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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Nov 22. 2020

60년 묵은 폐가, 공유서재로 고쳤습니다

<집이 아닌 인생을 리모델링한 기분>


춘천 약사동의 60년 된 폐가를 덜컥 계약해버린 날 밤.


라일락 나무와 파란 지붕이 예뻐서 샀다지만, 그것 말고는 다 걱정거리 투성이었습니다. 대부분 썩어가거나 무너져 내리고 있던 집이었거든요. 수 년째 사람이 살지 않았다고 하니 당연하겠지요. 작은 방의 지붕은 어른의 머리가 닿을 만큼 내려앉아 있었고, 창문은 날카롭게 깨진 채로 방치돼 있었습니다. 유품 정리도 되지 않아 낡은 옷가지와 가구에서는 묵은 먼지가 풀풀 피어났죠. 어지러이 흩어진 책더미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이 집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수선해야 할지, 첫날밤부터 묘한 흥분과 함께 두려움이 덮칠 수밖에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하지...

일단 하나씩 풀어나가기 위해, 저를 도와줄 리모델링 업체부터 선정하기로 했습니다. 세 곳의 건축사무소와 전화도 하고 미팅도 하며 조율한 끝에 한 곳을 택했어요. 예산도 어느 정도 들어맞았고, 기존 성과물들도 인상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유일하게 다시 전화가 걸려온 업체였거든요. 대강의 생각을 나누고 견적을 상의한 날 오후, 업체 대표에게서 직접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저희 이 공사 꼭 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좋은 취지로 운영하는 가게에 참여하고 싶고, 생각도 서로 맞아서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회생활하면서, 특히 거래의 현장에서 상대에게 '이 정도면 진심이다'라고 느낀 적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전화를 받을 때만큼은 수화기 너머에서 솔직한 마음이 전달되는 것 같더군요. '핫플'인 익선동에서 수많은 리모델링 공사를 따낸 업체였던 만큼 굳이 저희에게 목맬 필요도 없었을 텐데 말이죠. 다음 날, 간단한 미팅을 거친 후에 바로 계약을 마쳤습니다. 지난 9월의 일이었지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공사가 끝난 지금 시점에서는 만족스러운 거래였다는 생각입니다. 공사 기간 내내 터놓고 이야기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다사다난했던 현장에서도 큰 소리 한 번 나지 않고 서로 웃으며 매듭지었으니까요.




업체를 선정했으니 이제 설계를 할 차례였습니다. 우선 큰 틀부터 설정해야 했지요. 공사는 업체의 몫이지만, 그에 앞서 집에 어떤 정체성과 정서를 불어넣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뢰인이 부단히 고심해야 할 테니까요.


우리의 최종 목적은 '공유서재 만들기'였습니다. 얼핏 보면 가정집 같지만, 알고 보면 누구나 들러서 향긋한 차를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 말이죠. 더불어 새로 고친 집일지라도 옛집의 역사를 단절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집이 오래 품어온 고유한 정서를 이어가서, 먼 훗날 언젠가 다음 주인이 될 사람에게 넘겨주고 싶었거든요. 아무리 낡고 초라한 건축물일지라도 머무는 이가 귀하게 다듬어준다면 가치 있는 유산으로 남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화려한 겉모습보다는 단명한 지향점이 드러나는 공간으로 꾸미고 싶었습니다. 그 지향점은 나뭇결, 노란 불빛, 그리고 책으로 시각화할 것이었습니다. 모두 마음을 잔잔하게 하는 일상의 원소들이지요. 그래서 처음 왔을 땐 '와!'하고 감탄하지 않더라도, 오래 머무를수록 안정감과 온기를 느끼는 공간으로 거듭나길 바랐습니다.


이제부터 시작.

