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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Dec 06. 2020

돈 아닌 것들로 5년 뒤에 숙박비 받는 숙소

<'첫서재' 프로젝트 1 : 다락방 북스테이>


60년 묵은 폐가를 고쳐 만든 춘천의 공유서재 ‘첫서재.’


그 첫 번째 프로젝트를 소개합니다.


서재에는 두 평 남짓한 자그마한 다락방이 있습니다. 부서져가는 지붕 아래 나무를 덧대고, 대들보를 다듬고, 돌담이 보이도록 키작은 창문을 낸 방입니다. 그 방 안에 느릅나무를 깎아 지름이 두 뼘 남짓한 고목탁자를 만들고, 맥주 캔을 재활용한 전구와 원목 스피커를 올려두었습니다. 몇 권의 책을 누일 나무바구니도 놓아두었습니다. 서재의 다락방이니까요. 침대와 침구도 정성스럽게 골랐답니다. 방의 이름은 ‘첫, 다락’이라고 지었어요. 첫서재가 준비한 1인 북스테이 공간입니다.



‘첫, 다락’의 숙박비는 0원입니다. 그것도 5년 뒤에 주시면 됩니다.


0원인데, 5년 뒤에 뭘 주냐고요? '첫, 다락'은 돈이 아닌 것들로만 숙박비를 받을 예정입니다. 이곳에 묵으며 느낀 값어치만큼, 5년 뒤에 자신의 무언가를 내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먼저 숙박하려는 분들께는 예약 이메일에 ‘왜 여기에 머물고 싶은지’ 간단히 여쭐 것입니다. 저희 첫서재의 취지에 맞게 처음 무언가를 시작하기 위함일 수도, 서투른 길에서 고민을 정리하고 싶음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저 며칠 푹 쉬어야 할 때라는 직감일 수도 있겠지요. 단지 저희가 돈 대신 당신이라는 가치를 받고 머물 곳을 내어드릴 이유가 듣고 싶을 뿐입니다. 


예컨대 당신이 뮤지컬이나 연극배우 지망생이라면, 저희 ‘첫, 다락’에 오셔서 쉼과 영감을 얻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5년 뒤 당신이 배우가 된다면, 저희에게 공연 티켓을 보내주시면 참 감사할 거예요. 만약 되지 못한다면, 그런대로 저희가 감사할 일이 있겠지요. 5년 뒤의 당신은 무어라도 하고 있을 테니까요. 근황을 전하는 손편지라도 답례로 보내주신다면 숙박비로 충분할 것입니다.


당신이 예술가나 작가라면, 저희 ‘첫, 다락’이 작업 공간이 되어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락방은 매우 비좁지만, 내려오시면 서재에는 꽤 넉넉한 책상들이 있으니까요. 서재 문이 닫히면 다음 날 아침 문을 열 때까지는 온전히 당신만의 공간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머물며 구상한 작품을 5년 뒤에 주시거나, 집필하기 시작한 책을 완성해서 보내주셔도 좋을 거예요. 화가라면 그림을, 시인이라면 ‘첫서재’에 관한 시 한 편을 훗날 건네주실 수도 있겠지요.


당신이 학생이라면 직업을 정하거나 꿈을 찾는 데 도움이 되어드릴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여행자라면 여행길에 잠시 멈추고 사색하는 곳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아이의 부모라면 잠시 육아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시간을 갖도록 도와드리려 합니다. 당신이 누구여도 괜찮습니다. 당신이 ‘첫, 다락’을 찾은 이유, 그리고 5년 뒤 당신이 보내어줄 ‘돈이 아닌’ 숙박비만이 궁금합니다.


서재 문이 닫히면 혼자만의 공간으로 쓰세요. 물론 문이 닫히기 전에도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운영할 생각을 하는 건지 궁금하실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우리 사회에서 통용하는 거래의 방식을 한 번쯤 뒤틀어 보고 싶었습니다. 교환의 일반적인 수단(돈)과 방식(동시성)을 제거하고도, 서로가 만족해하는 거래가 이뤄질 수 있을지 궁금했거든요. 그 방식을 벗어나면 무조건 손해를 보는 건지도 의심스러웠고요.


