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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Nov 08. 2020

몰타에 살까, 춘천에 살까?

<직장인의 휴직살이, 일단 살 곳부터 정해보자>


1년 반 가량 휴직하기로 결심한 뒤 가장 서두른 일은 어디서 살지 정하기였습니다. 어디서 살지부터 정해야, 거기서 뭘 할지 궁리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처음에는 해외살이를 꿈꿨어요. 그나마 할 줄 아는 외국어가 영어뿐이라, 일단 영어로 의사소통이 되는 나라부터 생각해봤습니다. 가장 먼저 생각난 나라는 영국과 아일랜드였어요. 제겐 취향의 집결지와도 같은 나라들이었거든요. 문학이며, 음악이며, 맥주며, 축구라니요. 특히 아일랜드는 일부러 가지 않고 아껴둔 여행지였답니다. 가장 맛있는 음식을 가장 늦게 먹고 싶듯이 말이죠. 여행으로 다녀오기보다는 언젠가 푹 살아보겠다고 꿈꾸던 나라였어요.


더블린은 걸어다니면 다 이렇다던데 사실인가요?


그러나 한 달만에 꿈을 접었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부담스러운 비용 탓이었어요. 영국은 사실 예상했다지만, 아일랜드 역시 다녀온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집세와 생활 물가가 상상 이상이더군요. 아이 교육비용도 런던 못지않았고요. 1년만 살아도 억 소리가 나던데, 1년 반 이상 머물기에는 저희의 제한된 예산으로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다음부터는 예산을 더 줄여볼 생각으로 다른 나라들을 하나씩 물색했습니다. 여행을 다녀와본 곳들 중에서 1순위는 에스토니아였어요. 나흘 가량을 머물렀던 적이 있는데 살기에 이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환경과 IT를 중시하는 국가의 가치관도 좋았고, 이방인에게 개방적인 분위기도 좋았습니다. 영어로 의사소통이 수월했다는 점도요.


동화의 도시 탈린 - 바다에 코끼리가 사는 패르누(2017년 여름)


그러나 또 벽에 부딪혔습니다. 이번에는 교육과 날씨가 발목을 잡았어요. 국제학교 입학 절차가 생각보다 까다로웠고, 비용도 예상을 뛰어넘더군요. 게다가 지인인 핀에어 승무원 분께서 에스토니아의 무시무시한 추위에 대해 거듭 강조를 해주셨어요. 추위를 즐기는 저야 문제 될 것 없었지만, 추위를 지독히 싫어하는 가족구성원이 있어서 못내 걱정이 됐습니다. 저희가 갔을 땐 여름이어서 마냥 시원하기만 했거든요.


그러던 중 눈에 들어온 나라가 몰타였습니다. 저희가 고민하던 문제들이 한꺼번에 해결되는 나라가 지중해 한가운데 있더군요. 제주도의 반의 반도 채 되지 않는 도시국가 몰타는 알아갈수록 매력적이었습니다. 영어를 공용어처럼 사용하고, 날씨도 온화하며 맑은 날도 유난히 많더라고요. 역사가 깊어 빈티지한 도시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고, 여행자들도 많아 이방인이 편하게 머물 수 있는 환경까지 갖춰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치안도 좋다고 하고, 무엇보다 다른 영어권 국가들에 비해 생활비와 교육비가 저렴해 보였지요.


여기 어딘가에서 점으로 살고 있으리란 꿈을...!


그렇게 몰타행을 결정하고,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이민박람회에 유학원까지 가서 상담을 받고 저희 예산에 맞춰 살 동네를 알아봤어요. 구글맵으로 본 발레타(몰타 수도)의 골목들과 부둣가의 시원한 풍경에 이미 흠뻑 빠져버렸죠. 마음만큼은 이미 몰타주민이 되어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두 가지 고민이 끝까지 결심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역시 돈이었어요.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싸다는 것뿐이지, 해외살이는 구체적으로 계획할수록 예산이 자꾸 늘어나더군요. 1년 반 동안 아무리 아껴 써도 억 소리가 났고, 그 돈을 다 소비하고 오면 회복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어요. 퇴사 이후의 삶을 모색하기 위해 휴직을 준비했는데, 돈을 다 쓰고 오면 오히려 회사에 더 발을 묶이게 될 것만 같았답니다. 두 번째 문제는 꿈이었습니다. 그동안 꼭 해보고 싶었지만 회사생활하느라 꾹꾹 눌러둔 삶들이 있었는데, 정작 외국으로 가면 실현하지 못할 성질의 것들이었거든요. 물론 해외살이도 또 하나의 꿈이긴 했지만, 기회비용으로 포기해야 하는 한쪽의 꿈이 자꾸 저의 반대쪽 귓불을 간지럽혔어요.  


