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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Nov 01. 2020

휴직하고 춘천 살러 갑니다

<‘어른의 봄방학’ 프롤로그>


저는 11년 차 방송기자입니다.


꽤 이름난 언론사에서 비교적 안정된 삶을 누리며 어찌어찌 살아가고 있지요. 삶을 '누린다'는 감사한 표현을 하기까지는 물론 제 노오력보다 선천적으로 제게 유리했던 조건들, 이를테면 서울 출생, 남성, 안정된 가정 같은... 거기에 후천적으로 더해진 운이 더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걸 인정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요.


이제 서른아홉 살. 삶이 초등학교라면 ‘4학년 입학’쯤을 눈 앞에 두고, 저는 혼자만의 봄방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내년 봄이 열리면, 생애 첫 휴직을 하거든요.


휴직 사유는 단순합니다. 다르게 살 준비를 하고 싶었어요. 서점에 가면 일단 퇴사하고 봤다는 분들의 책이 많더군요. 전 그만한 배포도 절실함도 없기에 모색의 시간을 두려 합니다. 다행히 휴직 기회를 주는 회사에 다니고 있기도 하고요. 앞으로 1년 반의 휴직 기간 동안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동시에 회사 바깥의 삶을 기획해 볼 참입니다. 그런 다음 늦어도, 40대가 끝나기 전에는 어떤 조건도 없이 회사를 그만 둘 겁니다. 그리고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먹고살아보려 해요. 1년도 아니고 무려 '10년 내 퇴사'를 예고하는 게 좀 우습긴 하지만요.


왜 관두냐건 그저 웃고 싶습니다. 이유야 있지만 설득력이 없어 보이거든요. 무엇보다 저는 제 회사를 몹시 사랑하고, 제 직업도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그런데도 그만두고 싶다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요. 아무리 격조 높은 집도 오래 머물면 다른 데서 살아보고 싶듯, 그저 다른 삶도 궁금하고,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더 솔직해지자면, 못해보고 죽으면 후회할 것 같은 꿈들이 안정감에 취해 있던 저를 쿡쿡 찔러댔답니다. 마흔을 앞두고 꿈이라니 남사스럽긴 하지만 어쩌겠어요.


그리고 아무리 회사와 직업을 사랑해도, 어딘가에 속박되어 있다는 찝찝함이 직장생활 내내 저를 괴롭혔습니다. 큰 조직에 속해 있으면 명품 옷을 두른 기분이 들지만 그 속에 숨은 몸뚱이는 거듭 초라해지기만 하더군요. 사람들이 부러워할수록 나는 작아지고, 진짜 내 모습이 아니라는 부끄러움만 도리어 부풀어갔습니다. 저를 자랑스럽게도 하고 구속도 하는 두터운 외투를 훌훌 벗어버리고 그냥 솔직히 나는 이 정도 사람이야, 라고 시원하게 외치고 싶은 충동은 단 한 번도 직장생활에서 완벽히 삭혀지지 않았어요.


또 하나 덧붙이자면, 이 안정된 삶이 얼마나 갈지 모른다는 위기감도 저의 결심을 부추겼습니다. 언제까지 내 회사가 든든할까요. 가족도, 직업도, 지금은 영원할 것만 같은 모든 부류의 안정감들도 하루아침에 증발할 수 있겠지요. 위화의 소설 <인생>을 읽으며 학습한 두려움이기도 해요. 믿었던 회사가 망하거나 나를 먼저 쫓아냈을 때, 혹은 다른 안정감들이 불현듯 저를 배신했을 때 닥쳐올 초라함을 열심히 방어만 하며 살다 죽긴 싫었습니다. 잃을 게 많아지면서 불안에 끌려가듯 사느니, 불안마저도 스스로 선택하며 사는 게 낫겠단 판단이 들었죠. 


그렇게 마흔 살이 다가왔습니다. '40대가 저물기 전엔 회사를 그만둔다'는 대원칙과, '휴직을 한 뒤 틈틈이 다른 삶을 기획해본다'는 실행계획과 함께 말이죠.




휴직은 내년 봄부터 시작될 예정이니, 지금부터 겨우내 쓸 글들은 휴직생활의 프리퀄쯤 될 것 같습니다. 휴직을 결심한 뒤부터는 객관식 답안지가 없는 선택의 연속이었어요. 우선 ‘어디서 살지’부터 먼저 결정해야 했지요. 아일랜드부터 몰타, 제주까지 지구 한 바퀴를 (머릿속으로) 돌고 돌아, 저희 가족은 강원도 춘천에서 머물기로 결정을 내렸답니다. 머물 도시를 결정하는 데에만 꼬박 1년이 걸렸어요. 왜 하필 춘천인지, 그럼 거기서 뭘 작당할 건지, 다음 글부터 차례차례 써보겠습니다.


다가올 봄은 이 하늘 아래에서.


마지막으로 제 휴직기를 굳이 매거진으로 연재하는 이유를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제가 기획하는 휴직살이에는 많은 꿈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직장생활이 돈을 벌기 위한 사투였다면 이번 휴직은 돈이 아닌 다른 것들을 벌어보고자 떠나는 여정이거든요. 곧 연재할 글에서 차례차례 밝히겠지만, 지금부터는 타인의 푹 익은 삶 또는 갓 여물어가는 햇생각들을 수집해 특정한 공간에 묶어두는 일이 제겐 가장 절실한 과업이랍니다. 그 공간은 책이 될 수도, 영상이 될 수도, 곧 춘천에서 문을 열 공유서재가 될 수도 있겠지요. 따라서 남들이 귀 기울여주지 않는다면 저의 휴직 프로젝트는 철없는 어른의 민망한 시간낭비로 끝나고 말 거예요. 그게 제일 두렵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렇게라도 멋쩍은 초대장을 띄웁니다. 다른 SNS는 이제 막 시작한 터라 저에겐 아직 여기밖에 없거든요. 물론 응답할지는 받는 이의 몫이겠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먼 우주에 전파를 던지듯, 저만의 교신소에 꾸준히 글을 올려두고 기다리는 것뿐일 테니까요. 이러다 보면 어느 순간, 우연히 누군가와 이어져 뭐라도 함께 나누거나 더하는 사이가 될지도 모르잖아요? 커다란 우주에서 무심코 연결되어 물질을 빚어내는 기특한 원소들처럼요. 화학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이번 연재가 쏘아올리는 작은 공이 어디까지 가게 될지, 어디쯤 툭 하고 떨어질지 저도 몹시 궁금합니다. 그래도 이왕 시작한 거 진심을 다해 쓰고, 있는 힘껏 ‘춘천 프로젝트’를 발동하려 해요. 부디 저와 인연이 되어주세요.


http://instagram.com/first_booksal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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