그렇다면 ‘돈이 당장 오가지 않는기이한 거래의 대가로 저는 뭘 얻을 수 있을까요? 아마도 돈을 제외한 다른 것들을 차곡차곡 챙겨가겠지요. 숙박객들의 이야기를 귀에 담을 수도, 영감이 확장될 수도, 그저 먼 훗날 건네받을 답례들로 소소히 행복해하며 살아갈 수도 있을 거예요. 물론 그 답례가 훗날 값어치를 따지지 못할 만큼 귀해질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되면 서로 행복하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단지 ‘이런 걸 해봤다’는 경험 자체를 콘텐츠화하기만 해도 충분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돈과 바꾸지 않은’ 이름 모를 사람들이 제게 쌓여갈 거예요. 살아온 순간들을 돌이켜 보니 '돈 계산' 하지 않는 관계가 늘어날수록 삶이 행복에 더 가까워지더군요. 누군가에게 기회와 공간을 드렸다는 만족감도 덤으로 쌓여갈 테지요. 숙박비를 포기하고 얻는 그 모든 이득들이, 만약 숙박비를 받았다면 제가 벌었을 액수보다 커질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궁금해서 해보는 거죠, 뭐.




이런 연유로 문을 여는 첫서재의 북스테이 ‘첫, 다락’은 2021년 봄부터 2022년 가을까지 손님을 받을 예정입니다. 몇 가지 궁금해하실 것들에 대해서 미리 설명을 드려볼게요.


1. ‘돈이 아닌’ 숙박비, 바로 내면 안 되나요?

아니 됩니다. 원래는 ‘무조건 5년 뒤’라고 못 박고 싶었지만, 빚을 진 채 살아가는 기분을 못 참는 분들도 계실 것 같아서 ‘최소 1년 뒤, 최대 5년 이내’에만 받기로 했습니다. 다만 5년 뒤에 받는 게 저희는 가장 좋아요.


2. 얼마나 머무를 수 있나요?

일주일에 한 분씩만 숙박객을 받을 예정입니다. 요일 체크인, 일요일 체크아웃(최대 4박5일) 입니다. 기간 내내 머무르셔도 되고, 목요일이나 금요일쯤 오셔서 단 하루나 이틀만 머물다 가셔도 됩니다. 


3. 꼭 혼자만 머무를 수 있나요?

원칙은 그렇습니다. 슈퍼싱글 사이즈 침대가 하나 마련돼 있고, 두 분이 머물기엔 정말 비좁고 답답한 다락방입니다. 다만 꼭 둘이 와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사연이 있다면 예약할 때 미리 말씀해주세요. 따로 토퍼나 담요를 준비하겠습니다. 예약 후에 인원을 변경하는 건 불가합니다.


4. 어떻게 예약을 할 수 있나요?

예약용 이메일 계정을 새로 만들어 공지할 예정입니다. 인적사항과 몇 가지 간단한 질문에 답해주셔서 예약요청서를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착순은 아니며, 어떤 분을 모실지에 대해서는 첫서재에 결정 권한이 있다는 점만 정중히 말씀드립니다.


5. 무엇이 구비되어 있나요?

보통의 게스트하우스에 마련된 물품 정도를 구비해놓았습니다. 별도의 샤워실이 마련돼 있고, 수건을 준비해놓겠습니다(세면도구는 개인 준비). 세탁기도 있습니다. 방에는 침구류와 헤어드라이어, 옷걸이, 블루투스 스피커, 거울, 가습기, 벌레퇴치기, 소화기를 준비해두었습니다.


6. 다른 조건은 없나요?

의무는 아니지만, 머무는 기간 내에 짧은 글 한 편을 써주시거나 인터뷰에 응해주신다면 무척 감사할 것입니다. 아주 짧은 분량이어도 상관없고, 꼭 글이 아니어도 됩니다. 글 대신 이야기로 들려주셔도 좋습니다. 제게 저작권을 내어주실 만한 무언가를 건네주고 가시면, 모아서 책으로 엮어보려 합니다. 귀찮거나 어려우면 안 하셔도 됩니다.


이 정도의 조건에 동의해주시는 분이라면 누구나 환영합니다. 여전히 궁금한 점이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셔요.





‘첫, 다락’ 말고도 첫서재 프로젝트는 더 남아 있습니다. 다음 글에는 그 두 번째, ‘아티스트의 첫 작품 진열장’에 대한 소개를 해볼게요.


오래 고민하고 기획해온 프로젝트를 정성껏 정돈해 누군가에게 전하는 오늘 밤이 참 맑고 허전하네요. 다만 이 글만큼은 어떻게든 더 많은 사람들에게 퍼졌으면 하는 욕심입니다. 세상의 모든 서투른 이들에게, 처음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이들을 위해, 춘천에 이런 공간이 준비돼 있다는 것 정도는 꼭 알려드리고 싶거든요. 주변에 저희 '첫, 다락'을 권하고픈 분들이 계시다면 널리 추천해주세요 :)


(첫서재와 함께 하고 싶다면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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