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동쪽 마을, 이름도 예쁜 '종달리'의 어느 초등학교 옆 골목이었다. 차 한 대 겨우 비집고 들어갈 법한 좁다랗고 구불구불한 길 옆으로는 전부 똑같지만 저마다 다르기도 한 돌담들이 미로의 벽처럼 늘어서 있었다. 내비게이션을 거듭 확인해가며 목적지에 다다라 보니, 작고 노란 건물 벽에 ‘책약방’이라는 나무 간판이 걸린 가게가 나타났다. 간판 아래로는 80년대 국민학교 교실에서나 썼을 법한 나무의자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책이 곧 약이라는 가게 이름을 오래된 어린이 의자가 떠받치고 있는 모양새에서, 오늘 만나지 못할 주인장의 철학이 교감되는 듯했다.
이곳에 굳이 찾아온 이유는 ‘궁금해서’였다. 우리도 춘천에서 소담한 공유서재를 운영하기에, 일단 무인 책방이 도대체 어떻게 운영되는지부터 궁금했다. 날이 춥고 더우면 누가 에어컨이나 온풍기라도 틀어놓는 건지, 제대로 책은 놓여 있는지, 혹시 도둑맞는 책이 많지는 않을지 말이다. 마침 우리가 운영하고 있는 ‘첫서재’는 다가오는 10월 말까지만 직접 운영하고, 그 뒤로는 문을 닫아야 했다. 우리가 서울로 돌아가 회사에 복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태생이 시한부인 슬픈 가게의 생명을 어떻게든 연장할 방도를 찾아보려는 심산도, 이 작은 무인 책방을 방문하는 길에 서려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예상대로 주인도 손님도 없었다. 기껏해야 세 평 남짓한 공간에는 책들만 어지럽거나 또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정리하려는 주인과 흩뜨린 손님의 두 손길이 번갈아 닿은 듯했다. 초등학교 옆이어서 그런지 책들은 주로 어린이가 읽기에 좋은 책이 많았고, 어른을 위한 그림책도 있었다. 더러 수필집과 시집도 눈에 띄었다. 지난달에 출간된 최승자 시인의 에세이가 세 권 나란히 놓여 있는 걸로 보아, 주인이 우렁각시처럼 와서 꼬박꼬박 새 책을 들여놓는 듯했다. 무엇보다 신기했던 점은 CCTV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우리가 운영하고 있는 고 작은 서재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CCTV를 여기저기 설치해두었는데, 아무도 지키지 않는 가게에 감시카메라 하나 없다는 게 한편으로는 의아하고 한편으로는 따뜻했다. 책방을 무인으로 운영하는 주인장의 뚝심과 사람을 향한 신뢰가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이런저런 책을 구경하듯 펼쳐 보다가 우리 가족은 수제노트 두 권만 사들고 나오기로 했다. 우리와 취향이 겹치는지 웬만한 그림책은 이미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작은 책방에 와서 빈 손으로 나가긴 미안한 노릇이었다. 마침 발달장애아동에 대한 인식 개선을 돕는 내용의 귀여운 수제노트가 눈에 띄어 얼른 집어 들었다. 나가는 문 앞에 덩그러니 놓인 신용카드 단말기에는 ‘카드 계산하는 방법’이 친절히 설명되어 있었다. 어느 가게에서든 늘 주인장과 함께 있던 조그만 전자단말기가 외로워 보였던 걸까. 단말기 윗벽에는 손님들이 영수증에 남기고 간 손글씨 메모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우리 가족 역시 영수증에 간단한 메모를 써 붙여두고 가게를 나왔다.
정이 주렁주렁
해가 지려면 여전히 한참 남았기에 우리는 다른 곳에도 여기저기 들렀다. 인근에 있는 북카페에서 청귤 카푸치노 한 잔에 추위를 달래고, 다시 해변으로 가서 아홉 살 아들 녀석과 바다 생물을 주우며 한참 시간을 흘려보냈다. 곧 어둑해지려 할 때쯤에야 바다를 벗어나 숙소로 향했다. 신발의 모래를 털고 차에 시동을 걸 무렵, 뒷자리에 있던 아내가 깜짝 놀라 외쳤다.
“가방!”
