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묭 Jan 02. 2022

호랑이와 함께 살기로 했다


"당신의 '인생영화'는 무엇인가요?"


 누구나 한 번쯤 받아봤을 법한 질문에 나는 그리 고민하지 않고 대답하는 편이다. 이른바 ‘씨네필’이라고 할 만큼 영화를 많이 보지도 않았을뿐더러, 생의 철학이나 가치관을 바꿔준 영화 한 편이 비교적 명확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바로 ‘라이프 오브 파이’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쉽게 요약할 수 있다. 침몰한 배의 구명보트에서 주인공과 호랑이가 227일간 표류한 이야기. 이토록 단순한 플롯의 영화를 나는 영화관에서 세 번, 집에서 한 번, 그리고 책 <파이 이야기>로 한 번 더 봤다. 볼 때마다 새로 발견되는 요소가 있었고 그만큼 머릿속에 오래 고여 있던 영화다. 열린 결말인 데다 반전도 있기에 여기 나만의 해석을 늘어놓지는 않으려 한다. 다만 이 영화가 내게 ‘인생의 단 한 편’으로 남은 이유에 대해서는 공유하고 싶다. 주인공 파이와 함께 표류한 호랑이 '리처드 파커'의 존재 말이다.

 ‘파이’와 더불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호랑이 리처드 파커는 파이네 가족이 운영하던 동물원에서 길러졌다. 파이 가족이 이민을 떠날 때 배에 같이 탔다가, 그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죽을 위기를 맞게 된다. 다행히 파이와 오랑우탄, 다리를 다친 얼룩말, 그리고 하이에나와 함께 작은 구명보트에 올라탄다. 처음에 호랑이는 배에 타지 않은 것처럼 나오는데, 하이에나가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차례로 죽이자 그때서야 배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다가 뛰쳐나와 하이에나를 물어 죽인다. 파이에게도 죽일 듯이 달려들지만 파이가 올라 타 있던  포목 바닥이 미끄러워 쉽게 해치지는 못한다. 비좁은 구명보트에서 두 생명체의 불편한 동거는 그렇게 시작된다.

 주인공 파이는 가족을 잃었다는 슬픔도, 구명보트에 탔다는 안도감도 느낄 겨를이 없다. 당장 눈앞의 호랑이에 대한 공포가 다른 당연한 감정들에게 숨 쉴 틈조차 주지 않기 때문이다. 호랑이에게 잡아먹힐까 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배를 통째로 내어준 채 밧줄로 묶은 고무튜브 위에서 생활하기도 한다. 둘은 서로를 어떻게 배에서 몰아낼까 궁리하고 으르렁거리면서도 때로는 협동해서 물고기를 잡아먹기도 한다. 방심하면 죽지만 같이 살면 도움이 되는 적대적 공생관계가 시작된 셈이다.



 영화 중반부와 후반부에서 파이는 호랑이를 배에서 몰아낼 결정적 기회를 두 번 잡는다. 첫 번째 기회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호랑이가 물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뛰어들었을 때다. 아무리 힘센 호랑이지만 혼자 힘으로 배에 다시 올라탈 기술이 있을 리 없다. 파이는 그 순간 영화에서 처음으로 웃는다. 그런데 이내 호랑이와 눈을 몇 차례 마주친 뒤 밧줄을 던져 호랑이를 건져 올린다. 그리고는 다시 호랑이가 닿지 못하는 배의 구석진 영역으로 도망간다. 두 번째 기회는 배가 무인도에 닿았을 때다. 미어캣들이 사는 그 섬은 먹을 게 풍족하고 생명력이 넘치지만 밤이 되면 산성화 되면서 죽음의 기운이 몰려든다. 파이는 결국 그 섬을 탈출해서 다시 배에 올라타는데, 그때 뒤늦게 따라온 호랑이가 배에 탈 때까지 기다려준다. 결국 227일의 표류 끝에 육지에 다다르고, 파이가 다른 사람들에게 발견될 즈음 호랑이는 숲 속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요컨대 호랑이는 파이를 죽이려고 하면서 동시에 파이를 살린 존재인 셈이다. 200일 넘는 표류 기간 내내 파이는 호랑이 탓에 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불안에 떨어야 했지만, 역설적으로 호랑이가 없었다면 파이는 끝 모를 표류의 나날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파이는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그런 직감이 들었을 것이다. 영화 초반부에 어린 파이가 동네 삼촌에게서 생존 수영을 배우는 장면이 나온다. 난파된 배에서 구명보트에 올라탈 수 있던 이유도 그때 배운 수영 덕분이었다. 영화적 복선이기도 하지만 그때 파이는 생존 수영이 아닌 생존 그 자체를 배운 셈이었다. 그가 물에 빠진 호랑이에게 밧줄을 던진 이유도 연민을 느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생존과 직결한 선택임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고 나는 해석했다. 물론 그 ‘연민’이라는 감정도 생존의 필수요소겠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 나는 나에게 호랑이 같은 존재가 무엇인지 내내 곱씹어봤다. 그것은 나의 직장일 수도, 직장에서 가장 미워하는 상사일 수도 있었다. 나의 꿈을 방해하는 장애물일 수도, 그냥 꿈 자체일 수도 있었다. 가정과 가족 역시도 호랑이 같은 존재일 수 있었다. 가족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돈을 벌며 살아왔지만, 그런 가족이 없었다면 살아가는 동력을 잃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렇게 내 삶의 호랑이들을 품어 안기 시작한 뒤로는 나를 바쁘게 하거나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 불안에 떨게 하는 것들이 더 이상 미워지지 않았다. 그들만 없으면 맘 편하게 살 것 같았지만, 그런 그들이 나를 살리고 있다는 직감도 동시에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생겨도 ‘저 사람이 나를 살리는 거야’라고 상상하며 남몰래 웃었다. 그가 없어진다면 좀 나을까? 아마 또 다른 ‘그’가 나타날 것이다. 나를 죽일 듯 살리기 위해.

