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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Nov 15. 2020

라일락 나무와 파란 지붕 아래 살기로 했다

<직장인의 휴직살이 : 마을과 집 고르기>


사는 동네를 옮긴다는 , 하나의 세계를 옮기는 일이겠지요. 머무는 곳이 달라지면 사람의 생애도 통째로 뒤흔들리니까요.

저는 그런 변화를 거의 실감하지 못하며 살아왔습니다. 기억이 닿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스무 살까지 오직 한 집에서 살았거든요. 스무 살 이후로는 다니던 대학 근처에 터전을 마련했고, 지금까지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어요. 그러니까 서른아홉 해를 살면서 단 한 차례만 저를 둘러싼 세계가 뒤흔들렸던 셈이죠. 같은 동네에서 꾸준히 시절을 보냈다는 안정감은 선물과도 같은 행운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보다 다채로운 세계에서 살아봤더라면 지금보다 생이 더 역동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살다가 한 번쯤은, 저의 머물 곳을 온전히 스스로 정해보고 싶었답니다. 도시 거주자들은 대개 자신의 거처를 지정당하며 살게 되죠. 어릴 적에는 부모님이 정해줄 테고, 대학생이 되면 대개 학교 근처에 머물러야 합니다. 졸업하고도 직장과 가까운 곳, 아이 어린이집 가기 편한 곳, 지하철역이 가까운 곳, 그게 아니라면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머무는 곳 등등의 조건들에 얽매여 살 곳을 정하고요. 거기 꼭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거기 살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내년 봄부터 시작될 휴직생활은 귀하디 귀한 기회였어요. 이번만큼은 다르고 싶었거든요. 머물 곳을 온전히 자유의지로 선택할, 어쩌면 단 한 번뿐일지도 모를 기회라고 여겼습니다.




봄을 이름에 담은 유일한 도시, 춘천에서 휴직생활을 보내기로 결심한 뒤로는 그래서 머물 동네를 알아보는 데 온 정성을 쏟았답니다. 춘천에도 저마다 다른 색깔의 동네들이 많았으니까요. 우선 기준부터 정해봤어요. 동네는 아늑했으면 좋겠고, 집은 오래될수록 좋았습니다. 고쳐서 살아보고 싶었거든요. 처음에는 전원생활을 하고픈 욕심에 춘천 외곽지역부터 살펴보기 시작했어요. 두 마을이 오른쪽 뇌에 착 달라붙더군요.

첫 마을은 김유정역에서 내리면 나오는 '실레마을'이었습니다. 기차역 이름부터 김유정역이라니, 벌써 ‘이름이 다 했다’는 느낌을 주지 않나요? 알고 보니 사람으로 이름 지은 유일한 기차역이라더군요. 스물아홉에 요절한 천재 소설가 김유정이 태어나고 자란 마을이었어요. 이름만 들어도 <봄봄>하고 <동백꽃>이 필 것 같고 점순이가 감자 세 개를 건네줄 것만 같았지요.


김유정역에 최근 들어선 로스터리카페 <더웨이>.


두어 번 찾아간 실레마을에는 이미 소박한 책방과 널찍한 카페가 들어서 있었답니다. 아이가 다닐 아담한 시골 초등학교도 있더군요. 모든 게 마음에 드는 동네였지만 문제는 집이었어요. 고쳐 쓸만한 옛집이 좀처럼 매물로 나오지 않았거든요. 새로 건축된 전원주택이나 땅은 종종 매물로 나왔는데 우리 예산 밖의 일이었죠. 한 번은 고택 하나가 싼값에 나왔다기에 얼른 찾아가 봤더니, 바로 옆에 우사가 있어 냄새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어요.

또 다른 동네는 시내에서 의암호를 건너면 나오는 금산리 '박사마을'이었습니다. 한적한 시골마을인데 유난히 박사가 많이 배출돼 그런 이름이 붙었다더군요. 게다가 최근 들어서는 개발이 진행되면서 여러 문화시설까지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애니메이션 박물관, 도서관, 문학공원, 창작개발센터가 차례로 생겼어요. 문화생활을 즐기며 아이 키우기에 더없이 좋아 보였고, 무엇보다 의암호를 바라보는 전경이 압권인 마을이었어요. 게다가 곧 새로운 도로(제2 경춘국도)가 들어서기로 확정되어 있었고, 인근 섬에 레고랜드 공사까지 진행되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어요. 이미 땅값이 오를 대로 올라 시내 버금가는 수준이 되어버린 거죠. 또 문화시설이 비교적 최근 들어섰기에 아직 마을의 정체성으로 섞이지 않은 느낌이 들었어요. 문화를 앞세운 거대한 건물들과 고즈넉한 마을 풍경의 질감이 제게이질하게 와닿았거든요.

그러다 시내로 눈을 돌려봤습니다. 다행히 시내에도 번잡하지 않은 동네들이 있었어요. 처음에는 강원대학교 주변인 효자동을 알아봤답니다. 성인이 된 뒤로 20년 가까이 대학교 인근에서만 살아서 그런지 뜻 모를 안정감이 느껴지더군요. 학생들이 많아 거리의 활력도 넘쳤고요. 하지만 이미 원룸촌이 빽빽하게 들어선 모습에 이내 생각을 거두어들였어요. 짧은 휴직기간에라도 네모난 건물이 최대한 안 보이는 곳에서 머물고 싶었거든요. 그런 동네가 시내에 있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하나 남아 있더군요. 그것도 시내 정가운데예요. '약사리'로 불리던 봉긋한 언덕 마을, 약사동이었습니다.