정체성을 세웠으니, 다음은 실행계획을 세워야겠죠? 우선 무너지고 부서진 집에서 보전할 가치가 있는 물건들부터 골라내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몇 가지 남길 만한 것들이 눈에 띄더군요. 예컨대 지붕을 구성하는 나무판들은 거의 썩거나 부서졌지만, 대들보만큼은 단단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또 마당에는 집과 동갑이라는 60살 된 라일락 나무가 여전히 푸른 이파리를 힘차게 돋우고 있었어요. 육남매가 옹기종기 웅크려 앉은 듯한 모양새의 크고 작은 장독대들도 녹슬었지만 깨지지 않고 세월을 버텨내고 있었답니다. 낡은 방문 역시 손잡이에 못이 빠져 덜렁거렸지만 그런대로 건재했지요. 이렇게 살릴 수 있는 것들은 어떻게든 살려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집의 역사'의 목격자들.

다음은 공간을 구성할 차례였습니다. 주택을 상업시설로 바꿀 경우에는 각 방의 벽들을 모두 부수어 없애기 마련입니다. 하나의 공간으로 널찍하게 보이기 위해서죠. 그러나 서재는 다른 가게들과 달리 '책 잘 읽히는 곳'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각 방의 벽을 부수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했어요. 공간이 트일수록 시원한 기분이겠지만 집중력은 도리어 흐트러질 테니까요. 벽을 남겨둔 덕분에 로비는 좁아터지고 너른 공간 하나 없는 가게가 되겠지만, 독립적인 방들이 있으니 저마다 오밀조밀 개성 있게 꾸며볼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벽의 색깔과 재질은 오로지 하얀 페인트와 나무로만 짜기로 했어요. 예쁜 색깔로 칠하거나 디자인 도배를 하는 방안도 생각했지만, 최대한 투박하고 단순해야 사람들이 책을 읽을 때 더 편안할 것 같아서요.


세 차례 회의 끝에 나온 공간구성도.

가장 고심했던 공간은 화장실이었습니다. 60년 된 집이다 보니 재래식 외부 화장실을 사용하고 있었거든요. 어떻게든 살려보려 애썼지만 결국 화장실만큼은 실내에 들이기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나 하나 불편한 건 감수하겠지만, 굳이 찾아와 주시는 손님들까지 불편하게 하면 안 될 것 같아서요. 다만 실내에 화장실을 지으려면 옛 아궁이가 보존돼 있는 주방을 없애야만 하더군요. 배수시설을 설치할 수 있는 유일한 자리였거든요. 예스러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아궁이가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어찌나 아쉽던지요. 하지만 이별해야 할 땐 미련 없이 하자며 마음을 다독였습니다.


미안해 아궁아...

그 대신 기존의 재래식 외부 화장실을 세상 어디에도 없을 독특한 공간으로 변신시켜보자고 마음먹었어요. 더러움과 깨끗함이 공존하고, 과거와 현재가 뒤엉킨 곳으로 만들어 보자고요. 일단 철거 예정인 방 문짝을 책상으로 변신시켜 재래식 화장실 안에 두기로 했습니다. 지저분한 실내벽은 반쯤 그대로 놔두고, 나머지 반은 하얀 타일을 입혀 깨끗하게 정리하기로 했고요. 바깥 풍경이 보이도록 작은 창도 하나 내었습니다. 천장에는 고풍스러운 백열전구를 매달기로 했어요. 버린 맥주캔을 재활용한 전구와 원목으로 만든 스피커를 책상 위에 놓아두자는 아이디어도 나왔답니다 그렇게 향후 이 집에서 가장 독특한 공간이 될 '독립서재'의 설계를 마쳤지요.


이랬던 재래식 화장실이
이렇게 변신 중.

비좁은 마당 역시 살릴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살리며, 사람들이 그것들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이 집을 산 결정적 이유였던 커다란 라일락 나무는 주변에 원목 틀을 입혀 벤치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라일락 나무 아래서 꽃 향기 맡으며 책을 읽는' 낭만적인 공간이 되길 바라면서요. 오랜 세월 용케 살아남은 육남매 장독대는 화분으로 재탄생시킬 심산이었습니다.


공사 완료 후 라일락 벤치.

