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묭 Nov 29. 2020

당신의 서투름을 사는 가게

<가게 이름은 ‘첫서재’입니다>


춘천의 60년 묵은 폐가에 영혼의 쇳물을 들이부어 만든 공유서재. 


(지난 글 보려면 클릭)


이제는 이름을 지어줄 차례입니다. 서재 이름에 관한 고민은 공사가 진행되기 전부터 시작됐어요. 설계를 하려면 가게의 방향성과 정서, 그러니까 뭘 할 것이며 어떤 느낌이고 싶은지부터 정해야 했으니까요. 이름이란 그러한 고민의 결정체를 단 몇 글자로 세공하는 작업이니, 설계와 공사보다 앞서 정하는 게 올바른 순서라고 여겼습니다. 기자로서 기사를 쓸 때 제목을 먼저 지 못하면 결코 좋은 기사를 써 내려갈 수 없었듯이 말이죠.


먼저 두 가지 질문을 던져봤어요.


‘어떤 공유서재가 되고픈가?’
‘어떤 사람이 찾아왔으면 좋겠는가?’


첫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래 준비해왔답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해주는 서재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 안에는 많은 기준이 담겨 있겠지요. 그들이 부족한 나를 아껴준 이유들이 있을 테니까요. 그것은 제 가치관일 수도, 성격일 수도, 취향일 수도, 타고난 기질일 수도 있을 거예요(외모였다면 사랑합니다). 그 이유들을 모아 공간화하고 시각화한 가게를 열고 싶었습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가게를 면 그들을 닮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지 않을까요? 설명할 순 없어도 누군가에겐 낯익은 정서가, 가게 지붕과 창문 틈새와 책장과 소품 하나하나에 물때처럼 스미어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떤 사람이 찾아왔으면 좋겠는지’에 대한 대답이 내려졌습니다. 다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몹시 이기적인 기준인 데다 지나치게 추상적이기에, 타깃을 더 구체화해 보기로 했답니다. 제가 가장 초대하고픈 부류의 사람들이 누굴까 곰곰이 되물어 보니, 결국 ‘서투른 길을 걷는’ 이들이었어요. 지금 걷고 있는 길 위에서 서툴어하는 사람들, 혹은 새로운 낯선 길을 걸어보려는 사람들 말이죠. 그런 분들에게 제가 힘이 되어드릴 능력은 없지만, 공간 정도는 내어드릴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오셔서 ‘걷고 있는 이 길이 맞는 건지’ 찬찬되짚어 보거나, 새로운 시작에 한 용기를 얻어가거나, 아니면 그저 잠시라도 서투름을 거두고 푹 쉬었다 가셨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대가로 저는 공간값을 받을 수도, 그분들의 경험을 귀에 담으며 영감 또는 글감을 얻을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가게의 방향성을 정했습니다. ‘서투름의 공동체’를 만들자고요. 저마다 서투름을 꺼내어 두면 그걸 차곡차곡 쌓아두는 공간을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이제 몇 글자 이내로만 줄이면 가게 이름이 정해지겠지요.


제 이름을 지어주세요.

처음 떠오른 단어는 ‘스무 살’이었습니다. 세상에 첫 발을 내딛는 서투름과 설렘이 공존하는 단어 같아서요. ‘스무 살의 서재’, ‘스무 살의 사유’ 같은 이름들을 떠올려 보니 입에도 착 달라붙더군요. 서재가 들어설 춘천 역시 봄을 이름에 품은 유일한 도시고, 거꾸로 하면 ‘청춘’과 발음도 비슷하더라고요. 게다가 춘천은 대학에 갓 입학한 새내기들이 MT 장소로 많이 찾는 도시인만큼, ‘스무 살’이란 이름이 지역성과도 묘하게 결합할 수 있겠다 싶었죠. 그러다가 문득 ‘나이에 묶인 이름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어느 나이나 서투르고 설렐 수 있는데 가게 이름을 ‘스무 살’이라고 규정해버리면, 뒤늦게 서투른 길을 걸으려는 분들께 늦었다는 감각을 강요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다른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몇몇 친구에게 저희 방향성을 설명하기도 했는데요. 그중 영화 제작pd로 일하는 오랜 친구가 ‘가능한 서재’라는 이름을 추천해주었어요. 멋진 이름 같더라고요. 불가능할까봐 망설이는 분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실제 도움도 주는 공간이고 싶었으니까요. ‘언젠가 사라질 서재’라는 긴 이름도 유력한 후보였습니다. 휴직기간은 길어야  20개월. 물론 그 뒤를 누군가 이어 주기를 바라지만, 우리 모두는 ‘언젠가 사라질 존재’이니 지금 뭐라도 함께 해보자는 뜻으로 알맞은 이름 같았어요.


