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묭 Apr 17. 2022

마음의 이삿날

<그리고, 101번째 글>


 일요일 한낮.

 비현실적으로 맑은 하늘이었다. 정서향 집인 첫서재의 통창으로 흰 소금 같은 햇살이 하염없이 쏟아 내렸다. 눈이 멀 것처럼. 신이 온 것처럼.

 불현듯 정신이 혼미했다. 다행히 손님은 모두 떠나고 없었다. 앞마당과 가게 앞 골목에 혹시 뒤늦게 찾아올 손님이 계시진 않을지 확인하고 나서, 나는 펑펑 눈물을 쏟았다.

 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침부터 그랬다. 매주 일요일마다 배달하던 글. 약속한 100번째 배달을 막 마치고 나서부터였다. 첫 글을 올리던 날부터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목숨을 부지하는 한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로 하고 2년 가까이 매주 꼬박꼬박 글을 올렸다. 자정이 넘도록 야근하고 온 밤이면 새벽까지 식탁에 불을 켜고 앉아 썼고, 먼 지방 출장을 갔을 때도 여관방에서 휴대용 블루투스 키보드를 펴고 앉아 썼다. 주말 술자리에서 거나하게 취해 돌아왔을 때도 정신을 부여잡고 썼다. 단 한 주라도 거르면 모든 게 흐트러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강박에 사로잡혀 보낸 2년 가까운 날들이 막 마침표를 찍었다. 뿌듯했을까? 허탈함이 집어삼켰다.

 얼음조각 세공하듯 며칠을 깎고 다듬던 지난 글들과 달리, 100번째 글은 세상에 내어놓기까지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글의 완성도보다 그 후련하고 가벼운 심경을 읽는 이들에게 전이하고 싶었다. 발행 버튼을 누르고, 업로드를 눈으로 확인하고, 앱을 끈 뒤 첫서재에 출근할 채비를 마쳤다. 아마 오늘은 한 번은 울고 말 거야, 라고 그때부터 직감했다. 나는 나를 비교적 잘 안다.

 마치 마음의 이삿날 같았다. 이삿짐을 전부 싸서 내보내고 텅 빈 집안에 홀로 남은 기분. 잊은 건 없는지, 두고 가는 건 없는지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시간이었다. 진공 상태의 마음에서 텅텅, 어디에도 흡수되지 못한 소리가 울려 퍼지다 되돌아왔다. 약속은 떠났다. 글도 떠났다. 이제 나만 떠나면 된다. 다시는 이 마음에 발붙일 일은 없을 것이다.

 전날 밤부터 꼬박 지난 댓글들을 돌려 읽었다. 몇 시간에 걸쳐 전부, 하나도 빠짐없이 다시 읽어 내렸다. 떠나기 직전, 그간 외롭지 않았다고 확인하는 의식이었다. 박수받고 싶었다. 관심받고 싶었으니까. 여덟 살부터 스물여덟까지, 20년 넘게 혼자만 써오던 글을 어느새부터 누군가에게 공유하기 시작한 까닭도 다 그런 것이었다. 내 글이 타인에게 스며들 수 있다고, 내 생각이 나만의 생각은 아니라고 확인받고 싶었다. 왜 확인까지 받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타고난 기질이었을까.

 그래도 이렇게까지 울 일은 아니었는데. 애써 다른 탓을 찾아본다. 그래, 어쩌면 참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하필 나의 글쓰기와 아무 상관없는 편지 한 통이 슬픔의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이른 오후, 여덟 살 딸과 함께 첫서재를 찾은 어느 여성이 남기고 간 편지였다. 그녀는 미혼모였다.

 ‘여전히 너는 이 아이가 궁금하지도 보고 싶지도 않을까? 너와는 상관이 없는 아이라 생각할까? …… 처음에는 죽을 만큼 너를 미워했고, 원망했고, 욕했어. 나도 사람이니까. 그런데 아이를 키우고 보니 내 그런 감정들이 아이에게 전해질까 싶어서, 나는 그때의 너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보았어. 그런데 아빠의 부재를 슬퍼하는 내 아이를 보니 그것도 쉽지 않더라.’

 편지가 어서 끝나기를,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덜덜 떨리는 손에서는 그녀가 차분히 남기고 간 언어가 분노로 발화하고 있었다. ‘혹여라도 내 아이가 훗날 널 찾았을 때 마음 아파하지 않게 꼭 잘 살아 줘.’ 그녀는 어른스럽게 당부하며 편지를 매듭지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나와 만난 적도 없고 나를 해한 적도 없는 아이의 아빠가 부디 잘 살고 있지 않기를, 뼛속까지 괴로움이 스미어 있기를 바랐다.

