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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Jun 20. 2021

나는 아침마다 먼지와 벌레를 쓸어낸다

 

 첫서재의 아침은 나만 볼 수 있는 더러움들로 복작인다.


 오전 11시에 가게 문을 여니, 이미 첫손님이 올 즈음이면 아침은 먼 서쪽으로 떠난 뒤다. 다락방에 북스테이 손님이 머무를 때가 있지만 아침 일찍 마주치진 않는 편이다. 늘 조용하기에 안에서 쉬고 계신지, 아니면 아침식사나 산책을 하러 나가셨는지도 한참 뒤에야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첫서재에 도착하는 10시 무렵부터 한두 시간 가량은 매일 혼자 맞는 아침이 반복된다.


 그렇다고 한가하게 공간을 만끽할 수는 없다. 어쩌면 하루 중 가장 바쁜 때이며, 지루한 루틴이 되풀이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매일 해야 하는 것들이 아침마다 쌓여 있는 탓이다. 주로 남들 눈에 ‘더럽다’는 것들을 치워내는 데 많은 에너지를 할애한다. 당연하겠지. 아무리 낡고 오래된 옛집이라지만 지저분함까지 빈티지로 포장할 수는 없을 테니. 책장과 책상, 유리창, 주방기구들 틈새로 매일 신기하게 쌓이는 먼지를 털어내고, 전날 손님 수와 비례해 바닥에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내야 한다. 화장실 바닥의 물기, 그리고 휴지통 속 휴지와 오물을 걷어내는 일도 빠지지 않는다.


 먼지와 머리카락, 휴지만큼이나 아침마다 나를 반겨주는 게 또 있다. 여름이 다가올수록 부쩍 늘어나고 있는 벌레들이다. 종류로 따지면 매일 십여 종을 보는 것 같지만, 상태로 따지면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팔팔하게 살아있거나, 사체로 있거나, 아니면 반쯤 죽어서 몸이 뒤집힌 채로 다리만 발발 거리고 있거나. 주로 앞마당이나 나무들 주변에서 발견되고, 다행히 가게 내부에서 살아있는 채로 출몰하는 경우는 드물다. 세상에 나온 온갖 방역 물품은 죄다 활용하고 있는 까닭이다. 벽 틈새에 발라놓은 몬스터 겔, 방마다 꽂아놓은 초음파 벌레퇴치기, 천장 사이사이에 끼워놓은 끈적이, 날아다니는 벌레를 불빛으로 유도해 잡는 전기포충기까지.


 그렇다고 해도 옛 동네의 옛집이다 보니 가게 앞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각종 벌레들까지 다 막아낼 순 없는 노릇이다. 결국 아침 출근길마다 나보다 늦게 잠에서 깬 게으른 벌레들을 여기저기서 마주하게 된다. 뿌려놓은 약 기운에 죽거나 죽어가는 것들, 아니면 통창에 다닥다닥 붙어 눈을 붙이고 있는 나방들과 하루가 멀다 하고 죽음의 인사를 나눈다. 실내에 용케 들어온 파리들을 전기파리채로 잡아내는 데에도 애먼 시간을 쏟아야 한다. 나무 천장에는 또 어찌 그리 매일 거미집이 생기는지. 사실 거미와 그리마(돈벌레)는 다른 벌레를 잡아주는 익충이라 공생하는 편이 나을 텐데, 그렇다고 손님들에게 ‘쟤가 다른 벌레 잡아준다’며 옹호할 용기도 없으니 일단 다 걷어낸다. 정성껏 만든 집이 매일 허물어지는 거미의 참담한 기분을 상상하면 미안해지지만 어쩔 수 없다. 인권이 없는 그들에게 징그러움은 용서받지 못할 죄니까.