그러던 와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외국 가서 써버릴 돈으로 차라리 지방의 오래된 집이나 폐가를 살까?’


한밤 중에 떠오른 아이디어였어요. 해외 대신 지방살이를 하면, 색다른 삶도 살아볼 수 있으면서 동시에 그동안 꿔왔던 꿈을 조금이라도 실현해볼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잠을 미루고 바로 스마트폰을 열었죠. 검색을 해보니, 해외에 살 정도 예산이면 작은 폐가를 매입해서 깔끔하게 고치고도 남겠더라고요. 그날 밤 저는 부동산 블로그에 올라온 전국의 폐가를 뒤지느라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외살이의 꿈을 쉽게 접기는 아까웠기에 며칠간은 잠 못 이루는 밤이 되풀이됐지요. 그냥 비행기 타고 떠날까? 아니야, 무리야. 근데 지금 아니면 언제 해외에 살아보겠어? 아니야, 한국에서 할 수 있는 게 더 많을 거야...


그러던 올해 초, 바다를 넘나들던 저의 고민은 강제로 말끔하게 해결되어버렸습니다. 코로나, 이 고마운 쉒이…


어차피 해외 출국이 막혀버리니 홀가분하더군요. 선택지가 지구본에서 한반도 지도로 확 줄어들었으니까요. 이제 어느 지방에서 살지만 결정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첫 번째 떠오른 도시는 통영이었어요. 저의 유별난 통영 사랑은 브런치에도 몇 번이나 과시했는데요. 연고도 없는 통영 자랑을 시작하자면 줄이고 줄여도 한 바닥은 늘어놓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눈으로 본 가장 아늑하고 아름다운 항구. 그 항구를 봉긋 감싸 안은, 이름마저 예쁜 두 ‘피랑'. 최대 어획량의 도시다운 싱싱한 해산물 내음에 높은 일조량. 동네 책방이 있는 예쁜 마을. 무엇보다 박경리 김춘수 유치환 윤이상 백석 이중섭 님의 숨결이 묻은 예술가의 도시... 으악, 또 길어졌어요;;;


제게 영감을 안겨준 고마운 <봄날의 책방>.


통영 동네건축가이자 로컬 크리에이터이신 <봄날의 책방> 주인장님께 상담도 받으러 가고, 오래된 집들도 부동산을 통해 알아봤습니다. 그러나 몇 달의 고민 끝에 포기하고 말았어요. 그 사이 가족구성원 한 분이 주말 직업을 얻었기 때문인데요. 평소 꼭 하고 싶었던 일을 드디어 직업으로 갖게 된 그분께 ‘내년에 일을 중단하고 나와 통영으로 가자’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빨라도 가는 데만 4시간이 넘게 걸리는 도시를 주말마다 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요. 결국 ‘주말마다 서울을 오갈 수 있는 지방'으로 선택의 폭을 좁혔습니다.


일일생활권으로 한정하니 도시 후보가 확 줄어서 한결 편하더군요(합리화의 달인). 처음엔 제주를 생각해봤지만 비싼 왕복항공권을 매주 감당하기는 힘들 것 같았어요. 게다가 비행은 날씨 사정이 운항을 좌우하는 탓에 아무래도 불안했죠. 자주 놀러다니던 강화도도 고려해봤습니다. 그러나 평소 너무 자주 다녀서 호기심이 줄어든 데다, 서울과 지나치게 가까워 새로운 기분을 느끼지 못할 것만 같았어요.