 편지를 덮고 바깥 창문을 바라보니 햇살이 눈부시게 들이닥치고 있었다. 찌푸린 눈에 이내 눈물이 차올랐다. 결국 편지 탓을 하면서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미혼모의 사연이 슬펐던 게 아니다. 받은 편지를 내 능력으로 어찌하지 못해서 슬펐다. 평생 남몰래 혹은 남에게 보이게 글을 써왔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신비하고 감동적인 일들을 온전히 글로 소화해낼 역량이 없었다. 나는 나를 비교적 잘 안다. 그게 못내 한스러웠다. 중요한 순간 늘 한 뼘 모자라는 필력과 감수성을 실컷 원망하다가, 어느 지점부터는 어린아이처럼 입술을 앙 다물었다. 그래도 다 기억할 거야. 다 기록할 거니까. 100주의 글 배달에서 해방된 날이었지만 그렇게 나는 다시 펜을 들었다. 잘 쓰진 못할지라도 쓰긴 써야지, 되뇌면서.



 어느새 저녁이었다. 가게 문을 닫을 무렵이지만 여전히 해는 지지 않았다. 아직은 어색한 밝은 퇴근길. 조촐한 쫑파티를 하기 위해 치킨 한 마리에 막걸리를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그동안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를 듣고 싶었다. 아침에 올려둔 100번째 글을 다시 읽어 내렸다. 반나절 사이 서른 명 넘는 분들이 정성껏 댓글을 달아주셨다. 그냥 지나쳐도 아무렇지 않을 글에 굳이 다정함을 묻혀주고 간 사람들. 나는 길 반대편에 누가 오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금 눈을 잘근거리며 살펴야 했다. 온종일 해밝은, 오직 시야만 과습한 하루였다.




 나흘 뒤 아침.
 가게 청소를 하다가 풀썩, 쓰러졌다. 갑자기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허리가 죽을 듯이 아팠다. 그냥 아픈 게 아니라 손가락 하나 까딱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병원에 가기 위해서는 카운터에 있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야만 했다. 나는 카운터를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극심한 통증이 온몸을 덮쳤다. 손을 바닥에서 떼는 순간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서, 손가락을 땅에 붙인 채 꿈틀거려가며 기어갔다. 불과 5m도 되지 않는 거리를 20분이 넘게 걸려서 도착했다.

 겨우 응급실에 실려가 X-ray를 찍고 십수 시간을 옴짝달싹도 못 한 채 누워 있었다. 밤이 늦어서야 의사선생님이 돌아왔다. 급성 허리디스크가 터진 것 같다며 다음날 MRI를 찍어보자고 했다. 최소 한 달 이상은 누워만 있어야 할 거라고, 어쩌면 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아직 젊으니 재활치료 만으로도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래도 다 낫기까지는 족히 몇 달은 걸릴 거라고도.

 새벽에 집으로 돌아온 뒤 지금까지 며칠 째, 그렇게 누워만 있다. 이 글도 처음으로 키보드나 종이가 아닌 스마트폰으로 누워서 끄적이고 있다. 온종일 책을 읽다, 스마트폰을 뒤적이다, 하얀 천장을 응시하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든다. 자는 게 지겨울 법도 한데 통증을 완화하는 약을 먹으면 어김없이 다시 잠이 쏟아진다. 비몽사몽한 기운에 취해 나는 지난 한 주를 돌이킨다. 내 생의 행로를 통째로 뒤흔들거나 뒤바꾼 100주의 글쓰기. 그 긴 여정을 마치자마자 나는 이렇게 앓아눕는 신세가 되었다. 신기하게도 한 시절이 지날 때마다 통과의례를 세게 앓는 징크스를 평생 달고 살아왔다. 수능을 볼 때도, 군입대할 때도, 첫 직장에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크게 다치거나 병을 앓아 매번 병원신세를 졌다. 이번에도 어김없었다. 명백히 나의 한 시기가 지나고 있다고, 지나온 날들이 단단히 일러주고 있었다.

 그래도 그사이 등 뒤에서는 또 다른 시기가 다가오고 있을 것이었다. 마음의 이삿짐을 풀어둘 새로운 공간 또는 순간 말이다. 내 마음이 머물 새집은 창작의 집이었으면 좋겠다고, 불현듯 생각했다. 새가 날아들고 파도가 들락거리는 환상의 섬. 다음 달부터는 창작글을 써보기로 결심한 만큼, 새로 이사한 집의 내부는 이런 온갖 상상들로 채워 넣고 싶다. 생전 처음 겪는 급성 허리디스크를 안고 출발했지만, 이 집을 다시 비워줘야 할 즈음에는 모든 게 깨끗이 낫기를 바라본다. 속된 아픔은 사라지고 순도 높은 눈물과 뭉근한 감동만이 남기를.

 소박한 기원을 담은 조촐한 집들이에 당신을 초대하기 위해, 또 이렇게 101번째 글을 남긴다. 우리가 매주 연결되었던 일요일 오후에. 별 다를 것도 없이.










매거진의 이전글 100번째 글, 이제 배달을 마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