 한편으로 영화에서 호랑이는 파이의 또 다른 자아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호랑이는 파이 내면에 숨 쉬고 있던 생존본능일 수도, 야생성 혹은 악마성일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나는 마찬가지 방식으로 영화를 받아들였다. 인간을 살리는 건 어찌 보면 이중성이다. 선과 악, 현실과 상상, 이성과 본능이 내면에서 치열하게 공존해야 인간은 생명력을 얻는다. 그 균형이 무너지거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삶도 죽음에 가까워질 것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반대쪽 밧줄을 잡아당겨주어야 하지 않을까? 파이가 물에 빠진 호랑이를 구했던 것처럼. 또 무인도에서 탈출하면서 호랑이의 탑승을 기다려주었던 것처럼.




 이 영화를 본 지 벌써 8년째다. 그사이 나는 내가 몸담은 사회가 영화에서 깨달은 바와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는 순간을 자주 목도했다. 불편이나 불안요소를 적으로 간주하고 몰아내는 집단행동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우리 아파트 출입을 금지한다’며 단지를 통과해 등교하는 옆 동네 초등학생들을 쫓아내는 아파트 단지가 부쩍 늘었다. 층간소음 살인은 잊을만하면 계속 뉴스에 나온다. ‘노키즈존, 노시니어존, 노학생존’과 같은 출입금지 구역도 해마다 늘어가고 있다. 정치 영역에서도 협상이 사라진 지 오래여서 지금은 마치 전쟁 영화를 보는 것만 같다. ‘XX충’ 같은 혐오의 언어도 넘쳐난다. 이 모든 일들을 벌이는 주체들은 호랑이를 내쫓거나 죽이는 방식을 택한 셈이다. 그렇게 살면 당장 위협요소가 사라지니 편히 발 뻗고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 사회는 끝없이 표류하고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시나브로 썩어가고 있을 것이다. 낮에는 생명력이 넘쳐 보였지만 밤이 되면 조용히 산성화 되어 갔던, 영화 속 죽음의 섬처럼 말이다.

 새해를 맞이하기 사흘 전 나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또다시 봤다. 아마 7년 만이었을 거다. 새해에는 창작을 하며 살기로 결심했는데 그런 나의 욕구에 불을 붙여줄 작품 감상이 필요했다. 내게 그런 작품은 이 영화만 한 게 없었다. 그런데 다시 보고 나니 <라이프 오브 파이>는 창작욕을 불러일으키는 수준을 넘어서 나에게 창작을 하는 이유와 방향성까지 제시해주는 듯했다. 악의가 넘치는 세상에 선의로 균형을 잡는 것. 서로 선을 긋고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해와 미움을 지워내는 것. 그리고 당신 눈앞의 호랑이를 죽이지 말라고, 그게 당신을 죽일 수도 있다고 설득하거나 걱정해주는 것. 보잘것없을 나의 창작물이 작고 예쁜 의미라도 갖기 위해서는 그런 방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었다. 비록 내 깜냥에 <라이프 오브 파이> 같은 수준의 작품을 평생 쓰거나 만들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내가 감화받은 세상의 이치를 한 뼘이라도 더 전파하려 애쓰는 창작자 정도는 되어야 할 테니까.



.
.
(글 읽은 김에 구독자 분들이 인생영화를 한 편씩 추천해주신다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목록을 만들어 두고두고 볼게요.)

매거진의 이전글 높은 곳을 오르는 두 가지 방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