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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Jun 13. 2021

옛 애인을 찾아온 남자


 오후 다섯 시가 넘으면 첫서재는 다시 한산해진다. 앉아 있던 손님들도 하나둘 저녁을 찾아 자리를 뜨고, 새로운 손님도 거의 오지 않는 편이다. 그러니까 얼마 전 토요일은, 매우 이례적인 날이었던 셈이다.


 비 오는 오후 다섯 시가 막 넘은 무렵. 손을 꼭 잡은 손님 둘이 가게 문을 열었다. 나눠 쓴 우산 하나를 접어 우산걸이에 걸어두고, 같은 음료를 주문한 뒤, 그림책방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뭔가 나까지 덩달아 싱그러운 기분으로 음료를 만드는 사이, 또 다른 손님 한 분이 이어서 들어왔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먼저 온 분들 음료 가져다 드리고 주문 도와드릴게요.”


 여간해서는 꺼내지 않는 말이다. 그럴 상황이 자주 오진 않으니까. 그래도 꺼내면서 기운이 나는 말이기도 하다. 능숙한 카페 주인인 양 차례차례 음료를 만들고, 내어드리고, 다시 주문대 앞에 섰다. 원래 앉아 있던 손님들도 계셨기에 어느새 가게의 빈자리는 흔들의자 단 하나만 남았다.


 새로 온 손님은 집에서 잠시 마실 나온 듯한 간편한 차림새의 남성이었다. 그런데 왠지 낯이 익다. 예전에 온 적이 있는 분인가? 확신할 수는 없었다. 얼굴 못 알아보기로는 거의 국가대표급이니까. 알은척이라도 해볼까 싶다가, 확실치도 않은데다 표정까지 무뚝뚝하고 잔뜩 어두워 보여서 이내 섣부른 생각을 거두었다.


 손님은 시원한 오미자차를 주문한 뒤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는 확신이 들었다. 분명히 한 번은 오셨던 분이다. 우리 가게 화장실은 책장을 밀어야 들어갈 수 있기에 여간해서 찾기 어렵다. 처음 온 손님이라면 누구나 가게 구석구석을 두리번거리다 ‘화장실 어딨나요?’라고 묻는다. 그런데 그는 능숙하게 카운터 옆 책장을 드르륵 열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더 반갑게 인사드릴 걸 그랬다며 아쉬워하는 사이, 화장실에서 금세 나온 손님은 가게를 둘러보지도 않은 채 글책방 흔들의자에 털썩 자리를 잡았다.


 첫서재 문을 연지 석 달째. 남자 손님이 혼자 오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다. 그래서 더 생각났을 법도 한데 도대체 누구였을까. 기억을 오래 되감을 필요도 없었다.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그래, 혼자 왔던 분이 아니구나. 오늘 혼자 오신 것뿐이구나. 왜 오자마자 못 알아봤을까. 그는, 첫서재에서 엿새나 머물렀던 분의 남자친구였는데.


 우리 가게는 북카페와 함께 북스테이도 운영한다. 다만 돈은 받지 않는다. 숙박비는 5년 뒤에 돈이 아닌 것들로 지불받기로 하고 조그만 다락방 하나를 내어준다. 지금보다 5년 뒤를 기약하는 인연을 쌓아보자는 취지다. 그렇게 내어주기 시작한 다락에서 지난봄 엿새를 머물렀던 어떤 손님과 함께, 그는 온 적이 있다. 경기도에 사는 다락 손님을 이곳 춘천까지 차로 데리고 온 것도 그였다. 그리고 커피를 주문하고는 몇 시간이나 함께 머물렀다. 조용한 공유서재에서 두 사람이 숨죽여 속삭이는 소리, 억누르지 못하고 새어 나온 깔깔거림을 선명히 기억한다. 조금 전 온 커플에게서도 느꼈던 그 기운, 사랑에 감전된 이들만이 낼 수 있는 싱그러운 소음이었다. 떠날 즈음 그들은 ‘혹시 다락방에 하루만 함께 머무를 수 없냐?’고 정중하게 물었고, 나는 “약속드린 대로 한 분만 머무르셔야 한다”고 거절했던 기억이 난다.


 다만 무슨 연유인지 오늘 그는 혼자 왔다. 게다가 표정까지 한껏 어두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주문받을 때 나는 그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는데, 눈을 피하려는 기운이 그에게서 감지됐기 때문이었다. 다른 손님이 하나둘 떠나고, 테이블을 정리하러 글책방에 들어갈 때마다 흔들의자에 앉은 그를 힐끗 살폈다. 그는 책을 짚지도, 스마트폰에 열중하지도 않았다. 그저 미동도 없이 흔들의자에서 바라보이는 창 너머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 자리를 정리하러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무언가를 읽을 의지도 여력도 부재해 보였다. 오직 무기력한 기운만이 그에게 서리어 있었다.


