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서재를 차리며 ‘돈 아닌 것들로 5년 뒤에 숙박비 받는’ 북스테이를 함께 연다고 하자, 친한 친구 한 녀석이 걱정하며 충고해주었다. 지금보다 미래가 더 기대되는 사람을 받는 건 좋지만, 현실이 지나치게 우울해 보이는 사람은 경계하라는 말이었다. 애써 만든 너의 공간에서 무슨 사고라도 나면 어떡해, 갈등이 생겨도 네가 덤터기 쓸 수도 있잖아,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긍정도 부정도 하기 힘든 말 같아서 나는 그냥 웃으며 대답을 미뤘다.
미리 자영업을 경험한 친구들은 또 다른 걱정을 안겨주었다. 북카페 형태의 공유서재인 만큼, 공간의 의도와는 다른 사람들이 참 많이 올 거라고 했다. ‘세 명 이상 같이 오는 사람들은 아무리 책 읽는 데라고 주지해도 아랑곳 않고 떠들 거야.’ ‘비싼 고재 테이블 사들여봤자 함부로 쓰는 몇몇 사람들 때문에 금방 긁히고 훼손될 걸.’ ‘공간값 대신 손편지 받는 프로젝트도 악용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텐데…’ 나를 위해 건네주었던 고마운 조언들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말은 ‘하루에 꼭 한 명은 이상한 손님이 오더라’는 누군가의 경험담이었다.
막상 가게 운영을 반 년째 해보니 다 맞지도, 다 틀리지도 않는 말 같았다. 다행히 공유서재의 특성을 이해해주시는 손님이 대다수이기에, 가게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 가장 크게 들리는 건 대체로 내가 틀어놓은 얕은 배경음악 소리와 나의 숨 고르는 소리뿐이다. 서너 명 함께 온 친구사이도, 어린이 손을 잡고 온 가족도, 대부분 타인의 감성을 방해하지 않으려 신경 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따로 ‘조용히 해달라’는 말씀을 드리지 않았는데도 주인으로서 고마울 만큼 서재의 고유한 분위기를 지켜주신다. 다만 친구들의 충고처럼 간간이 큰 소리로 떠드는 분도, 테이블에 물을 잔뜩 흘리거나 긁힌 자국을 내고 그냥 가버리는 분도 계시긴 하다. 아주 가끔은 말하기조차 민망한 만큼 속상한 일도 생긴다.
처음엔 그런 손님을 목격할 때마다 대책을 세우려 애썼다. 가장 쉽게 떠올린 아이디어는 금지사항을 써두는 방법이었다. 우선 ‘3인 이상이 오셔도 테이블을 옮길 수 없습니다’라는 문구를 떠올렸다. 우리 가게엔 1~2인용 자리만 있어서 세 분 이상 오시면 손님이 직접 테이블을 들고 나르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물에 약한 고재 테이블이다 보니 ‘컵은 컵받침 위에만 올려두세요’라는 문구도 써둠직했다. 고 작은 화장실에도 주의드리고 싶은 게 꽤 많았다. 변기에 이물질을 넣지 말아주세요, 나무 수납장에 물이 묻지 않도록 조심해주세요… 금지사항은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우후죽순 늘어갔다.
그러다 불쑥, 금지사항을 여기저기 붙여두는 건 참 간편하면서도 언짢은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 명 중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비매너 손님을 겨냥하기 위해 나머지 아홉 명이 온갖 금지사항에 갇힌 기분을 느낄 테니 말이다. 비매너 행위를 목격할 때마다 그분들께 직접 말씀드릴 엄두가 나지 않아서, 소통 대신 모두에게 경고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는 건 아닐까. 게다가 비매너 행위를 저지르는 손님들도 대개는 고의가 아닌 듯했다. 가끔 누군가에게 ‘다른 손님도 계시니 조금만 목소리를 낮춰달라’고 정중히 부탁드리면, 대개는 ‘죄송하다, 깜빡했다’는 대답이 돌아왔으니까. 무의식 중에 저지르는 실수까지 미리 엄격하게 금지해버리는 건 ‘편한 분위기’가 아닌 ‘눈치 보이는 분위기’만 조장할 것 같았다.