마지막으로 다락방이 남았습니다. 처음 다락방에 올라가 봤을 때엔 과연 살릴 수 있을지 의심부터 들더군요. 천장은 거의 무너져 있었고, 바닥도 부실해 어른 한두 명이 동시에 뛰면 뚫려버릴 것만 같았거든요. 오죽하면 리모델링 업체에서 첫 현장점검을 왔을 때 다락방을 보며 '귀신의 방에 온 것 같다'고 혀를 내둘렀을까요. 그러나 단 한 사람이라도 잘 수 있는 공간만큼은 꼭 마련하고 싶었기에, 큰돈을 들여서라도 보수공사를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돈 아닌 것들로 5년 뒤에 숙박비를 받고 손님을 재울 ‘공유다락’은, 서재의 가치관을 가장 또렷하게 드러내는 공간이었기 때문이죠. (이 이야기는 추후에 따로 겠습니다.)


살려야 한다...!

일단 다락의 바닥과 지붕을 안전하게 정비하고, 디자인은 다른 공간과 달리 밝은 톤으로 꾸미기로 했습니다. 혼자 주무실 분들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면 해서요. 거기에 돌담이 얼핏 보이도록 키작은 창문을 길쭉하게 넓히고, 자그마한 수제 고목탁자를 제작 주문하기로 했어요. 일어서면 천장에 머리를 찧을 법한 키낮은 공간이니 그냥 눕거나 앉아서 책 읽으시라고요. 나무 천장은 니스칠을 하지 않은 채 나뭇결 그대로 숨을 쉬도록 내버려 두기로 했습니다.


변신 완료. 어서오세요~


이렇게 설계를 마치고, 9월 말부터 시공에 들어갔습니다. 물품들을 치우고 부술 것들을 다 부수니 앙상한 집의 뼈대만 덜렁 남더군요. 그렇게 집을 발가벗기고 나니, 그제야 60년간 고택을 지탱해온 숨겨진 가치들이 고아하게 드러났습니다. 껍질은 다 벗겨졌지만 여전히 썩은 지붕들을 든든히 떠받치고 있던 대들보. 꺼진 땅 밑으로 기둥이 무너지는 걸 막아내고 있던 돌받침들. 투박하게 생긴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버텨내주고 있었기에, 이 낡은 폐가는 60년의 세월을 버텨 저와 조우할 수 있었겠지요. 집을 해체하는 과정은,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들에게 존경심과 애정을 헌사하는 시간이었답니다.


집의 시절을 지켜낸 주역들.

해체작업이 끝난 뒤부터는 두 달 가까이 본격적인 리모델링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매주 하루씩 휴가를 내어 춘천에 가서 공사 현장을 지키고, 현장 상황에 맞게 설계를 수십 차례 변경해야 했지요. 지난한 과정을 거쳐 비로소 며칠 전에야, 대문에 전등 다는 작업을 끝으로 1차 공사를 마쳤습니다. 이렇게 간략히 과정만 적으니 마치 모든 공사가 무난히 진행됐던 것처럼 보이네요. 실상은 두 달 내내 머리를 쥐어짜내고, 실패에 좌절하고, 실수했을까 가슴이 터질 것만 같던 날들의 연속이었는데요.


가장 힘들었던 건, 건축이라는 비전문분야의 모든 결정을 공사 주기에 맞춰 빠른 시간 내에 내려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리모델링은 경험이 아닌 상상을 바탕으로 모든 판단을 내려야 하더군요. 벽과 책상과 손잡이의 색깔, 가구의 크기, 미세한 선반의 높이, 세면대의 종류와 두께까지 일일이 정해야 하는데 어떠한 기준도 참고할 만한 자료도 없었습니다. 오직 '이렇게 하면 괜찮을 것'이라는 상상만으로 선택해야 했지요. 그 선택의 결과물이 아쉬워 며칠을 끙끙 앓기도, 수십 만원을 버리기도, 땅을 치며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집 세 번 지으면 죽는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더군요. 공사 기간 내내 새벽 두세 시쯤 잠이 들어 대여섯 시쯤 눈이 떠지는 일상이 반복됐으니까요. 수십 가지 경우의 수를 끊임없이 상상하고, 천장에 그려보고, 빠르게 결정해드려야 했으니 잠을 자도 자는 게 아니었죠.


