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녀의 유통기한
사무실을 나서자마자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정은은 우산도 없이 축축한 길을 걸으며, 오늘이야말로 역사에 남을 완벽하게 형편없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택시에서 내려 골목 어귀에 닿았을 때 비는 그쳤지만, 눅눅한 공기가 젖은 옷감처럼 몸에 달라붙어 걸음이 더 처졌다. 천근만근인 몸을 이끌고 안식처인 3층 자취방을 향해 계단을 올랐다. 도어락 번호를 누르려던 정은의 눈에 노란 등기우편 안내 쪽지가 들어왔다.
우편물 도착안내서
4월 16일 09시 23분 방문, 부재로 재방문 예정 4월 17일 08시-10시
종류: 일반등기
보낸분: 강남구청 자동차민원과
받는분: 이*은
재방문시 부재중일 경우 4월 19일까지 역삼우체국에 보관 신분증 등 지참하여 방문수령 가능
'직장인은 등기도 받지 말라는 건가.'
신경질적으로 딱지를 떼어내 읽어 내려갔다. 오전 8시 방문이라니, 출근 준비로 정신없는 시간에 다시 온다는 소리에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내일 연차를 쓰지 않으려면 지금 뭐라도 해야 했다.
집배원 지승기 010-9525-02309
우체국 전화번호 02-5327-652@
통화가능시간 08:00-17:00
전화를 걸기엔 너무 늦었다. 하지만 내일 오전 8시 첫 배송으로 받지 못하면 영락없이 우체국까지 가야하기 때문에 문자라도 남겨야할 것 같았다. 자동차민원과에서 등기로 보낼 서류가 뭐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은 일은 아닐테니 범칙금이든 벌금이든 빨리 알아야 빨리 해결하니까.
‘엄마가 주차 위반을 하고 오래 묵혔을까. 아니면 장애인자리에 주차를 했나?’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어쨌든 첫 배송을 받기 위해 집배원에게 최대한 공손한 메시지를 남겼다
[로얄빌라 302호 이정은입니다. 오늘 등기수령을 못 했는데 내일 출근 전에 받을 수 있을지 문의 드립니다. 8시 반 전에 오실 수 있을까요? 밤 늦게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와 감사합니다를 연이어 쓰는 게 어색하게 느껴져서 지워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냥 보냈다. 둘 다 진심이니까. 다만 업무용 휴대전화를 업무 전에 확인할지, 제 시간에 받을 수 있을지가 더 걱정이었다. 혹시 모르니 새벽에 전화라도 걸어볼까 생각하는데 답장이 왔다.
[8시 반까지 도착은 어렵습니다. 서둘러도 1-20분 늦을 것 같습니다]
자동응답기인 줄 알고 메시지를 남겼는데 갑자기 사람이 불쑥 말을 건넨 것 같은 당혹감에 멈칫했다. 시간을 확인했다. 밤 11시가 훌쩍 넘은 시각, 집배원 지승기씨에게 다시 문자를 보냈다.
[아직 업무중세요?]
[예. 마지막 배송이 몇개 남았습니다]
[아, 고생이 많으시네요… 내일 출근 전에 받지 못하면 연차내고 등기를 찾으러가야해서 염치불구하고 부탁드렸어요. 어려우시다면 추후에 제가 방문해서 수령하겠습니다. 밤 늦게 죄송합니다… ]
자정이 가까운 시간까지 퇴근을 못 한 직장인을 덤으로 괴롭히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 시간까지 일을 하고 내일 8시에 업무 복귀라니 집배원도 쉬운 일은 아닌 듯 했다.
[아닙니다. 그럼 늦어도 괜찮으시면 퇴근길에 들려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집배원 지승기씨가 답했다. 정은은 속으로 무척 고마웠지만 동시에 미안했다.
[아, 아닙니다. 너무 죄송해서 그건 안 될 것 같아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역시 자기 편의를 위해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정은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일이나 모레쯤 잠시 반차 쓰고 다녀오면 될 일라고 단념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아직 안 주무시는 것 같아서 전화드렸어요.”
집배원 지승기씨였다. 하루를 꽉 채워 쓴 사람답지 않게 여전히 시원시원한 목소리였다.
“어짜피 집에 가려면 지나는 길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시라고 전화드렸어요. 어짜피 오늘 안 받으시면 내일 또 가야하거든요. 안 계시는 것 알면서도 가서 안내장을 붙여놓고 와야해서요.”
지승기씨 말도 일리는 있었다. 내일 할 일을 오늘 하면서 정은의 수고도 덜어주는 셈이니 일처리는 더 깔끔해진다.
“아, 늦은 시간까지 일하시는데 제가 너무 죄송해서요…”
“일부러 그러시는 것도 아닌데요, 괜찮습니다. 너무 신경쓰이시면 1층까지만 내려와 주셔도 될까요? 그 골목 주차가 까다롭더라구요.”