 이런 일련의 작업들, 처음엔 소름끼치게 싫었지만 반복되니 익숙해졌을까? 그렇지 않다. 여전히 피하고픈 순간이다. ‘난 진짜 벌레를 유난히 싫어해’라는 말을 잘 믿지 않는 편인데, ‘벌레를 유난히 싫어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유난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고 작은 생명체를 잡을 때마다 터져 나오는 피와 고름, 달릴 때면 열여섯 개쯤은 돼 보이는 가느다란 여섯 다리는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다. 단지 징그럽다는 이유로 산 것들을 살육하는 내 모습에 죄책감까지 발동하면 마음은 더 엉망이 된다. 게다가 벌레와의 전쟁을 마치고 나면 조촐한 승전식은커녕 가구마다 묻은 먼지, 머리카락, 오물 묻은 화장지가 줄 지어 기다리고 있다. 나만 볼 수 있는 더러움들을 남들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사투로 매일 하루가 열리는 셈이다.


 가장 깨끗한 낱말일지도 모를 ‘아침’에 온갖 더러움을 줍는 일상. 물론 그 순간만큼은 ‘이것들만 없어도 나의 아침이 티 없이 맑을 텐데’라는 푸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나의 아침을 완전히 망치거나 해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평화를 깨는 주체는 나일뿐더러, 그 더러움을 감내해야만 얻는 것들에 대해 이제는 충분히 자각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첫서재를 짓고 고치고 공유서재로 운영하는 과정에서 깨달은 가장 보편적인 진리는 ‘인생에서 완벽한 순간은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깨끗함은 창조되는 게 아니라 더러움을 치워내는 과정에서 잠깐 얻는 행복일 뿐이며, 불편함을 억지로 걷어내면 또 다른 불편함이 나를 덮치기 마련이다.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더러움과 불편함은 안고 가는 게 지금 내가 누리는 것들을 살뜰히 지켜나가는 방식이라는 걸 이제는 시나브로 받아들이고 있다. 벌레를 완벽히 울타리 밖으로 몰아내는 삶을 원하면 이 다정한 옛집에서 마당에 발 딛고 살아가는 일상은 포기해야 할 터이다. 화장실 휴지통에 남이 버려놓은 오물을 치워내기 싫으면 정성껏 만든 이 공간에 아무도 초대하지 않고 외로이 지내면 그만이다. 지금 내가 품어 안은 청명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깨끗함의 반대편에서 머물러야 하는 시간도 조금은 견뎌내야 하는 게 삶이다. 하루에 한 시간쯤이야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게다가 아침마다 청소 노동을 하며 얻는 뜻밖의 수확도 있다. 매일 더러움을 쓸어내면서 가게뿐 아니라 마음까지 정화되고 정돈되는 기분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청소시간에는 스마트폰을 문지를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다. 오직 오염된 것들이 차지한 면적을 몸의 근육을 써서 되찾는 과정만 반복할 뿐이다. 나의 단순한 움직임으로 인해 더러움이 씻기는 신비로운 과정을 매일 목도하며, 같은 근육으로 마음까지 깨끗이 씻겨내는 상상을 하곤 한다. 안 그래도 더러운 것들이 많이 묻어 리셋 버튼을 누르고픈 지난날이었는데, 이렇게 하루씩 닦아내다 보면 언젠가는 정화된 내가 될 것만 같아서. 그래서인지 글의 소재나 어쭙잖은 문학적 영감도 주로 아침 청소를 하며 얻을 때가 많다. 도리어 가게를 쉬는 날 집에 퍼질러 있으면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 하루의 끝에 이르면 잘 쉬었다는 느낌 대신 찝찝한 뒷맛만 남더라.




  아직 초여름. 앞으로 두 달은 오직 더워지기만 할 터이다. 기온과 벌레의 수는 비례하기 마련이니 내일 아침은 아마 오늘보다 더 많은 벌레(혹은 사체)와 인사하게 될 수밖에 없겠다. 어쩔 수 없는 일상의 일부라며 받아들이려 해도 여전히 생각만으로도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그래도 그 더러움을 치워내는 과정을 통해 하루가 열리고, 가장 깨끗한 상태에서 맞이한 하루가 저물 무렵이면 다시 더러움이 쌓이는 지금의 일상을 최대한 감촉하며 살고 싶다. 서울을 벗어나 춘천에서 머무는 스무 달만큼은 말이다. 나는 그러려고 여기 왔으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귀한 생명체인데 널 죽이는 것도 모자라 자꾸 더럽다고 해서 미안해. 그런 관점도 아침마다 한 움큼씩 씻겨내 볼게.


벌써 그리운 4월의 라일락. 이땐 벌레도 없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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