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녀의 유통기한
“정은아, 엄마 물 한 잔만 따끈하게 데워서 갖다줘.”
한창 예민하던 고등학생 시절, 엄마는 늘 정은이 현관 문을 열기가 무섭게 정은을 불러세웠다. 5분거리의 학교에서 친구들과 걸어오는 짧은 하교길을 하염없이 게으르게 걸어왔는데도 너무 빨리 집에 도착해버렸다. 정은은 최대한 천천히 신발을 벗었다. 가방을 현관에 떨어뜨리듯 내려놓고 터벅터벅 부엌으로 향했다.
"정은아, 엄마 말 들었어?"
엄마는 자주 아팠다. 특별한 병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늘 피곤하고 기운이 없고 누워 있는 날이 많았다. 가끔 청소를 하거나 요리를 하고 있는 날도 있었지만 그런 날에는 여지없이 화가 잔뜩 난 모습이었다. 왜 물건을 제자리에 둘 줄 모르는지, 어째서 항상 엄마가 이런 잡다한 것들을 다 정리해야하는지, 다 큰 자식들이 어쩜 이렇게 무심한지에 관한 넋두리를 터져버린 수도꼭지처럼 콸콸 쏟아냈다. 그리고 현관 발치에 엄마가 처리할 수 없는, 혹은 처리하고 싶지 않은 모든 것들을 쓰레기와 함꼐 몰아 두고는 뒷정리를 떠넘겼다. 그럼 먼지가 가득 묻은 채로 쌓여있는 정은과 정식의 소지품을 버려지기 전에 구원하는 것은 정은의 몫이었다.
티비 드라마에 나오는 엄마처럼 앞치마를 입고 산뜻하게 웃는 얼굴로 간식을 챙겨주는 자상한 여자들은 다 어디 사는 걸까. 냉장고에서 보리차를 꺼내 물컵에 따른다. 쫄쫄쫄 한줄기로 쏟아지는 물줄기를 보면서 한컵 가득 담으면 많다고 하지 않을지, 그렇다고 반컵을 답으면 너무 적어서 두번 와야 되지는 않을지 고민했다. 적당히 7부쯤으로 결정했다. 아니, 7부는 아무래도 조금 적어 보여서 아주 조금 더 따뤘다. 그리고 전자레인지에 물잔을 넣고 서서 기다렸다. 노란 불이 들어오고 투명한 접시가 돌아갔다. 전자레인지 앞에서 전자파를 받으면 몸에 안 좋다던 엄마의 잔소리가 떠올라 한발 옆으로 비켜섰다.
“아휴, 정은아… 너무 차갑잖아. 컵을 좀 만져보고 따끈하게 해오지. 엄마가 몸이 으슬으슬 추워서 그래.”
헝클어진 머리에 퉁퉁 부은 엄마가 물 잔을 받아들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정은은 말없이 물잔을 다시 받아들고 전자레인지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1분이면 되려나. 분명히 노란 조명이 켜져 있는데 전자레인지 문에 붙은 벌집모양 검정 무늬때문인지 작은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컵이 어둡게 보였다. 조리완료 알람이 울리기 1초전에 얼른 문을 열었다. 신경을 찌르는 전자음을 또 듣기 싫었다. 물잔이 뜨거웠다. 이제 된 것 같다. 여전히 교복 차림으로 현관에 내려놓은 책가방을 지나 다시 안방으로 갔다. 엄마는 다시 잠 든 것 같았다.
“엄마..”
엄마는 선잠이 들었다 깨면 다들 그렇듯이 몸을 부르르 떨며 눈을 떴다.
“어, 어… 인제 따끈해? … 앗 뜨거워! 정은아! 이거 너 마셔봤어? 너무 뜨거워서 먹을 수가 없잖아! 하…. 여기 찬물 두 방울만 타다줘. 엄마가 따끈한 물을 달라고 하면 네가 한 번 먹어보고 따끈하게 맞춰줄 수 있잖아. 엄마가 아프다는데 너는 어쩜 그래!”
침대에서 반쯤 몸을 일으킨 엄마는 말없이 물 잔을 다시 받아들고 나가는 딸의 등에 설움을 쏟아냈다. 정은은 계단 참을 떠올렸다. 여덟계단 아래 한걸음 반짜리 자투리 공간. 계단 난간이 둥글게 말려 손이 부드럽게 끼이는 곳. 반틈짜리 창문으로 하늘이 보이는 자리. 테라조 무늬 바닥 귀퉁이에 있는 반듯한 금색 네모. 그자리는 정은이 학교 뒷문을 빠져나와 느린 걸음으로 길을 따라오다가 계단을 올라와 현관을 열기 전 마지막으로 들르는 정거장이다. 정은은 언제나 거기에서 잠시 쉬었다. 손가락 네개가 딱 맞는 계단 난간 커브를 잡고 체중을 실어 빙그르 돌면서 보이는 창밖의 하늘과 바닥의 금색 테두리. 그리고 여덟개의 계단을 무겁게 눌러밟고 현관문을 여는 것이다. 그 순간은 마치 성냥개비가 꽉 들어찬 성냥갑에 걸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텁텁하고 까슬한 공기 속으로.
냉장고에서 꺼낸 찬물을 조금 섞었다. 그리고 마셔보니 미지근한 것 같았다. 다시 전자레인지에 넣어야할 것 같았다. 10초.
“인제 딱 좋네. 휴, 물 한잔 달라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니. 아이고 내 팔자야…”
엄마는 고맙다는 말을 참 이상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