“그럼요! 1층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받을게요. 정말 감사해요.”
“예, 아직 밤공기가 차가워요. 일찍 내려와 계실 필요는 없고 근처 가서 제가 전화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정은은 지승기씨의 마지막 배송지를 예약했다. 아무리 합리적인 제안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열두시를 막 지나는 시계를 보면서 집배원의 하루를 그려보았다. 새벽에 일어나 8시부터 배송을 시작하고 열두시가 넘도록 길위에서 보내는 시간. 밥은 제 때 먹으려나. 음료수라도 가져다 줘야겠다고 냉장고를 뒤적이다가 지난 겨울 이대리가 선물로 준 유자청이 보였다.
“이게 아직도 있었네.”
뚜껑도 안 열고 그대로 냉장고에 쳐박혀 있던 유자청 뚜껑을 열었다. 오랫동안 닫혀있던 알루미늄 뚜껑이 딸깍 소리를 냈다. 밝은 노란색 조명이 비치는 유리병에서 상큼하고도 달큰한 냄새가 향긋하게 번졌다. 찻잔에 물을 조금 붓고 유자청을 듬뿍 타서 전자레인지에 데웠다. 아무리 따뜻한 물을 타도 냉장고에서 갓 나온 청을 타면 미지근한 차가 되어버리니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차를 만드는 정은의 방식이었다. 전자레인지가 진동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동안 정은은 찬장에 있던 싸구려 텀블러를 꺼냈다. 작년에 행사장에서 기념품으로 받아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것이었다. 지나치게 고급 제품도 아니고 사용하던 것도 아니니까 부담스럽지도, 불쾌하지 않을 것이다. 따끈하게 데워진 녹진한 유자청에 끓는 물을 부었다. 노랗게 색이 번져갔다. 유자껍데기를 조금 더 뭉게서 풋풋한 향이 더 진해졌다. 그리고 기다렸다.
“이제 모퉁이 돌면 금방이라서 내려오시면 될 것 같아요.신분증 챙겨서 나오세요.”
지승기 씨의 목소리는 여전히 오전처럼 생기가 넘쳤다. 정은은 이제와서 텀블러가 머쓱하게 느껴져 가지고 내려가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스러워 현관 신발장 거울을 보면서 주춤거리다가 현관 거울속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하루치 노동에 절어 푸석해진 얼굴. "아이씨..." 혼잣말을 내뱉으며 주춤거렸지만, 유자향이 새어 나오는 싸구려 텀블러를 꼭 쥐고 계단을 내려갔다. 평소엔 야박하게 꺼지던 계단 센서등이 오늘따라 정은의 발걸음을 따라 환하게 길을 터주어 계단 전체가 대낮처럼 밝았다.
“안녕하세요!”
1층 현관 앞, 우체국 트럭의 헤드라이트가 골목을 밝히고 있었다.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가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으슥한 밤이었지만 그의 선한 웃음 덕분에 경계심은 금세 녹아내렸다.
“정말 감사해요. 그리고 죄송해서.. 유자차를 좀 탔는데… 퇴근 길에 드시라고….”
“하하, 감사해요. 이런 선물은 처음 받아보네요, 하하. 저는 보통 배송만 하니까요.
남자는 텀블러를 소중하게 옆구리에 끼고 업무를 이어갔다. 신분증을 확인하는 그의 손가락, 단말기를 누르는 익숙한 동작들을 정은은 고개를 숙인 채 훔쳐보았다. 길 위에서 오래 일한 사람 특유의 약간 굽은 어깨, 군살 없이 마른 몸. 단말기 불빛에 비친 손가락은 생각보다 가늘고 단정했지만, 그 단정함 사이로 길게 자란 손톱이 자꾸 정은의 눈길을 끌었다.
“다 됐습니다. 늦은 시간에 실례 많았습니다. 차도 잘 마실게요. 혹시 다음에 또 등기 받으실 일 있으면 그때 텀블러 돌려드릴게요.”
다음을 기약하는 그의 인사가 출근길 아침 인사처럼 상쾌하게 골목에 남았다. 정은은 저도 모르게 꾸벅 인사를 하고 멀거니 골목에 나와 서있었다. 가로등 아래 축축한 아스팔트가 반짝 거렸다. 정은이 골목까지 나와 현관을 벗어나는 바람에 센서등이 꺼졌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그래서 등기는 대체 뭐야.’
정은은 계단을 오르면서 노란 센서등에 비춰가며 서류를 열었다.
자동차 소유권이전/상속/말소 등록안내
안녕하십니까? 강남구청입니다. 가족의 슬픔을 위로하오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상속에 따른 자동차 이전등록안내절차 고시에 따라….
…사망자 이상구 ….
망할 센서등이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