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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May 30. 2021

카페 가죽소파에 아기가 토를 했다

<갓난 손님과 북카페>


 첫서재의 수요일은 조용하다.

 물론 목요일도 조용하다. 평일은 온종일 대여섯 분, 많아야 열 분 남짓한 손님만이 이 외진 언덕마을의 공유서재를 찾는다. 월, 화는 가게 문을 닫고, 금요일은 주말 전날이라 그런지 조금은 손이 바빠진다. 그러니까 첫서재에서 가장 평온한 시간은 수요일과 목요일, 그중에서도 가게 문을 막 열 무렵인 셈이다. 그래서 그즈음 찾아오는 손님들은 아무래도 조금 더 눈에 담기는 편이다.

 지난 수요일도 그랬다. 정오를 갓 지났을 무렵, 한 여성 손님이 혼자 가게를 찾았다. 아니, 결코 혼자는 아니었다. 가슴에 둘러 맨 포대기에는 갓난아기가 꽁꽁 메여 있었으니.

“몇 개월이에요?”

 손님에게 ‘어서 오세요’가 아닌 다른 언어를 먼저 건넨 적이 있었나. 아무튼 고 귀여운 것이 잠도 안 들고 나를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기에 그 말이 서둘러 나왔던 것 같다. 손님은 ‘7개월 됐다’며 웃어 보였다. 7개월이면 첫서재의 문을 연 이래 가장 어린 손님이 방문한 셈이다. 최연소 손님의 엄마는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호두정과를 주문한 뒤, 글책방에 있는 흔들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앉았다’보다 ‘자리를 잡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법한데, 짐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우선 옆구리에 매고 있던 큼직한 운동가방을 의자 옆에 털썩 놓아두었다. 아기 몸집의 두 배는 될 법한 가방에는 운동용품 대신 갓난아기의 온갖 비상용품들이 가득할 것이었다. 그리고 포대기의 어깨끈을 풀어 반대쪽 옆자리에 놓아두었다. 그제야 비로소 그녀는 몸이 좀 가벼워진 듯했다. 아기의 엄마가 자리에 앉기까지는 꽤 긴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했던 셈이다. 그나마 푹신한 흔들의자가 우리 가게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나는 잠시 생각했다.

 음료를 내어드린 뒤에는 고요함만이 흘렀다. 그 사이 맞은편 그림책방에 있던 손님마저 나가고, 엄마와 아기만 가게에 남게 되었다. 벽 너머로 들려오는 책장 넘기는 소리, 아기의 몸집만큼이나 앙증맞은 기침소리, 그런 아기의 등을 두드려주는 소리로 엄마의 시간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소리가 들려오는 주기가 조금씩 길어지는 걸로 보아 엄마의 시간은 시나브로 나긋해지고 있는 듯했다. 잠시 뒤에 살짝 엿보니 아기는 엄마 품에서 벗어나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바닥 먼지는 매일 닦아내지만 물걸레질은 한 주에 한두 차례만 하는데, 마침 오늘이 그날이었다. 바닥을 헤엄치는 아이의 조막손을 보며 아침에 물걸레질 한 보람을 만끽했다.

 그러다 문득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뒤적였다. 아기를 위한 노래가 없을까. 들려주고픈 가사가 떠오르는 것도 같았다. 정밀아 님의 ‘꽃’이었다. 나태주 시인의 시에 가냘픈 멜로디를 얹은 포크음악이다. 흐르고 있던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꽃’을 틀고는 볼륨을 한 칸 높였다. 무언가를 읽고 있던 그녀의 몰입을 방해하진 않을까 걱정도 들었지만, 한 칸 정도 높인 거니까. 카운터에 앉은 나는 글책방이 보이지 않기에 손님이 음악에 귀 기울였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나는 나의 마음을 발동했을 뿐이다.

‘예뻐서가 아니다 / 잘나서가 아니다 / 많은 것을 가져서도 아니다 / 다만 너이기 때문에 / 네가 너이기 때문에 / 보고 싶은 것이고 사랑스런 것이고 안쓰러운 것이고 / 끝내 가슴에 못이 되어 박히는 것이다’

 노래가 흐르는 동안 아기의 기침 소리는 도리어 조금씩 더 잦아졌다. 그러다 꺽, 하는 소리와 함께 기침 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났을까. 아기의 엄마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카운터로 왔다. 음악 따위에 취해 있을 상황이 아니었던 게다.