마지막까지 가장 고민했던 곳은 속초입니다. 바다가 있는 도시 중에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고, 고속도로가 뚫려 서울까지 멀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주말마다 서울양양고속도로를 오가며 빈 집도 알아보고 동네 분위기도 살폈습니다. 그러나 결국 또 마음을 접어버렸어요. (벌써 몇 번째 접히는 마음인지 거의 딱지 수준…)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요. 일단 관광도시라 물가가 너무 비쌌어요. 일일 관광객 수가 시 전체 인구와 맞먹는 도시라 실생활 물가마저 관광 물가에 맞춰져 있더군요. 또 여행지로서의 매력과 ‘살고 싶은’ 매력에 간극이 느껴졌어요. 딱히 머물고 싶다는 기운을 주는 동네를 찾지 못했거든요. 너무 분주하거나, 너무 외진 곳뿐이었죠. 마지막으로, 역시 매 주말마다 오가기에는 여전히 좀 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어요.




결국 선택은 한 곳으로 수렴했습니다.

‘봄’을 이름에 담은 유일한 도시, 춘천. 


생각 많이 해봤는데, 나 너 밖에 없더라..


어쩌면 이 도시에 살고 싶어 이제껏 핑계를 댔는지도 모르겠네요. 춘천은 기차로 서울까지 한 시간이면 도착했고, 고속도로도 뚫려 다니기 편했어요. 여러 차례 여행을 다니며 구석구석 정이 든 도시이기도 했고요. 대학교가 많아 젊은 활기도 유지되는 듯했고, 호수로 둘러싸인 자연풍경은 두 말할 필요도 없었지요. 무엇보다 꼭 머물고픈 동네가 하나 있었어요. 100년 넘은 성당이 있는 봉긋한 언덕 마을에요.


그렇다고 쉽게 결정을 내린 건 아니었답니다. 가장 큰 망설임은 바다의 부재였어요. 바다마을에서 일기쓰듯 살고 싶은 욕심을 버리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그렇지만 도시를 감싼 드넓은 호수들이 ‘우리가 너의 바다가 되어줄게’라고 저를 설득하는 것만 같았어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호숫가에 누워 있거나 자전거를 타고 달릴 수도, 나무 카누에 올라 노를 저을 수도 있는 도시는 흔치 않을 것 같더군요. 의암호 한가운데 둥둥 떠서 한참 ‘물멍’을 하다 보니, 바다에서 누릴 수 있는 대부분의 행복이 대체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어요.


가장 행복한 취미, 카누타기.


또 한 가지 망설임은 기후였답니다. 서울보다 북쪽이라 겨울엔 더 추운데다, 분지 지형이어서 여름엔 더 덥다고 하더라고요. 미세먼지 수치도 생각보다 높았고요. 그러나 갈 때마다 저를 맞이했던 특별한 볕의 기운이 기후에 관한 잡다한 고민을 스르르 녹였어요. 낯선 여행지에서 뜻 모를 아늑함을 느끼는 순간이 있지 않나요? 저에겐 그게 바로 통영과 춘천이에요. 대학 시절 3년간 동거했던 룸메이트가 춘천 출신이었는데, 놀러 갈 때마다 친구 부모님께 배 터지도록 푸짐하게 닭갈비를 얻어먹고 왔답니다. 20대 후반에는 첫 직장 동료들과 무작정 의암호를 찾아, 호숫가 잔디밭에서 셋이 머리를 맞대고 누워 낮잠을 청하기도 했지요. 이번 직장으로 옮기고도 며칠간 쉼이 필요했을 때 발길이 향해졌던 곳이기도 해요. 그런 정다운 기억더미들이 ‘기후 따윈 괜찮아’라며 설익은 불안을 진정시켜주었습니다. 마치 운명의 사랑을 만날 때면 포근함에 취해 조건 따위는 계산되지 않듯이요.




이런 지난한 과정을 거쳐 살 도시를 정했답니다. 글로 적으니 이 정도지만, 결심하기까지는 두 번의 봄과  번의 겨울이 꼬박 필요했어요. 어쨌든 봄의 도시에서 내년 봄부터 살기로 마음을 굳혔으니, 이제 구체적으로 머물 동네와 살 집을 알아볼 차례겠지요. 먼저 나름대로 기준을 정해두었습니다. 아늑한 동네의 오래된 집일 것. 그리고 지역만의 무언가가 스며 있다고 느껴질 것.


그런 동네 찾기는 의외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주에 풀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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