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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Oct 04. 2020

배부른 정규직으로 산다는 것

<성장이 멈춰버린, 잘 나갔던 어른들>


정규직은 많은 걸 누리고 산다.

수백 대 1의 경쟁을 뚫고 정규직 기자이자 대기업 사원이 된 지 11년째. 처음 몇 년은 내가 누리는 것들에 대해 돌아볼 여유도 없이 새벽 출근 밤 퇴근을 반복하며 정신없이 보냈다. 기자들의 오래된 영웅담인 사건사회부 기자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보도국에서 쫓기듯 떠나 '뉴미디어뉴스국'이라는 생소한 부서로 발령이 났다. 그리고 생애 두 번째 파업이 끝나기 전까지 3년간 그곳에서 머물러야 했다.

뉴미디어뉴스국이 보도국과 가장 달랐던 점은 인력 구성이었다. 보도국은 TV 뉴스를 제작하는 주요 부서였기에 정규직 기자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뉴미디어뉴스국은 그 당시만 해도 보도국에서 만든 뉴스를 재가공하는 '변두리 부서'로 여겨졌기에 기자보다는 비정규직 기술 인력들이 훨씬 많았다. 그러니까 나는 나의 직종과 계약 형태가 소수에 속하는 부서에서 처음 일하게 된 셈이었다. 

새 부서에서는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던 부서원들의 계약 조건부터 일일이 파악해야 했다. 무기계약직, 2년 계약직, 파견직, 프리랜서, 인턴. 제각기 달랐던 조건에 비해 연령대는 신기하리만큼 편차가 심하지 않았다. 대체로 20대 중반에서 30대 초중반으로 비슷하게 젊은 편이었다. 당시 입사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았던 나는 보도국에서 하위 20%의 막내급이었지만, 뉴미디어뉴스국에서는 졸지에 상위 20%의 연장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나이 든 비정규직'은 법적으로나 가능한 조합일 뿐 방송국의 현실에는 거의 없는 존재였던 셈이다.

그런 환경에서 나는 그들보다 더 많은 책임과 권한을 가졌을 뿐 업무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은 일을 하며 3년을 보냈다. 길다면 긴 시간이기에 그 사이 인연도 정도 쌓아갔을 터이다. 그렇게 비정규직 동료들의 틈에서 섞여 살다가 뒤늦게 보도국으로 돌아와 보니, 예전에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정규직 동료 집단의 정서가 조금은 예민하게 감지되기 시작했다. 




먼저 감지된 건 동료들이 쏟아내는 불만에 묻은 기름기였다. 허기지지 않은 불만은 듣기 싫기 마련인데, 대다수 정규직 동료들이 그저 '더 잘 나가지 못해서' 불평을 토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수록 속이 더부룩해졌다. 그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을 절실하게 좇는 사람들의 얼굴이 그 뒤로 겹쳐 보이기 시작한 탓이다.

일상을 대하는 태도 역시 조금씩 불편하게 다가왔다. 비정규직들이 일상의 불안과 싸울 때 대다수 정규직들은 무료함과 싸우고 있었다. 비정규직들의 고민이 '인생 힘들다'로 수렴할 때 정규직들의 고민은 '인생 재미없다'로 수렴했다. 생존의 불안을 어느 정도 해소하면 삶이 더 생동할 것 같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흐르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고 무료한 일상을 걷어차버리기 위해 지금 누리고 있는 안정감과 혜택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정규직 동료들은 무료함을 달랠 비싼 취미, 이를테면 골프 같은 것들로 삶의 낙을 찾는 경우가 많았다.

무료함이 지배하는 집단은 성장판이 닫히기 마련이다. 간혹 '더 잘 나가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보였지만, 업무적으로 성장하거나 인격적으로 성숙하려 애쓰는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그럴 필요가 딱히 없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대기업 정규직의 삶이란 높은 자리를 탐내며 열심히 인맥을 쌓고 라인을 타는 소수와, 그저 정년까지 먹고사는 것에 만족하며 성장의 엔진을 스스로 꺼버리는 다수만 남게 되는 듯했다.

가장 씁쓸한 순간은 내가 사회초년생 시절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몇몇 선배들에게서조차 더 이상 아무런 영감도 얻지 못할 때였다. 한때 진취적이고 멋져 보였던 한 선배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 다시 마주하니 마른 우물 긁어대듯 깊은 과거에서 자부심을 긁어대며 살고 계셨다. 몇 년째 같은 화두만 반복하거나 왕년에 잘 나갔던 이야기를 지겹도록 늘어놓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났다. 다들 수백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치열한 기자초년생을 보냈던 만큼, 과거의 영화는 대화 소재로 연소하기 딱 좋은 공통분모였을 터이다. 반대로 미래에 관한 화두는 대화 주제에 오를 일이 거의 없었다.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을 미래에 대해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었다. 나는 늘 누군가의 미래가 과거보다 훨씬 더 궁금했기에, 오래 알고 지낸 동료들과의 대화에 시나브로 흥미를 잃어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렇게 다시 돌아온 보도국에서 예전 같은 소속감 대신 불편한 마음만 잔뜩 떠안은 채 여태껏 회사를 다니고 있다. 불편함은 스트레스의 주범이지만, 변화하고 성장할 시기라는 걸 알려주는 마음의 신호이기도 하다. 어차피 떠안게 된 불편함이라면, 배부른 정규직이랍시고 안정감에 취해 살았던 과거와 이별하는 계기로 삼고 싶은 마음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 역시 현실에 안주하며 나태한 일상을 보내는 정규직 1로 잔존하고 말 테니까.

먼저 내 불만에 낀 기름기부터 걷어내 보려 한다. 정규직의 좁은 문을 통과했다고 해서 몇십 년을 거저 보상받는 삶까지 합당하다고 여겼던 건 아닌지, 안정된 생활을 발판 삼아 더 성숙할 수 있었던 좋은 여건마저 스스로 걷어차며 살아온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 같다. 최소한 현실에 다리 꼬고 앉아 있으면서 단지 '지금보다 더 잘 나가지 못해서' 불평만 해대는 일상과는 이제 멀어지고 싶다.

무료함도 걷어내 보려 한다. 안정감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가장 축복받은 감정이라지만, 뭐든 지나치면 정서에 해롭기 마련이다. 적당히 먹고살고 있기에 치열할 필요도 없는 그저 그런 삶에 종속되고 싶지는 않다. 성공한 직장인이기보다 성숙한 인간이고 싶고, 매년 볼 때마다 조금씩 더 나아지는 사람이고 싶다. 적어도 누군가의 눈에 지루하게 사는 사람으로,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것 없는 맥 없는 인생으로 비춰지고 싶지는 않다.

마지막으로 과거를 향한 입을 닫으며 살아보기로 했다. 나의 과거는 대체로 만족스러웠지만 그래도 현재가 더 즐거운 사람이었으면 한다. 누군가에게 '한때 잘 나갔던' 인물로 기억되기보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사람으로 남아 있고 싶다. 일단 주변인들에게 자꾸 과거 얘기 꺼내는 습관부터 줄여야 할 일이다.

이렇게 종알거려놓고 보니 불현듯 몇몇 예외적인 동료들에게 미안해진다. 우리 직장에도 과거보다 현재가 더 멋있는 동료들이 있다. 많지는 않지만 분명히 있긴 있다. 앞으로 내가 배부른 정규직의 지위를 얼마나 더 누리게 될진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그동안만큼은 그런 소수의 동료들의 건강한 삶을 좇으며 직장생활을 하고 싶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사실 그저 따분하게 살진 않겠다는 얘기다. 변해야 어른이고, 생동해야 삶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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