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없고 제3자만 가득한 세상
타인의 복잡한 삶을 대할 때, 우리는 어느덧 뒷짐을 진 채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겪는 일이 아니니 판단은 쉽고 해결책은 명쾌하다. 그 순간만큼은 우리 모두가 공자(孔子)이고, 인생의 모든 풍파를 초월한 현자(賢者)가 된다.
제3자라는 안전거리가 확보될 때, 인간의 지혜는 비로소 만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현자 놀이’의 유효기간은 내 삶에 문제가 들이닥치는 순간 종료된다. 특히 상대방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고 느껴질 때, 혹은 나를 향한 비아냥의 본질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저열하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비로소 제3자의 가면을 벗어던진다.
이성적인 논리는 온데간데없고, 내 영역을 침범당한 짐승처럼 털을 세운 '성난 사자'가 되어 기싸움을 펼친다.
우리는 현자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를 지키고 다치지 않기 위해 사자가 된다. 이것이 현실이고, 그냥 인간의 삶이다.
우리는 왜 그토록 치열하게 진흙탕에서 구르는가? 단순히 감정을 배설하기 위함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싸움이 격렬해질수록 인간의 진짜 **'뼈대'**가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부딪히다 보면 서로가 꽁꽁 숨기고 있던 '사람으로서의 허점'이 삐져나온다. 날 것의 감정이 터져 나오는 그 순간부터 싸움은 하나의 **'역사'**가 된다.
감정은 기록의 방식일 뿐, 기록의 목적은 진실이다. 싸움이 지속되면서 서로의 허점이 노출되고, 그 파편들이 하나둘 모여 **시간순(Timeline)**으로 정리된다. 누가 먼저 선을 넘었는지, 내 안의 어떤 결핍이 폭발했는지가 기록되듯 선명해지는 것이다. 역사가 기록을 통해 진실을 규명하듯, 싸움 역시 그 치열한 과정을 통해 숨겨져 있던 오해의 원인을 드러낸다.
자기 주관이 완벽해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뼈대를 가진 사람은 드물다. 대다수의 우리는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유연하고도 유약한 존재들이다.
타인의 일에는: 고요한 호수 같은 현자
자신의 일에는: 휘몰아치는 폭풍 속의 사자
남의 일엔 도덕이 되고 내 일엔 본능이 되는 것, 마음은 현자를 지향하되 현실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 숙명이다.
사람의 삶이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기에 오해하고, 오해하기에 사자가 되어 싸우며, 그 싸움의 타임라인 위에서 서로의 허점과 진실을 마주할 뿐이다.
오늘도 누군가와 뜨겁게 부딪혔다면 너무 자책하지 말자. 당신은 지금 현자의 가면을 벗고, 가장 인간다운 방식으로 자기만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현자를 꿈꾸지만 결국 사자로 살아내는 존재, 그것이 바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