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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Dec 26. 2021

감동적으로 살고 싶다


 나에게 꼭 맞는 삶의 모양을 찾고 싶었다.


 휴직을 결심하고, 스무 달 동안 춘천에 와서 공유서재를 차리기로 하면서 들었던 생각 1호다. 어떻게 살아야 완전하게 행복할까. 회사에서의 인정도, 친구들과의 교류도, 가족애도 채워주지 못하던 2%의 허전함을 어떻게든 채워보고 싶었다. 채우지 못할지라도 그 본질이 도대체 뭔지라도 알고 싶었다.


 우선 나의 살아옴을 빼닮은 공간을 만드는 일로 여정을 시작했다. 원목과 책으로 벽을 감싸고, 좋아하는 음반과 문구를 잘 보이게 걸어두었다. 오래된 것들, 조명, 금속, 향, 아날로그 소품, 흐르는 음악까지 온전한 나만의 취향과 삶을 반영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매일 읽고 쓰는 일상을 살아보기로 했다. 오래 꿈꾸던 바였다. 그렇게 지난봄 공유서재의 문을 열었고, 손님들이 하나둘 찾아들기 시작했다. 비밀의 다락방에는 뱃속에 아기처럼 이야기를 품은 숙박객들이 일주일에 한 명씩 꼬박꼬박 머물다 떠났다. 새 둥지 모양의 나무 편지함에도 공간값 대신 받는 손글씨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러는 사이 라일락꽃이 피고 지고, 장마와 무더위와 단풍이 차례로 찾아들고, 어느새 겨울이 왔다.


 가장 나답게 살았던 한 해를 정리하며 나는 되물었다. 나에게 꼭 맞는 삶의 모양을 찾았는지. 다행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를 닮은 공간에서 사계절을 머물다 보니 과거의 계절을 반추하는 일이 잦았다. 그중에서 여태 잊히지 않은 행복의 순간들을 가지런히 나열해놓고 교집합을 추려보기도 했다. 저마다 다른 순간이었지만, 기억되는 이유는 하나의 단어로 수렴했다. ‘감동’이었다. 마음이 뭉클하거나 벅차오르던 순간순간이 지나온 시간에 점을 새겨, 인생이란 마치 그 점을 따라 삐뚤빼뚤 선을 잇는 여정 같이 느껴졌다. 그 투박하고도 정다운 선의 이음새가 바로 내가 찾던 삶의 모양이라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감동의 순간에는, 늘 사람과 엮여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우연찮게 돈을 벌었을 때, 회사에서 그나마 잘 나가던 순간, 큰 상이나 상금을 받았을 때 따위는 이미 기억에서 깨끗이 지워졌다. 작은 점조차 되지 못했기에 인생의 선을 어떠한 방향으로도 꺾지 못했다. 그 대신 여전히 내 안의 어딘가에서 소화되지 않고 고여 있는 기억들, 삶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순간마다 스위치 역할을 해준 기억들은 늘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일어난 일들이었다. 회사에서 팀과 함께 어려운 목표를 향해 달려가다 첫 결과물이 나오던 때. 그 팀과 헤어지던 날 다 같이 모인 밤. 애정을 쏟아 가르치던 후배에게서 ‘언론사에 합격했다’는 전화가 왔을 때. 내 아픔에 같이 울어주던 친구의 낯선 눈을 차마 쳐다보지 못했을 때. 13년 전 알바하던 가게 사장님이 나를 알아보고 덥석 손 잡아 주던 때. 나를 빼닮은 새 생명이 태어났을 때. 깊은 새벽, 친구 어머니 장례식장에 약속이나 한 듯 옛친구들이 모였을 때. 낯선 여행길에서 버스 시간을 놓친 우리 일행을 웃으며 기다려주던 이국의 눈동자들을 봤을 때. 술 취한 내 발을 누군가 따뜻한 물로 씻겨주었을 때. 수능 끝나고 서랍에 있던 엄마 편지를 읽었을 때.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모른 채 손등에 도장을 찍어주던 때. 그리고 그 사랑이 기적처럼 피었을 때. 옆 학교와의 축구시합에서 극적으로 이겼을 때… 세상 어떤 것과도 교환할 수 없는 행복감에 젖었던 기억은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조립해나간 순간이었다.


 이렇게 지나온 시절의 나를 살린 것들이 뭔지 알게 되었다는 건 올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이자 축복이다.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설계해나가야 할지 가늠자가 되어줄 테니 말이다. 이제 누군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내게 묻는다면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다. ‘감동적으로 살고 싶다’고. 그 감동의 잣대는 결과물의 크기가 아닌 마음의 끓는점일 터이다. 거창한 목표를 성취했을 때보다 우여곡절 끝에 첫걸음을 떼었을 때, 경쟁에서 누군가를 누를 때보다 함께 해내었다는 기쁨을 서로의 살갗에 묻힐 때, 만인의 환호보다 사랑하는 몇몇 사람의 진심 어린 위로를 받았을 때 비로소 기화하는 마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첫서재에서 보낸 지난 1년은 완전한 행복에 가까운 나날이었다. 거의 매일,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불현듯한 감동이 일상에 찾아온 덕분이다. 뭐가 고마운지 불쑥 고맙다는 쪽지를 남기고 떠나는 손님, ‘먹고 일하시라’며 공간값보다 더 비싼 먹을거리를 툭 건네는 이웃, 계절마다 다른 옷을 입고 찾아와주는 인연, 화장실 고래가 외로워 보인다며 친구 고래를 선물하고 간 누군가, 매주 눈을 맞추며 듣는 다락방 숙박객들의 ‘자기 앞의 생’, 눈물을 훔치던 북살롱 참가자, 이름 모를 손편지들, 잠깐 얼굴 보러 왔다며 연락도 없이 멀리서 왔다 간 옛친구, 그리고 ‘너의 꿈을 응원한다’는, 20년 만에 받아본 엄마의 손글씨. 이 모든 게 우연히 얻은 감동이 아니라 공간을 스스로 일구었기에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는 자부심 덕택에, 나의 올 한 해에는 도무지 불안과 불행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다가올 새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나는 이렇게 살아가고 싶다. 사람들 틈에 엮여 체온 묻은 서사를 완결해나가는 삶 말이다. 그리고 그런 감동의 순간이 우연히 다가오기를 기다리기에 앞서, 소소한 감동일지라도 먼저 찾아 나서며 살고 싶다. 벌써 예정된 순간들이 다가오는 새해를 기다리고 있다. 4월에는 매주 쓰는 글 배달이 비로소 100번째로 마무리된다. 5월 스승의 날에는 어릴 적 친구들과 함께 28년 전 옛 스승을 찾아 조촐한 파티를 열 계획이다. 여름이 가기 전에는 아끼는 후배들과 다큐 플랫폼을 열어보려 한다. 그리고 10월 30일에는 첫서재가 문을 닫는다. '예정된 감동'이라니 형용모순 같지만, 그런 순간이 나를 적시기를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무슨 거창한 드라마를 꿈꾸는 게 아니다. 그저 마음이 일렁이는 하루하루가 더 잦아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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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에도 일요일 밤마다 툭 놓고 가는 글 아껴 읽어준 한 분 한 분께 진심을 다해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 마지막 첫다락 손님이 남기고 간 프레드릭 그림. (1감동 추가..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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