대략 이런 풍경.


춘천의 원도심에 속하는 약사동은 한때 시내의 중심이었다가 주변 뉴타운들이 발달하며 쇠락한 동네라고 합니다. 지금은 단층 구옥만 즐비하고, 혼자 사는 어르신들이 주민의 대부분이었지요. 그래도 왕년에 왜 이곳부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을 만큼 지리적 이점은 충분했어요. 시내 한복판인 데다 언덕 위에 있어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거든요. 동네 자체는 낡았지만 걸어서 몇 분만 가면 큰 상업거리도 있고, 오래된 맛집들도 즐비했어요. 동네 한복판에는 100살이 넘은 성당도 우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요. 그 고풍스러운 기운이 동네 전체로 퍼져나가는 것만 같더군요. 마을 아래에는 ‘약사천’이라 불리는 개울이 졸졸 흘러서, 건너편 6차선 도로가 내뿜는 아스팔트의 잿빛 기운을 막아내주고 있었습니다.


백 한 살 성당이 내리보는 마을.


'약사동'보다 '약사리'란 이름이 더 어울릴 법한 이 동네를 두어 번 둘러본 뒤, 여기 머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는 동네의 폐가들부터 찬찬히 둘러보기 시작했어요. 폐가가 비교적 쌀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지만, 다른 이유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집은 공존이 필요한 생명체라고 생각해요. 사람이 살지 않으면 집도 죽기 마련이지요. 긴 여행으로 오랫동안 집을 비워두었다가 돌아오면, 싸늘하게 식어버린 집의 기운에 흠칫 놀라게 되는 것처럼요. 저는 숨죽인 집에 숨을 불어넣고 싶었어요. 생명을 입양하는 일에는 끝내 마지막 용기를 못 내었지만, 버림받고 죽어가는 집 정도라면 제 정성으로 되살릴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폐가를 고쳐 동네 분위기가 조금이라도 살아난다면, 그것만큼 살면서 보람된 일이 또 있을까 싶기도 했고요.

어쨌든 그런 생각을 실현하려면 맘에 쏙 드는 폐가가 있어야 했겠지요. 다행히 걷다가 문득, 발목이 땅에 박히는 듯한 집들이 있더군요. 오래 멈춰 서서 바라보고, 주소를 적어두었어요. 그렇게 적힌 몇몇 집의 주소목록을 들고 인근 부동산에 찾아갔습니다. 주인이 있는 집인가요? 혹시 팔 의향이 있다고 하시면 제게 연락주세요.

서울로 돌아갔고, 며칠 후 연락이 왔습니다.

"집주인은 나이 오십 넘은 형제 두 분이세요. 이 집에서 나고 자랐는데 각자 결혼한 뒤로는 분가해서 사셨다네요.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까지 이 집에서 차례로 돌아가신 뒤로는 몇 년째 그냥 집을 놔두고 계셨대요. 마침 두 분이 공동명의로 계속 소유하고 있기는 어려워서 팔 생각을 하고 계셨다는데, 만나보시겠어요?"
 
기억나는 집이었어요. 파란 지붕라일락 나무가 몹시 예뻤던 집. 길가에서 골목으로 들어가는 첫 집이어서 그리 번잡하지도, 외지지도 않았던 집. 마당도 집도 몹시 아담해서 우리 예산으로 사서 고칠 수 있겠다는 기대를 품었던 집. 얼른 부동산 사장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예산은 이 만큼이에요. 이 돈으로 살 수 있으면 살게요.


발길이 멈췄던 집에서 어느 날 연락이 왔다


최근 부동산이 거의 거래된 적 없는 동네라 평균 시세도 예측하기 힘들었기에, 그냥 제가 생각한 그 집의 가치를 불렀습니다. 어차피 저희 예산의 한도도 정해져 있었으니 고민할 일도 없었지요. 며칠 지나지 않아, 단 몇 백만 원의 차이로 우리는 계약을 마쳤습니다. 

계약 날 만난 전 주인 형제분들에게서는 선한 기운이 느껴졌어요. 매수인의 사소한 입장도 충분히 배려해주셨고, 세금 문제로 한두 달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는데 기다려주셨지요. 또 부동산 사장님께 자초지종을 들었다면서,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옛집을 부수지 않고 고쳐서 살아주겠다니 고마운 마음이라고 덕담까지 건네주셨답니다. 도장을 찍으며 말씀드렸어요. 다 고치고 나면 초대할 테니 꼭 함께 와주셨으면 한다고. 형제분들께서는 흔쾌히 응하며, 4월 말이나 5월 초가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집 마당에 있는 라일락 나무에 꽃이 핀다고요. 큰돈이 오가는 민감한 거래의 현장에서 향긋한 진심이 오갔던 기억이었답니다.




계약을 마친 날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마당까지 다 합쳐도 서른 평이 안 되는 아담한 집이지만 온전히 내 땅이 생겼다는 사실이 얼마나 흥분되던지요. 물론 전부 은행 빚만으로 산 집이지만, 빚을 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밤이었습니다. 평생을 서울의 사각형 아파트에서만 살아왔는데, 이제 잠시나마 파란 지붕과 라일락 나무의 품에서 머물게 되다니요.

이제 오래 버려졌던 집을 되살리는 일은 오롯이 제 몫으로 남았습니다. 10월부터 시작된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요. 집에 어떻게 숨을 불어넣고 있는지, 다음 편에 계속 이야기해볼게요.


일단 물건 정리부터...


(뚝딱뚝딱 집 짓는 과정이 궁금하다면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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