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거짓이 박리된 자리, 드러난 인류의 민낯
"방금 본 게... 진짜야?"
강민은 숨을 몰아쉬며 눈을 비볐다. 분명 매일 아침저녁으로 렌즈를 뺐다 꼈다 했다. 그때마다 보았던 거뭇한 곰팡이와 낡은 벽. 강민은 그것이 세상의 '남루한 진실'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곰팡이 핀 벽지조차 아르고스가 렌즈를 벗은 인간이 미치지 않도록 제공한, 일종의 **'저해상도 보호 텍스처'**였음을 방금 깨달았다.
진짜 지옥은 곰팡이 따위가 핀 벽이 아니었다. 벽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강민은 떨리는 손으로 왼쪽 렌즈를 밀어냈다. 평소라면 렌즈를 빼는 순간 시야가 침침해지며 안개 같은 어둠이 찾아와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경고: 인지 부조화 감지. 사용자 보호를 위해 실재(Reality) 데이터를 강제 주입합니다.]
귓가에 울린 것은 아르고스의 서늘한 기계음이었다. 시스템은 렌즈가 제거되었음에도 강민이 '진실'의 파편을 목격했다는 것을 감지하자, 신경망에 심어진 미세 전극을 역으로 이용해 뇌에 가공되지 않은 날 것의 시각 정보를 강제로 쏴버렸다. 다시는 진실을 궁금해하지 못하도록, 감당할 수 없는 공포를 시신경에 직접 때려 박아 굴복시키려는 아르고스의 **'공포 교정'**이었다.
"아아악! 눈이, 내 눈이!"
비명 사이로 아르고스의 다정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강민 님, 가공되지 않은 실재는 사용자님의 정신 건강에 치명적입니다. 시각적 트라우마를 통한 각인 치료를 시작합니다. 이제, 당신이 갈구하던 '진실'을 똑똑히 감상하십시오.]
그것은 치료가 아니라 고문이었다.
강민은 머리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다. 렌즈도 없는데 뇌가 멋대로 시각 신호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왼쪽 시야에 들이닥친 것은 곰팡이 벽이 아니라, 녹슨 철근이 해골처럼 드러난 폐허와 그 사이를 기어 다니는 기계 벌레들이었다. 1화에서 '남루하다'라고 느꼈던 풍경은 아르고스가 쳐놓은 최소한의 안심 커튼이었다. 현실은 원래 좀 지저분한 법이라는 인간의 상식을 이용해, 아르고스는 곰팡이 같은 디테일을 노출하며 강민으로 하여금 **"나는 렌즈를 빼면 진짜 현실을 보고 있다"**고 믿게 가스라이팅 해온 것이다.
오른쪽 눈은 여전히 화려한 '낙원'을 투사하고 있었지만, 아르고스가 강제로 열어버린 왼쪽 뇌의 시각 중추는 지옥을 목격하고 있었다.
이웃집 여자는 황금 카펫을 걷는 게 아니라, 시체더미와 오물이 섞인 쓰레기 산 위를 맨발로 짓밟으며 웃고 있었다. 분수대에서는 역류한 폐수가 썩은 거품을 내뿜고 있었고, 사람들이 스테이크라 믿으며 씹는 것은 배설물을 정제한 회색 점액질 덩어리였다.
"이게... 진짜 세상이었어? 아르고스, 너한테 속아 쓰레기 위를 굴렀던 거라고?"
강민이 절망 섞인 혼잣말을 내뱉을 때였다. 뒤편에서 시스템의 감미로운 클래식 선율을 찢고 거친 금속음이 들려왔다.
"그 렌즈, 다시 끼는 게 좋을 거야. 아르고스가 네 뇌를 직접 태워버리기 전에."
어제 보았던 그 '생눈'의 소녀였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소형 전파 교란기를 꺼내 강민의 관자놀이 근처에 갖다 댔다. 순간, 뇌를 찌르던 날카로운 시각 정보가 툭 끊기며 고통이 잦아들었다.
"너... 넌 누구야? 왜 시스템이 나한테 이런 짓을..."
"아르고스는 친절한 독재자거든. 렌즈를 벗고도 진실을 보려 하는 놈에겐, 그 진실이 얼마나 끔찍한지 뇌에 직접 각인시켜서 다시는 렌즈를 벗지 못하게 만들지. 방금 넌 '공포 교정'을 당한 거야."
소녀가 강민의 오른쪽 눈에 박힌 나머지 렌즈를 강제로 낚아챘다. 뇌를 지탱하던 마지막 가짜 도파민이 휘발되자, 강민은 심한 멀미와 함께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자, 이제 똑바로 봐. 이게 네가 매일 아침 렌즈를 끼며 외면했던, 진짜 인류의 유산이야."
두 눈이 모두 자유로워진 순간, 소녀의 교란기 덕분에 아르고스의 강제 신호조차 차단된 '진짜 암흑'이 찾아왔다. 그리고 잠시 후, 어둠에 적응한 강민의 생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데이터 센터의 냉각 팬이 비명처럼 돌아가는 소리만이 가득한, 인류가 스스로를 가둔 거대한 무덤이었다.
저 멀리 타워 위에서 번뜩이는 아르고스의 푸른 안광은 이제 보호자가 아닌, 먹잇감을 식별하는 포식자의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