 삼십 분 가량 지났을까. 생각보다 이르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하러 나왔다. 고개를 푹 숙이고 신용카드를 내민 그에게 물었다.


 “저희 본 적이 있지요?”


 그제야 처음으로, 우리는 눈을 제대로 마주쳤다.


 “기억하시네요.”

 “지난달이었죠 아마?”

 “맞아요. 여기 북스테이에 머물렀던 J와 같이 왔었어요.”

 “그래요. 두 분 함께 오셨지요.”


 더 이어갈 말이 생각나는 것도 같고, 하지 말아야 할 것도 같았다. 다행히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지금은 헤어졌어요.”

 “아…”


 짧은 탄식 말고 무얼 덧대어야 할지.


 “J가 이곳에 머물다 간 이후로 얼마 있지 않아서 서로 헤어지기로 했어요.”

 “무수 일이라도 있었나요?”

 "원래부터 자주 다투고는 했어요. 그래도 계속 화해하고 그랬는데... 이젠 완벽히 헤어졌어요.”


 담담한 말투와 달리 눈빛은 속절없이 흔들렸다. 멀리 춘천까지 다시 찾아온 이유도 아마 담담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겠지.


 “여기까지 오기 번거로우셨을 텐데...”

 “두 시간 걸려서 왔어요. 낮에 집에 혼자 있는데, 어디든 가야지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더라고요."


 차분한 어조로 그는 말을 이어갔다.


 "그러다 여기에 와보고 싶어졌어요. J가 여기 머물다 간 이후로는 계속 다투기만 하다 헤어졌거든요. 그러니까 여기가 저희에게는... 마지막으로 아름답게 기억된 장소예요.”


 옛 애인과의 마지막 아름다움을 더듬어 찾아온 남자.


 “잊기가 힘드신가 봐요.”

 “누군가를 처음 사귀어 봤거든요. 그리고... J는 좋은 사람이었어요.”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예요, 아마.”

 

 우리는 잠시 다시 눈을 맞추었다. 그가 물었다.


 “J도 그날 이후 여기 다시 온 적 있죠?”

 “그래요. 몇 주 전에 가족들과 같이 들렀다 가셨어요. 서로 연락은 하고 지내나 보네요?”

 “아니오. 제가 SNS 들어가서 혼자 본 거예요.”

 “혹시 J님이 다시 오시면, 오늘 왔다 가셨다고 J님께 전해드릴까요?”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네.. 해주셔도… 아니오. 그냥 말씀 안 하시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어느새 새로운 손님 두 분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 닫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무튼 무척 이례적인 하루였던 건 분명하다.   


“손님 오셨네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사장님. 말씀 나눠주셔서 감사해요.”

“뭘요. 언제든 생각나면 다시 오세요. 그리고…”


 돌아서는 등허리에 무슨 위로의 말을 얹어야 할까. 오래 고민할 틈도 없었다.


“좋은 사람 만날 거예요. 좋은 사람은 언젠가 또 좋은 사람을 만나던데요.”




 한 시간 남짓이 흘렀다.


 어느새 가게 문을 닫을 시간. 내내 흐렸던 하늘이 닫히고, 뒤늦게 온 손님들도 하나둘 자리를 떴다. 컵을 씻고, 커피머신을 닦고, 화장실 휴지와 수건을 갈고, 테이블마다 놓인 스탠드의 불을 하나씩 껐다. 비가 잔뜩 묻은 우산걸이도 닦아냈다. 마지막으로 의자 정리를 하면서, 그가 앉아있던 흔들의자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 자리에 고작 삼십 분 앉아있기 위해 두 시간을 달려왔던 사람. 혹시 그는 여기 왔던 걸 후회하며 돌아가고 있진 않을까. 그런 그에게 나는 더 나은 말로 공허함을 채워줄 순 없었으려나. 더 나은 말이란 게 있긴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들로 잠시 붕 떴지만, ‘첫서재가 마지막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았다’는 그의 한 마디가 이내 가라앉혀주었다. 누군가에게 온기로 남은 공간이었다면 그걸로 됐다. 난 애초에 그를 위로할 힘도 자격도 없었으니.


 가게 문을 매일 여닫다 보면, 앞으로도 어떤 피고 지는 순간들을 종종 맞이하게 되겠지. 유독 혼자 찾아오는 분들이 많은 가게이다 보니 저마다 어떤 사연을 품어 안고 이곳에 발걸음 했는지도 모른다. 그 속사정을 낱낱이 알 길은 없겠지만, 다만 여기까지 오셨으니 다들 조금은 놓아두고 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첫서재가 누군가의 속상함을 품어 안는 좁지만 다정한 공간이기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쌓이고 또 흩어지는 가게이기를 바라며, 뜻 모르게 허전한 초여름 밤을 닫았다. 가게 바깥 온종일 내린  냄새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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