여행 내내 들고 다니던 아내의 가방이 사라진 것이다. 중요한 물건만 따로 모아둔 에코백이었다. 지갑도, 현금도, 아이패드도 전부 그 가방 안에 있었다. 그런데 뒷자석에도, 트렁크에도, 차 어디를 샅샅이 뒤져도 보이지 않았다. 아연실색한 우리는 오늘 하루의 기억을 샅샅이 되감았다. 우리가 갔던 음식점과 북카페, 어제 머물렀던 숙소까지 하나하나 전화를 돌려봤지만 ‘그런 가방은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결국 남은 건 전화를 돌릴 수 없는 두 곳, 바다와 무인 책방뿐이었다. 바다에는 애초에 가방을 들고 갔을 리 없다고 판단한 우리는 바로 책약방을 향해 출발했다.
가는 도중에는 여러 경우의 수가 머리를 어지럽혔다. 책약방에 놓고 온 게 아니라면? 다른 곳에서는 더 이상 찾을 도리가 없었다. 무조건 그곳에 놓고 온 것이어야만 했다. 그런데 하필 거긴 무인 책방이다. 주인이라도 있었다면 보관해주셨을 텐데. 게다가 그곳에는 CCTV조차 없다는 걸 아까 확인하지 않았는가. 아무도 지키지 않는 가게에 감시용 카메라 한 대 놔두지 않은 주인의 우직함이 못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지퍼를 닫아두지도 않는 가방이라 안에 들어있는 지폐와 지갑과 아이패드가 밖에서 훤히 들여다 보일 것이었다. 우리가 가게를 떠나온 지는 벌써 반나절이 흘렀다. 아무렴 그사이 꽤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렸을 게 분명했다.
15분가량이 흘러 겨우 책약방에 도착했다. 구불구불하고 비좁은 돌담길이라 급한 마음만큼 속력을 내기도 힘들었다. 다행히 가게 문이 아직 열려 있었다. 생각해 보니 가게 문은 24시간 열려 있다고 했다. 어쨌든 들어가자마자, 진열대 한복판에 놓인 까만 가방에 눈에 띄었다. “있다!” 큰 소리로 외치며 기뻐하다가 불현듯 고개를 돌리니 다른 모습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책상 위에 놓인, ‘아무나 읽어도 되는’ 헌책들의 배열이 바뀌어 있더라. 누군가 왔다 간 흔적이었다. 문득 이 가게 문 앞에 붙어 있던, 이름 모를 아이가 맞춤법도 틀린 채 써놓은 ‘책약방 사용법’의 첫 문구가 떠올랐다.
‘사람 대신 책이 지킴(킵)니다.’
지난해 마지막으로 읽었던 소설책 제목은 ‘섬에 있는 서점’이었다. ‘앨리스’라는 작은 섬의 유일한 책방을 운영하는 주인장 이야기인데, 책을 매개로 교류하게 되는 사람들에 관한 따뜻한 서사가 펼쳐졌다. 책의 마지막 즈음에는 주인장의 지인이 남편에게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내가 직업상 사람들을 많이 만나잖아. 앨리스 섬을 들르는 수많은 사람들, 특히 여름에 말이야. 휴가 중인 영화 쪽 사람들도 보고, 음악 쪽 사람들이나 언론 쪽 사람들도 보고. 근데 세상에 책 쪽 사람들만 한 사람들이 없더라고. 신사 숙녀들의 업종이지.”
CCTV 하나 설치해놓지 않고 24시간 문을 활짝 열어둔 책방 주인장 덕분에, 우리는 가방도 찾고 어느샌가 잃어버렸던 ‘타인의 품격에 대한 믿음’도 되찾을 수 있었다. 가방을 찾으러 되돌아오던 15분간 우리가 상상했던 갖가지 의심의 주인도 결국 우리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책약방에서 파는 새책들은 우리 우려와는 달리 대개 깨끗한 상태였고, 진열대 역시 누군가 조금 어지럽힌 흔적이 있었지만 눈을 찌푸릴 정도는 아니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는 다른 공간과는 다른 품격이 흐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 서울로 돌아가는 내년 봄부터는 우리 서재도 무인으로 운영해볼까요?” “그러게요. 상상도 못 했는데, 가방을 찾고 보니 그렇게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쨌든 책방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신사 숙녀들일 테니까요.”
숙소로 돌아가는 길. 해는 거의 저물고 있었다. 제주의 겨울밤은 육지에 비해 한참 따뜻해서, 그 어떤 것도 쉬 얼리지 못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