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휴지는 사놔야지 (1)

장녀의 유통기한

by 안이온

“팀장님!”

커피숍 키오스크 앞에서 이대리가 정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 이십대 특유의 발랄함이 목소리에 묻어 있었다. 지하철 파업 때문에 늦었다며 생글생글 웃었다. 정은은 대꾸 대신 1리터짜리 텀블러에 커피를 받아 들었다. 회사 휴게실에도 무료 커피머신은 있다. 그래도 직원들은 하루 한 번쯤 1층 카페에서 제 취향의 커피를 산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내 돈 내고 내 입맛대로 살고 싶으니까.


몇 년째 단골인 정은에게는 눈인사도 안 하던 아르바이트생이, 이대리에게는 “좋은 하루 되세요” 하고 상냥하게 웃었다.

“어제 늦게 들어갔어?”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붙는 수다를 견디다 못한 정은이 물었다. 상사가 지각 이유를 묻는데 이대리는 소개팅 뒷이야기까지 술술 풀어놓았다.

“아니요오, 저녁만 먹었어요. 근데 그 남자도 너무하지 않아요? 아무리 그래도 번호는 물어봐야 예의 아니에요? 막말로 어제 저랑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그 사람인데, 제가 어디 가다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마지막 증인이라구요. 그러면 연락처라도 물어보고, 집에는 잘 갔는지, 오늘 즐거웠는지, 그런 인사는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머리가 다시 지끈거렸다.

적절한 템포, 쉬지 않는 호흡, 자기감정으로 세계를 꽉 채우는 능력. 누군가와 너무 닮아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4층, 7층에 멈췄다가 11층에 닿는 동안 이대리의 험담은 끝나지 않았다.

“제가 해산물 못 먹는다고 했거든요. 근데 자기가 일식집을 예약했다는 거예요. 아니, 물어보지도 않고? 그래놓고 제가 좀 난감해하니까 또 표정이 별로인 거 있죠. 그래서 제가 ‘괜찮아요, 다른 거 먹을게요’ 했더니 됐대요. 그냥 다른 데 가자면서 엄청 빨리 걷는 거예요. 제가 뭘 잘못했나 싶게.”

그때 복도 끝에서 사장이 걸어왔다.

젊은 사장은 분기별 부가세 신고 시즌에만 유난히 정시 출근을 했다. 그리고 꼭 트집 하나쯤 잡아야 퇴근하는 사람이었다.

“어디 나가세요?”

정은이 눈인사처럼 물었다.

“어. 이팀장, 오후에 나 좀 보자.”

꼭 저런 식이다.

시간도, 안건도 말하지 않고 사람부터 질리게 만드는 방식. 오늘도 분명 이미 지난 일을 다시 꺼내고, 이미 끝난 일을 왜 이렇게 했느냐고 따지고, 참조된 메일을 역순으로 뒤지며 사람을 궁지로 몰 것이다.

“아침에 회신 온 거 봤어?”

정은은 억지로 정신을 붙들었다. 지난달부터 그녀를 못 살게 구는 고객, 최인애 씨 건이었다. 새벽같이 메일을 보내놓고 아침부터 왜 답이 없느냐며 닦달하는 타입.

“아, 최인애 씨 진짜 너무하죠. 어제 밤 열한 시에 메일 보내놓고 오늘 아침에 왜 아직이냐고 하잖아요.”

“말이 되느냐가 중요해?”

정은이 낮게 말했다.

“디자인팀에 수정 사항 넘기고 일정 확인해. 몸은 늦게 와도 일은 되고 있어야지.”

이대리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 평소 같았으면 정은도 한마디 얹었을 것이다. 오늘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오전 중에 가능한지 다시 물어봐. 최인애 씨한테는 오늘 퇴근 전까지 전달드리겠다고 하고.”