라일락 나무 벤치를 만들어주신 목수님.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리모델링 공사와 함께 한 지난 두 달은 제 생애 가장 바쁘면서도 가슴 뛰는 나날들이었습니다. 살다가 또 언제, 오로지 나만의 자유의지로 모든 걸 선택하고 결정할 기회가 올까요? 회사에서는 언감생심, 가정에서도 그렇게 하기는 힘들겠지요. 온전히 내 상상과 무지와 예술적 감각과 서툰 판단력으로 한 점씩 조립되는 세상이 눈앞에 펼쳐진다는 건 그 어떤 경험과도 바꿀 수 없는 완벽한 자유로움이었습니다. 뭐, '이맛현'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공사를 진행하면서, 저는 집이 아닌 인생을 가지런히 다듬고 리모델링하는 기분이 들었답니다. 


틀의 설계부터 아담한 소품 하나하나를 선정하는 작업까지, 모든 순간에 저의 묵은 정서와 취향이 반영되더군요. '집 고치기'란 마치,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 사람인지, 인생을 살면서 어떤 취향을 갖게 되었는지 스스로 거슬러 오르는 과정과도 같았습니다. 저는 밝은 톤보다는 어두운 톤을 좋아하는 사람이더군요. 세련미보다 투박함을 즐기더군요. 저는 흰색보다 때 묻은 색감에 더 끌리더군요. 저는 네모난 것과 둥그런 것이 어우러질 때 가장 안정감을 느끼더군요. 저는 플라스틱을 싫어하고 나뭇결에 애착을 보이더군요. 이런 모든 사소한 제가, 스스로 고치고 꾸민 열댓 평 남짓의 집 구석구석에 고스란히 묻어 있었습니다. 집 하나에 이제껏 살아온 날들과 쌓아온 생각들을 통째로 갈아 넣은 기분이랄까요? 폐가를 고쳐 짓지 않았으면 그것들은 결코 정리되지 않은 채 맘 한 구석에 어지러이 방치돼 있었을 테지요. 아마도 이번 리모델링 작업이 제 삶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일 것입니다.


공사 완료 후 처음 지인들을 초대한 밤.
실내에서 본 바깥 풍경.
책도 꽂히기 시작. 곧 대대적인(?) 책추천 받겠습니다.

무척 긴 글 같지만 사실은 집을 고치는 과정만 따로 1편부터 10편까지 연재하고 싶은 마음이었답니다. 그만큼 우여곡절도 많았고, 세세한 시행착오와 기막힌 서사도 넘쳐났지요. 하지만 그 과정을 낱낱이 공개하는 것보다는 '휴직살이'의 한 조각쯤으로 채워두는 게 낫다는 쪽으로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앞으로 시작될 2년 가까운 휴직기간을 고려하면 폐가 리모델링은 '프리퀄' 정도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서 더 TMI가 되고픈 마음을 꾹 참고 글 한 편에 이렇게 꾹꾹 눌러 담았답니다.




영혼의 쇳물을 들이부어 만든 공유서재.  


 간판은, 해가 바뀌고 나서야 내걸릴 예정입니다. 휴직생활은 내년 2월이 지나야 시작되거든요. 정식으로 가게 문을 여는 시기도 그래서 내년 봄으로 잡아두었어요. 이런 연유로 간판은 늦게 달리겠지만, 서재 이름만큼은 미리 정해두었답니다.


'첫서재'예요.


가게 이름 같지 않죠? 참 특색 없고, 딱히 각인되지도 않고, 지나치게 단순해 보이기도 하네요. 왜 이런 이름을 지었는지, 어떤 공유서재로 만들고 싶어서 그랬는지는 다음 주 연재할 글에 소상히 밝히겠습니다. 매번 자신의 일처럼 아껴 읽어주시는 적지 않은 분들께 거듭 감사드립니다. 우여곡절 많았던 공사 과정 내내 저를 단단하게 해준 힘이었어요. 여기에 글 쓰고 누군가 읽어준다는 것.


겨울쥐 프레드릭 曰 "봄에는 앙상해진 저 나무에 초록이 필 거예요!"


(첫서재와 함께 하고 싶다면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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