가장 긴 1분은 어디에 있을까. 컵라면 물을 붓고 기다리는 시간? 아니다. 나는 주저 없이 **‘왕복 8차선 도로 앞의 빨간불’**이라 답하겠다.


엘리베이터가 사방이 막힌 ‘밀실의 서스펜스’라면, 횡단보도는 사방이 뚫린 광장에서 벌어지는 ‘공개적인 고립’이다. 숨을 곳도 없는데 발은 묶였다. 우리는 신호등이라는 무심한 간수 앞에 붙잡힌 채, 생전 처음 보는 타인들과 나란히 서서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는 배우가 된다.




1. 짝다리와 시선의 방황: ‘척’의 미학

신호등 앞에 서는 순간, 손은 갈 곳을 잃는다. 평소엔 잘만 직립보행하던 다리는 갑자기 어색해진다. 이쪽저쪽 무게중심을 옮겨본다. 소위 짝다리다.


스마트폰을 꺼내 대단한 뉴스라도 읽는 척 액정을 스크롤한다. 사실 눈에 들어오는 건 없다. 괜히 시계를 한 번 보고, 신발 끝 먼지를 털어내며, 먼 산을 바라보며 심오한 고민에 빠진 표정도 지어본다.


모든 행위의 본질은 하나다.


“나는 지금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것은 절박한 자기 방어다.


2. 건너편의 적들: 묘한 대치 상황

횡단보도의 백미는 내 옆 사람이 아니라 건너편 사람이다. 녹색불이 켜지면 서로를 향해 돌진해야 하는 운명적 대치.


시선을 어디 두어야 할지 모르는 찰나,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다. 0.1초 만에 눈을 깔거나 허공으로 시선을 던지지만 이미 늦었다. 그 짧은 눈 맞춤에 담긴 민망함은 8차선 도로의 너비보다 깊다. 이곳에선 정면의 타인을 피하는 기술이 곧 생존 전략이다.


3. 무심한 신호등, 유능한 감독

신호등은 잔인할 만큼 공평하다. 내가 얼마나 급한지, 내 옆 사람이 얼마나 어색한 향수를 뿌렸는지 관심 없다. 그저 붉은 눈을 부라리며 우리를 한 곳에 박제해 둘 뿐이다.


이 짧은 멈춤의 시간 동안, 우리는 타인의 삶을 강제로 구경한다.


옆 사람의 에어팟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비트


장바구니 속 대파의 싱싱함


누군가의 깊은 한숨 소리


횡단보도는 도시라는 거대한 기계가 잠시 멈춰 서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게 만드는 간이역이다.




마법의 해제: “삑- 삑-”

소리와 함께 녹색불이 켜지면, 팽팽했던 긴장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짝다리를 풀고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는다. 우리는 서로를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그 1분의 정지 화면 속에서 분명히 느꼈다. 저 건너편 사람도 나처럼 먼 산을 바라보며 뻘쭘함을 견디고 있었다는 것을.


어쩌면 횡단보도는 현대인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짧고 정중한 ‘멈춤’의 의례일지도 모른다. 무심한 신호등 덕분에 우리는 잠시나마 고개를 들고 타인의 실루엣을 곁눈질하며, 내가 여전히 이 세상의 일원임을 확인받는다.


비록 그 과정이 지독하게 뻘쭘할지라도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하루 종일 타인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느라 가장 많은 에너지를 쓰는지도 모른다고, 문득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