이 건은 요즘 정은을 가장 지치게 하는 프로젝트였다. 상반기 론칭 예정이던 캠페인은 이미 전체 일정이 잡혀 있었다. 그런데 메인 시안 하나를 두고 한 달째 말이 바뀌고 있었다. 배경색을 바꿔보자더니, 모델을 남자에서 여자로 바꾸자더니, 패턴을 넣었다 뺐다, 실루엣 처리를 했다가 원본으로 돌아왔다. 이유는 늘 모호했다. “뭔가 허전하다.” “어딘가 애매하다.” 그뿐이었다.

“손과장님이 오늘도 어렵다고 하시는데요. 다른 일정이 너무 밀린대요.”

“언제 된대?”

“정확히는…”

“이대리.”

정은이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이 건을 이대리한테 넘겼는데, 디자인팀이랑 조율도 내가 하고, 마무리도 내가 하면, 이대리는 여기서 뭐 하게 돼?”

이대리가 입을 다물었다.

사실 디자인팀도 억울할 만했다. 한 달째 키비주얼 한 장 붙들고 색이 별로다, 글꼴이 별로다, 뭔가 허전하다를 반복당하고 있으니 누가 좋아하겠는가. 이대리 역시 그 사이에서 죄인처럼 손과장 옆에 붙어 쩔쩔매고 있었다. 기획자와 디자이너는 같은 편이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늘 한쪽은 사정하고 한쪽은 짜증을 받는다.

“이리 와봐.”

정은이 결국 이대리를 불러 옆자리에 앉혔다.

“최인애 씨가 지금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해봤어?”

“시안이 마음에 안 드는 거요?”

“아니.”

정은이 메일 화면을 띄운 채 말했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확신이 없는 거야.”

이대리가 눈을 깜빡였다.

“봐. 1차에서 고르고, 2차에서 또 고르고, 3차까지 왔어. 그럼 스타일은 이미 정해진 거야. 그런데도 계속 사소한 걸 건드리는 이유가 뭘까? 정말 색이 문제라서? 폰트가 문제라서?”

“…….”

“이 사람은 지금 ‘이게 최선이 맞냐’를 확인받고 싶은 거야. 자기가 최종 승인자도 아닌데 결정은 해야 하고, 윗사람한테 욕먹을까 불안하니까. 그래서 자꾸 손대는 거지.”

이대리 얼굴이 조금 달라졌다.

그제야 눈앞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보기 시작한 표정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유명 브랜드 레퍼런스 찾아.”

정은이 바로 답했다.

“코카콜라, 나이키, 디즈니처럼 대중 친화적인 브랜드에서 공공 캠페인 할 때 쓴 키비주얼. 깔끔하고 명료한 방향이 얼마나 보편적인지 보여줘. 컬러는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는 게 맞고, 폰트는 공익성과 친숙함을 주는 쪽으로 이유를 붙여. 그러면 취향 싸움이 아니라 논리로 넘어갈 수 있어.”

이대리가 그제야 웃었다.

“과장님은 다 알고 계시면서 왜 꼭 늦게 알려주세요?”

“그것도 다 때가 있어.”

정은이 컵 뚜껑을 닫으며 말했다.

“이대리가 충분히 부딪혀 봤으니까 이제 먹히는 거야.”

“그럼 오늘 수정은 안 해도 되겠네요?”

“아니지.”

정은이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수정은 해. 고객이 원했으니까. 대신 수정본을 보여주면서, 기존 안이 왜 더 나은지 설득해야지.”

이런 순간의 정은은 늘 빛났다.

사람 마음을 읽고, 상대가 원하는 말을 골라주고, 부족한 부분은 슬쩍 채워 넣고, 그래도 완전히 만족은 주지 않아서 다음번에도 다시 자신을 찾게 만드는 사람. 고객은 그녀를 찾았고, 사장은 그걸 알았고, 그래서 까다로운 프로젝트는 늘 정은 차지가 됐다.

문제는, 정은이 너무 잘 참는 사람이기도 하다는 점이었다.

유능하고, 성실하고, 말귀가 트이니 일은 점점 더 몰렸다.

결국 그녀는 늘 바빴다. 미친 듯이.

그런데 오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황이 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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