이 노란 조명 아래 내걸릴 간판은?

이렇게 몇몇 후보들을 스마트폰에 적어두고 출근할 때마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번갈아 보면서 고심했답니다. 하나같이 마음에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100%를 채워주는 기분까지 닿진 못하더군요. 그러다 문득 복잡해진 머릿속을 비워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고요. 멋진 은유와 비유 대신, 서재의 방향성을 상징할 직관적인 단어가 무언지 생각해 보기로 했어요. 두 단어가 명징하게 떠올랐답니다.


‘처음’ 그리고 ‘서투름.’


단순하지만 거기 다 들어있는 것 같더군요. 공유서재를 짓는 저도 모든 게 처음이고, 제가 초대하고픈 손님도 ‘어딘가에서 서툴어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결국 두 단어로 가게 이름과 슬로건을 짓기로 결심했습니다. 단, ‘처음’은  설레는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한 글자인 ‘첫’으로 바꾸었어요. 그래서 전혀 가게 같지 않고, 지나치게 단순하고, 딱히 각인되지도 않는 세 글자 이름과 일곱 글자 슬로건이 탄생했답니다.


‘첫서재 : 서투름이 쌓인다’


이렇게 정한 뒤로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특색 없는 이름일지라도 그 안에 담길 것들이 정갈하게 담겨 있다고 여겼거든요. 이름처럼 누군가가 무언가를 처음 시작하려 할 때 떠오르는 가게가 되길, 낯선 이의 서투름과 불안까지 기꺼이 나눌 만큼 품이 넓은 공간으로 숙성하길 바랄 뿐이었습니다.


첫서재에 둔 원목 흔들소파. 앉아서 채우거나 덜어내고 가세요 :)


이렇게 가게 이름을 짓고 공사까지 마무리됐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궁금증남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방향성은 알겠는데, 그래서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냐’고요. 그러고 보니 이제껏 연재하면서 구체적으로 설명드린 적도 없었네요. 북카페인 것 같기도 하고, 사람도 재우겠대고, 뭘 연결하긴 하겠다는데 뭔 소린가 싶기도 하셨을 겁니다.


단순하게 말씀드리면 '첫서재'는 북카페에 가장 가깝지만, 조금 다른 방식으로 운영될 것 같아요. 우선 커피값이 아니라 공간값을 받을 예정이요. 맛이 아니라 영감을 제공하는 가게이고 싶거든요. 커피나 향긋한 차는 공간을 이용해주시면 정성껏 내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내년 봄부터 20개월 동안만 팝업스토어 형태로 운영할 예정입니다. 제 휴직기간이 한정돼 있으니까요. 그 이후에는, 어떻게든 더 나아갈 방법이 열릴 거라고 믿어 보려고요. 일단 제게 주어진 20개월간 누구나 마음 편히 책 읽고 작업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처음'에 관한 다양한 기획도 해볼 요량입니다. 책모임이나 강좌가 될 수도, 전시의 형태가 될 수도 있겠지요.


마지막으로, 공간의 일부는 돈이 아닌 것들로만 가치를 교환 것입니다. 첫서재의 가장 또렷한 정체성이기도 한데요. 이를테면 우리 사회에서 일반화된 거래의 수단(돈)과 방식(동시성)에서 벗어나, 그 자리를 사람을 향한 신뢰로 대체할 수 있을지 실험해보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 세 가지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는데요. 이 중 첫 번째 실험인 '돈 아닌 것들로 5년 뒤에 숙박비 받는 북스테이' 이야기부터 차례차례 연재하겠습니다.


살아가다가 일요일 밤, 글로 다시 뵈어요.


(첫서재와 함께 하고 싶다면 여기~)


매거진의 이전글 60년 묵은 폐가, 공유서재로 고쳤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