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녀의 유통기한
모두 퇴근한 뒤에야 정은은 알았다. 사람은 울음을 그친다고 해서 마음을 접은 게 아니라는 것을. 이대리는 오후 내내 눈이 부은 채로 일했다. 그래도 메신저 답장은 꼬박꼬박 했고, 최인애 씨 건 진행 상황도 정리해서 올렸다. 겉으로 보기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정은도 일부러 더 묻지 않았다. 괜히 한 번 더 건드렸다가 감정만 커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바빴다. 당장 눈앞에 쌓인 일부터 쳐내야 했다.
오후 틎게 사장이 정은을 불렀다. 아니, 정확히는 불렀다가 20분쯤 기다리게 했다. 회의실 문은 열려 있었고, 사장은 자리에 없었다. 사람을 먼저 앉혀두고 초조하게 만드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정은은 노트북을 켜고 메일함을 뒤적이며 시간을 죽였다. 잠시 후 커피를 들고 느긋하게 들어온 사장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물었다.
“최인애 씨 건, 왜 또 저렇게 된 거야?”
정은은 차분히 설명했다. 시안 방향은 이미 여러 차례 합의가 되었고, 현재 반복되는 수정은 디자인 완성도의 문제가 아니라 승인권자의 불안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고. 그래서 일단 요청사항은 반영하되, 브랜드 레퍼런스를 근거로 기존 안의 설득 포인트를 다시 잡고, 담당자 변경 요구에 대해서도 직접 통화하여 불편 사항을 확인했다고.
사장은 듣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늘 그렇듯 결과만 두고 말했다.
“어쨌든 고객이 저렇게 말하면 우리 잘못이지.”
정은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 말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자주 들어서 이제는 반박할 기운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생기든 결국 회사 잘못, 결국 실무자 잘못, 결국 정은이 한 번 더 막아야 할 일. 그게 이 회사의 운영 원리였다.
“그리고 엄팀장. 요즘 팀원들 관리가 잘 안 되는 것 같아.”
이번에는 정은이 웃을 뻔했다. 관리. 그 단어는 늘 일을 가장 적게 하는 사람의 입에서 가장 쉽게 나왔다.
“이대리도 그렇고, 신규 애들도 그렇고. 실무 감각이 아직 멀었어. 엄팀장이 좀 더 타이트하게 봐야지.”
그 말 끝에 정은은 아주 잠깐 이대리 얼굴을 떠올렸다. 커피 앞에 앉아 입술을 깨물던 표정. 저 그만둘래요, 하고 말하던 젖은 목소리. 하지만 그런 걸 입 밖으로 꺼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 회사에서는 누군가가 힘들다는 사실이 업무조정의 근거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버티지 못한 사람의 약점으로 기록될 뿐이었다.
“네.”
결국 그녀가 한 말은 그것뿐이었다. 회의실에서 나온 뒤 정은은 한동안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복도 끝 창가에 서 있었다. 해가 다 진 뒤의 유리창에는 바깥 야경보다 자기 얼굴이 더 선명하게 비쳤다. 피곤하고, 마르고, 성질 나 보이는 얼굴. 그래도 울지는 않는 얼굴이었다.
자리로 돌아오자 이대리는 이미 퇴근한 뒤였다. 메신저 상태는 오프라인, 책상 위 텀블러도 없었다. 정은은 잠깐 허전해진 자리를 보다가 곧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일은 남아 있었다. 고객사는 기다려주지 않았고, 사장은 내일 아침이 되면 또 무슨 진척이 있냐고 물을 것이고, 디자인팀은 자기들도 바쁘다고 할 것이고, 신규 직원들은 여전히 물어볼 게 많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도 해야 했다. 하던 사람인 정은이.
창밖의 불 켜진 건물이 하나둘 꺼졌다. 사무실 안도 조용해졌다. 복사기 돌아가는 소리도, 탕비실 문 여닫는 소리도 사라지고 나자 건물 전체가 비어가는 게 느껴졌다. 밤이 깊어질수록 사무실은 꼭 학교에 혼자 남은 것 같은 기분을 줬다. 아무도 없는데 형광등만 환하고, 작은 소리도 괜히 크게 들리는 곳.
열 시 반쯤 되었을 때 정은은 어깨를 뒤로 젖히며 목을 돌렸다.
이제 정말 가야 했다. 더 앉아 있어도 일이 끝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퇴근 직전, 마지막으로 메일함을 한번 훑는 건 오래된 습관이었다. 급한 불씨를 미리 보고 나가느냐, 아니면 길에서 맞느냐의 차이는 컸다.