“아기가 토를 했어요. 정말 조금 하긴 했는데, 가죽소파라서… 닦아낸다고 다 닦아냈는데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손님과 함께, 손님이 ‘가죽소파’라고 표현한 흔들의자로 가보았다. 토를 닦겠다며 아기 엄마가 수건으로 열심히 문지른 자국이 아무래도 내 눈에 크게 보였다.

“괜찮아요, 손님. 가죽 클리너도 있고 항균 스프레이도 있으니까 제가 처리할게요.”
“그래도 가죽인데 죄송해요. 얼마를 변상해야 할지…”

 변상.

 7개월 된 아기가 있는 힘껏 토를 해봤자 내 엄지와 검지 손가락을 붙여 그릴 수 있는 동그라미만큼도 안 될 것이었다. 아기가 토를 한 건 아기의 잘못도 아니고, 엄마의 부주의도 아니다. 아기는 원래 토를 한다. 마침 그 자리가 가죽소파였을 뿐이다. 그런데 엄마는 변상이라는 서늘한 단어를 내게 조심스레 건넸다.

“괜찮습니다. 오래된 소파예요. 그리고 닦으면 끝인데요.”

 일단 헝겊으로 간단히 수습을 하고 카운터로 돌아왔다. 아기는 그 사이 잠들었거나 본능적으로 잠든 척을 하고 있었다. 귀여운 것. 한참이 지나 그녀는 다시 아기띠를 메고, 아기를 품어 안고, 풀어놓은 것들을 가방에 주섬주섬 넣은 뒤, 결제를 하러 나왔다. 7,500원을 건넨 그녀는 이렇게 인사하며 떠났다.

“환대해주셔서 감사해요. 안녕히 계세요”

 나는 특별히 더 환대한 적이 없다. 그저 귀여운 아기를 보고 귀엽다고 했고, 아기 엄마를 다른 손님과 마찬가지로 대했다. 아기를 매달고 짐을 잔뜩 싸들고 다녀야 하는 엄마에겐 그런 보편의 환대조차 귀했던 걸까. 그녀는 조용히 책 읽는 순간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아마 지난해 이맘 즈음이었을 거다. ‘노키즈존’은 차별에 가깝다는 글을 브런치에 올렸는데 수십 개의 댓글이 달린 적이 있다. 주로 비판과 비난 투성이었다. ‘당신이 자영업자를 몰라서 그런다’는 현실론도 많았고, 몇몇 댓글에는 ‘애는 개랑 똑같다’, ‘X충이’ 등 혐오에 가까운 표현도 섞여 있었다. 무엇이 그들을 분노하게 했는지 헤아려 볼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었지만, 큰 틀에서 나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때와 달리 이젠 자영업자로 살아보고 있으니 ‘몰라서 그런다’는 비판에는 웃으며 반문할 처지도 되었다.

 아기의 고 작은 토 자국에 변상을 하겠다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아기엄마. 당연한 대우조차 감사한 환대로 여기던 엄마를 보며 문득 그 논란의 글을 썼던 순간이 떠올랐다. 뛰어다니는 아이들 때문에 가게 앞에 ‘출입금지’ 딱지를 붙여 놓았다면, 걷지도 못하는 아기를 가슴에 메고 온 엄마는 내게 거절당했을 것이다. 주인인 나는 ‘날 탓하지 말고, 뛰는 애들을 탓하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하며 거절의 책임을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아이들과 다른 부모들에게 돌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흔들의자에 토 자국은 묻지 않았을 테지만, 그 엄마는 무거운 아기와 짐을 다시 잔뜩 싸들고 다른 공간을 찾아 해매야 했을 것이다. 그런 식의 거절이 반복되는 사이 우리는 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서로를 이해할 기회조차 영영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녀는 떠나기 전 ‘종종 들르겠다’고 말했다. 나는 우리 가게에 비교적 손님이 적은 시간을 일러주었다. 그리고 멀어지던 그녀의 등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한 뒤, 가죽 클리너와 항균 스프레이로 토가 살짝 묻었던 흔들의자의 팔꿈치를 박박 닦아냈다. 다시 오겠다고 한 그녀가 정말 다시 온다면 아마 이곳부터 확인할 것이다. 조금도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더 티 안 나게 닦아내고 싶었다. 다행히도, 당연히도, 아무 얼룩도 냄새도 남지 않았다. ‘우리 가게는 아이들이 이용하기 참 불편한 곳이겠구나’ 라고, 말끔해진 흔들의자를 보며 잠시 생각했다.

 그날 늦은 오후부터는 손님이 오지 않았다. 수요일은 원래 그렇다. 나 역시 여느 때처럼 그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다가, 햇볕을 먹다가, 꾸벅꾸벅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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