결국 나는 금지사항을 가게 어디에도 붙여두지 않기로 했다. 최소한의 원칙 정도는 ‘~하지 마세요’라는 부정어 대신 ‘~해주세요’라는 말로 순화해서 붙여두었다. ‘대화를 시끄럽게 하지 마세요’ 대신 ‘타인의 감성을 지켜주세요’로, ‘화장실 불 끄지 말고 문 닫아놓지 마세요’ 대신 ‘문은 연 채로, 불은 켠 채로 두세요’로 고쳐 썼다. 공간값 대신 내는 손편지를 악용하는 손님들을 대비해서는 ‘한 분에 한 통씩만 써주세요’라는 문구와 함께 이런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의도를 정성껏 써서 편지봉투 속에 넣어두었다. 마지막으로 북스테이 신청을 하는 손님들을 선정하는 기준 역시 같은 사고방식으로 바꾸었다. ‘우울해 보이지 않는 사람’, ‘감성을 감당하기 힘들거나 부담스럽지 않은 사람’이란 금지의 기준 대신, ‘5년 뒤에 더 멋지게 변해 있을 것 같은 사람’, ‘지금 당장 우리의 공간이 더 절실할 사람’으로 환대의 기준을 정했다.
그렇다면 금지사항을 써 붙이지 않은 대가로 나타나는 ‘진상 손님’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은 우리 가게가 품을 수 있는 폭 안에서 최대한 받아들여 보기로 했다. 열 명 중 한 명은 이상한 사람인 게 정상적인 사회의 모습이다. 교실에서든, 직장에서든, 취미모임에서든 보편의 기준에 미달하는 사람들이나 분위기를 해치는 사람은 꼭 있으니까. 심지어 평화적인 시위에서도 극히 일부는 폭력을 쓴다. 그렇다고 ‘폭력시위’ 딱지를 붙이며 시위 자체를 막는다면 평화를 바라며 집회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누명을 씌우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 가게도 비록 작지만 마찬가지 마음가짐으로 운영하고 싶었다. 간혹 보편의 규범에 어긋나는 손님이 오더라도 ‘있을 수 있는’ 현상이라고 여기고 마음 닿는 데까지 감내하는 게 옳지 않을까.
진상 손님을 만날 때마다 ‘저 사람만 다신 안 오면 얼마나 맘 편할까’ 생각해왔지만, 그분이 사라지면 또 다른 분이 비슷한 역할로 그 자리를 채웠다. 그러고 보면 여느 조직이나 모임에서도 ‘쟤만 없었어도’라는 생각은 늘 틀렸다. 쟤가 없어져도 ‘또 다른 쟤’는 계속 나타났으니까. 게다가 누군가를 ‘이상한 사람’이라며 울타리 바깥으로 얼른 몰아버리면, 그들은 같은 방식에 의해 어디에서도 환대받지 못하고 더 이상해지기만 할 것이었다. 아마 그 결과는 그들을 막은 우리 모두에게 돌아올지도 모른다. 아무리 견고한 울타리를 쌓아 올린다 해도 그들과 우리는 한 사회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기에, 반드시 틈은 생기기 마련일 테니까.
세상엔 완전히 악한 사람도, 완전히 착한 사람도 없다고 믿는다. 사람의 품성은 누구든 그 사이 어딘가에 버무려져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모난 사람도 어디 가서나 모나게만 행동하지는 않을 것 같다. 다만 모난 기질이 더 두드러지는 방향으로 길러진 탓에 그런 행동을 더 자주 할 뿐이지 않을까. 우울한 사람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적어도 생계를 위해 가게를 차린 게 아닌 우리 정도라도, 그런 사람들의 뾰족한 행동을 품이 허용하는 데까지 품어 보고 싶었다. 어쩌면 다른 데서 진상이거나 이상한 사람대접받는 손님도 첫서재에서 만큼은 서서히 모난 마음이 닫히고 배려하는 마음이 열리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 손님이 마음속에 품은 여러 자아 중에 어떤 자아를 발현할지는, 그에게 공간을 내어준 자의 몫과 책임도 일부분 있을 것이다.
이야기가 거창하게 흐른 듯 하지만 결국엔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들을 막지도, 대책을 마련하지도, 주제넘게 그들에게 훈계하지도 않을 생각이다. 다만 공간은 최대한 누구에게나 열어두려 한다. 모난 사람이 와도 둥그런 마음으로 돌아가는 첫서재였으면 좋겠다. 아니면 적어도 다른 모서리와 부딪히지 않는 신기한 경험이라도 선사하는 공간이고 싶다. 북스테이에도 걱정스러울 정도로 우울해 보이는 분이 간혹 머물지라도, ‘혹시 그럴’ 걱정으로 그렇지 않을 훨씬 더 큰 가능성까지 닫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그분이 첫서재에 머물다 떠날 때엔 마음속에 불필요하게 낀 안개들을 조금은 걷어내었으면 좋겠다. 이상한 사람들 많이 올까봐 걱정해준 고마운 이들에게는, 그래서 뒤늦게나마 이렇게 웃으며 답하려 한다.“어차피 스무 달만 하고 말 시한부 가게야. 품 넓은 척 누구든 안아주다 조용히 사라지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