받은편지함 맨 위에 새로운 메일이 와 있었다.
제목: 죄송합니다…
그 순간 정은은 마우스를 잡은 손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설마, 하고 열어본 메일에는 예상한 문장이 정확히 들어 있었다. 오래 고민한 끝에 퇴사를 결정했다는 말. 더 이상 과중한 업무와 고객의 강압적인 태도를 견디기 어렵다는 말. 최근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병원을 다니고 있고, 당분간 건강을 돌보며 쉬고 싶다는 말. 메일은 길지도 짧지도 않게, 미안함과 결심이 적당히 섞인 단정한 문장들로 쓰여 있었다. 정은은 끝까지 다 읽고도 한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정말 간다는 뜻이었다.
첨부파일이 있었다. 파일명은 ‘인수인계서’.
정은은 입술을 비틀며 그 파일을 열었다. 엑셀 양식 위에 텍스트를 대충 오려 붙인 것 같은 문서가 나왔다. 프로젝트별 진행 현황, 연락처, 특이사항. 빠진 게 많았고, 정리도 성의 없었다. 성의가 없는 게 당연했다. 퇴사하는 사람이 무슨 애사심으로 밤늦게 완벽한 인수인계를 하겠는가. 그런데도 정은은 화가 났다. 화가 났고, 서운했고, 기가 막혔다.
‘전화는 안 받겠지.’
핸드폰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받을 리 없었다. 받는다 해도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왜 나한테 이러냐고? 지금 나가면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아냐고?
그건 너무 궁색했다.
무엇보다 너무 솔직했다.
정은은 의자에 등을 깊이 기댔다. 머릿속으로 이대리가 맡고 있던 일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최인애 씨 건, 다음 달 론칭 준비, 협찬사 응대, 주간 보고서, 행사장 견적 확인, 신규 제작물 체크, 디자인 수정 스케줄링. 하나같이 누가 대신 맡기 애매한 것들뿐이었다. 결국 한두 달은 또 자신이 받아내야 할 것이다. 새 직원을 뽑아도 적응시키는 건 자기 몫, 사고가 나도 수습은 자기 몫, 고객이 화를 내도 결국 자기 몫.
사무실 바깥 복도는 더 조용해졌다.
열한 시가 넘으면 정문이 닫히고, 남은 사람들은 비상구 쪽 작은 출입문으로 나가야 했다. 정은은 그 길이 싫었다. 초록색 비상등이 켜진 복도를 따라 쥐구멍 같은 문으로 빠져나가는 기분.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늘 끝까지 남아 있다가 결국 가장 초라한 문으로 나가는 노동자 같았다.
노트북을 덮으려는데 문득 아침 통화가 떠올랐다.
“너 집에 두루마리 휴지 있어? 아빠가 없으니까 휴지를 스무 개씩 사놓을 수가 없어. 나 혼자 그걸 언제 다 쓰겠어. 니네 집에 들러서 몇 개 가져가게 없으면 좀 시켜놔.”
하필 그런 건 또 또렷하게 기억났다.
정은은 눈을 감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오늘 하루 종일 별의별 인간들한테 시달렸는데, 머릿속 끝까지 비집고 들어오는 건 결국 엄마의 휴지였다. 고객은 담당자를 바꾸라고 하고, 사장은 팀 관리를 운운하고, 팀원은 사직서를 던지고 도망가는데, 내일 아침이면 엄마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휴지를 가지러 올지도 몰랐다.
그 순간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모든 방향으로 동시에.
‘왜 나는 늘 남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왜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요구하고, 누군가는 기대고, 누군가는 불평만 하는데, 결국 정리하는 사람은 항상 나지.’
왜 그녀는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생필품 같은 존재여야 하눈지. 없으면 불편하고, 있으면 당연한 사람이어야 하는지 생각했다. 정은은 가만히 앉아 있다가 결국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쇼핑앱을 열고 ‘3겹 무형광 화장지’를 검색했다.
흡수력 좋음. 먼지 적음. 도톰함.
후기가 괜찮은 제품을 몇 개 넘겨보다가 가장 무난한 것으로 골랐다. 너무 싸면 엄마가 질이 떨어진다고 할 것이고, 너무 비싸면 또 사치한다고 할 것 같았다. 적당한 가격, 적당한 품질, 적당히 불평할 여지가 적은 것. 늘 그렇듯 기준은 상대에게 있었다.
결제를 마치고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내일 도착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