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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Jan 09. 2022

우연히 첫사랑을 만났다


 지난여름의 한복판에서 일어난 일이다.

 유난히 더운 날이었는데 하필 온종일 야외 촬영이 예정돼 있었다. 코로나 방역에 애쓰는 공공기관 직원의 하루 일과를 쫓아다니는 방식의 촬영이었다. 아침 일찍 해당 기관에 도착하니 언론팀 직원들이 우릴 맞아주었다. 간단히 소개를 받은 뒤 오전 9시쯤 촬영을 시작했고, 주인공 공무원 분의 퇴근시간까지 이어갔다. 그사이 언론팀 직원 한 분이 틈 나는 대로 우리에게 와서 촬영이 원활히 진행되도록 도와주었다. 아무래도 공무원의 노고를 부각하는 내용이다 보니 기관에서도 더 성심성의껏 지원해주려는 듯했다. 그 친절이 부담스럽기도 감사하기도 했다.

 퇴근길, 스마트폰을 열고 카톡을 확인했다. 온종일 촬영을 해서 아침부터 안 읽은 메시지들이 쌓여 있었다. 중간에 틈틈이 쉬는 시간이 있었지만 동료들과 수다를 떨거나 눈을 붙이고 쉬느라 스마트폰을 확인할 여력이 없었다. 하나씩 안 읽은 메시지를 읽어 내려가다가, 불현듯 어느 창에 시선이 고였다.

 “오랜만이야.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네.”

 낯설고 낯익은 이름이었다. 17년 전에 헤어진 첫사랑의 이름. 번호가 저장되어 있다는 것도 잊고 살았는데. 네 자리 뒷번호 숫자가 먼 기억 속에서 불쑥 눈으로 다가왔다. 휴대전화라는 걸 생전 처음 사던 날, 나와 함께 정했던 번호. 그때의 우린 교복을 채 벗지도 않은 나이였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다니. 우리가 오늘 만났던가? 지나가는 길에 나를 본 건가? 아니면 아무래도 방송기자다 보니 뉴스에 나온 내 모습을 우연히 봤다는 얘기인가? 답을 하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답문을 보냈다.

 “오랜만이네. 잘 지내니? 그런데 오늘 우리가 만났던 적이 있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카톡이 울렸다.
 “역시, 너는 나를 못 알아봤구나^^.”

 그 순간, 한 사람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오늘 온종일 우리를 도와준 언론팀 직원. 다시 생각해 보니 그녀가 분명해 보였다. 얼른 카톡이 처음 온 시간을 확인해봤다. 오후 네 시. 촬영을 잠시 멈추고 쉬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 직원 분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시라”며 잠시 자리를 비웠던 바로 그 시간.

 “너였니? 마스크를 써서 제대로 못 알아봤구나. 알았으면 인사라도 했을 텐데 아쉽다.”

 당황한 마음에 얼렁뚱땅 메시지를 보냈다. 창피한 마음이 일었다. 그녀는 아마 오늘 만나기 전부터 내가 온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촬영팀 명단을 미리 받았을 테니까. 심지어 그 명단도 내가 이메일로 건네주었을 터였다. 나만 눈치채지 못한 일방적 관계가 온종일 지속되었던 셈이다.

 벌써 못 본 지 십 년도 훨씬 넘었으니 못 알아볼 수도 있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의아했다. 물론 마스크로 얼굴의 절반을 가린 채였지만, 그래도 일말의 눈치조차 채지 못했으니까. 우린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났다. 광화문 교보문고 핫트랙스에서 매주 한 차례씩 만나고, 함께 학원을 다니고, 차례대로 대학입시에 실패했다. 그 무게감에 엉엉 울면서도 ‘너와 함께라면 실패한 인생도 괜찮겠다’고 서로 위로해주던, 꽤 다정한 사이였다. 내가 재수 끝에 대학에 들어가고, 이듬해 그녀가 수능을 다시 치러 대학에 재입학하고 나서야 우리는 헤어졌다. 인생에서 가장 파닥이던 시절을 5년 가까이 함께 보낸 관계였던 셈이다. 그런데 왜 전혀 못 알아봤을까. 어떤 기운이나 가냘픈 직감조차 느끼지 못했다니.

 잠시 생각해보다 이내 이유를 알아버렸다. 서글픈 이유였다. 내 기억 속에서 그녀는 스물두 살이기 때문이었다. 우린 그 후로 만나지 못했다. 그러니 그사이 마흔 가까 나이를 먹은 그녀를 나는 눈앞에 두고도 상상조차 못 했던 것이다. 내가 늙는 것만 꼬박꼬박 확인하며 살았지, 그녀에 관한 모든 기억은 17년 전 봄날에 머물러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비슷한 이유로 2년 전에도 서글픈 착각을 한 적이 있다. 역시 퇴근길, 지하철 공덕역 환승 통로에서였다. 공항철도에서 6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걷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오던 한 여인과 멀리서 눈을 마주쳤다. 순간적으로 나는 고개를 돌렸다. 왠지 첫사랑 그 사람인 것만 같았다. 그녀일까, 아닐까. 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어쩔 줄 몰라 헤맸다. 눈길을 주기도 떼기도 어려웠다. 그녀가 거의 내 옆을 스쳐 지나갈 무렵, 나는 나와 아무 관계도 없는 분이란 걸 뒤늦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바보 같은 착각이었다. 그분은 기껏해야 이십 대 초중반 정도 되어 보였다. 고여 있는 기억이 일으킨 슬픈 착오였던 게다. 물론 그녀가 아니라서 슬픈 게 아니었다. 주름살 같은 시간이 슬펐을 뿐이다.

 어쨌든 그녀와 17년 만에 재회한 순간을 나는 그렇게 맥없이 흘려보냈다. 서로의 기억이 다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 그녀는 좋은 사람이었다. 모질게 헤어지던 순간에도 그 마음만은 퇴색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잊고 사는 사이 애정은 차갑게 식었지만 고마움의 온기까지 식을 일은 없었다. 오늘 내가 조금만 일찍 눈치를 챘더라면, 그게 아니라도 잠시 쉬고 있던 오후 4시에 카톡이 왔을 때 스마트폰을 열어보기만 했더라면, 눈을 마주치며 따뜻한 안부라도 전할 수 있었을 텐데.

 “기억이 멈춰 있어서 못 알아봤나 봐. 미안해.”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정돈된 메시지를 보냈다. 머지않아 다시 진동이 울렸다.
 “미안하긴, 도리어 재미있었어. 네가 하고 싶은 걸 즐겁게 하고 사는 것 같아 보여서 좋더라.”
 “막상 오래 하니 지금은 딴 거 하며 살고도 싶어. 너도 좋은 기관에서 일하고 있구나.”
 “응. 아이 키우기에는 괜찮은 회사 같아.”
 “그럼 됐지, 뭐.”

 우리는 그 후로 두어 마디를 더 나누고 카톡창을 닫았다. 그녀가 공공기관 언론팀에 있고 내가 기자인 한 우리는 다시 마주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혹시 그런 날이 온다면 그땐 더 반갑게 인사하자고, 서로 대화를 매듭지었다. 그럼에도 아마 그런 순간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직감도 들었다. 그녀도 그랬을 것이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이었고, 한여름의 해는 그제야 밤을 등에 업고 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뜨거웠던 것들이 식어가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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