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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Feb 27. 2022

친구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만난 친구

<아마도 생애 가장 찡, 했던 순간>


 자정이 막 지날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10년 지기 친구의 전화였다. 술을 마시고 있거나 마시자는 전화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어, 웬일이야?”

 “형, 어디야?(한 살 어린 친구라 나를 형으로 부른다)”

 “천안.”

 “거긴 왜?”

 “놀러 왔지.”


 회사에 이틀 연차를 내어 아내와 펜션을 잡고 놀러 온 날이었다. 황토찜질방에서 실컷 뒹굴고, 오리백숙을 먹고, 각자 가져온 악기 연습을 하다 막 잠들려던 참이었다.  


 “선우 어머니가 돌아가셨대.”

 “뭐? 갑자기 무슨 일이야?”

 “나도 방금 들어서 잘 모르겠어.”

 “선우는 지금 어디래?”

 “장례식장 막 구했나 봐. 일단 수습하고 있는 중인 거 같으니까 내일 가보려고. 형도 멀리 여행까지 갔으니 한숨 자고 내일 와.”

 “그래야겠네. 다른 애들은?”

 “지금 막 전화하고 있어. 시간이 너무 늦어서…”


 우리는 여섯 명이다. 열아홉, 스무 살 무렵부터 함께 수업 듣고, 술 마시고, 다투고, 여행 다닌 친구들이다. 나의 결혼식 축가도 그들 몫이었다. 셀 수 없이 쌓인 추억들 중 가장 포근했던 기억을 꼽자면 아무래도 선우네 고깃집에 갔을 때였다. 선우의 부모님은 서울의 한 대학가에서 돼지고기를 팔았다. 당시 대학생이던 우리가 갈 때마다 배가 터지도록 삼겹살을 내어주셨다. 아마 돈을 냈다면 며칠 용돈은 다 털어야 했을 거다. 아들내미 친구들이랍시고 민폐만 끼친 셈인데 선우 어머니는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부른 배를 내밀고 꺼억꺼억 대고 있으면 슬며시 와서 “디저트 먹어야지?” 하시고는 돼지갈비 몇 덩어리를 불판에 더 얹어놓고 가셨다.


 한 번은 내가 오랫동안 사귀던 애인과 헤어지고 난 뒤 선우네 고깃집에서 모인 적이 있다. 술에 잔뜩 취해 눈물을 찔끔거리던 나를 친구들은 마냥 놀려댔다. 비아냥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나는 결국 토라져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가게 문을 열고 나가 한참 씩씩거리며 걷고 있는데 뒤에서 선우 목소리가 들렸다.

 “형, 진짜 갈 거야?”

 “어. 여기 있을 기분 아냐.”

 “그러면 이거 가져가. 엄마가 주는 거야. 집까지 멀 텐데 지하철 말고 택시 타고 가래.”  

 선우의 손에는 어머니가 쥐여줬다는 만 원짜리 두 장이 들려 있었다. 선우는 돈을 내 주머니에 욱여넣고선 돌아갔다. 속도 몰라주고 놀려대기만 하던 친구들 때문에 잔뜩 화가 났던 기분이 단숨에 누그러졌다. 그리고 주머니 속 지폐 두 장을 만지작거리다, 머뭇머뭇거리다, 그냥 지하철을 탔다.


 그런 선우 어머니가 방금 전 돌아가셨다. 대학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어서는 찾아뵌 적이 없다. 매번 배불리 얻어먹었던 고기와 꼬깃꼬깃 건네받은 이만 원의 빚은 영원히 갚지 못하게 됐다. 내일 일어나서 얼른 가봐야지, 하면서도 잠들기가 쉽지 않았다. 포근한 기억들이 머릿속을 슬피 깨웠다. 선우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장례식장은 잘 구했으려나. 그런 업무 처리를 할 경황이나 있을까. 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각. 잠 못 들고 뒤척이고 있는 나에게 아내가 말을 건넸다.

 “지금 올라갑시다, 우리.”

 잠들기도 쉽지 않고, 마음이 무거우면 지금이라도 서울로 돌아가서 빈소에 가는 게 맞는 것 같다고 아내는 말했다. 오랜만에 얻은 이틀 휴가였다. 내일 계획해둔 일정도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 올라가자’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 미안하고 다행이었다. 새벽 한 시 반. 우리는 펜션 주인께 짧은 메모를 남기고 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다른 친구들은 온대요?”

 “아니오, 내일 다 모이기로 했어요. 너무 늦었으니까.”

 “그래요. 그래도 한 명이라도 곁에 있는 게 낫지요.”

 “근데요, 왠지…”


 말을 더 꺼내려다 말았다. 늦은 밤의 고속도로는 온통 까맸다. 문득문득 멍해지는 마음을 다 잡아야 했다. 억지로 집중을 해서 그런지 올라가는 길은 내려올 때보다 한참 멀었다. 끝없는 직선주로를 달리는 내내 한 줄기 푸른 광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별 탈 없이 서울에 도착한 뒤, 강북구에 있다는 장례식장을 검색해서 찾아갔다. 새벽 세 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빈소 현황판에는 익숙한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 빈소도 완전히 정해지지 않은 듯했다.

 “혹시 오늘 자정쯤 온 상주가 있나요?”

 안내데스크 직원분께 물으니 손가락으로 어느 한쪽을 가리켰다. 까만 옷을 입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방이 보였다. 그리고 얼른 발걸음을 옮겨 임시 빈소에 다다른 순간, 내 눈은 이미 본 듯한 풍경을 보고 말았다. 그리고 입으로 종알거렸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나 빼고, 미국에 있던 친구 한 녀석 빼고, 나머지 네 명이 이미 거기 모여 있었다. 분명히 서로 ‘내일 모이자’고 한 녀석들이었다.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가는 와중에도 왠지 그런 직감이 들었다. 이미 우리 중 누군가 선우 곁을 지키고 있을 것 같다고. 어쩌면 우리 모두가 함께 있을 것도 같다고.


 이 녀석들에게 나는 대학시절 내내 참 많이 토라졌다. 대부분 공대생이라 사회과학도였던 나와 취향도 관심사도 맞지 않았다. 술도 얼마나 억지로 먹여대던지, 이 녀석들을 만날 때면 모이기 전부터 가슴이 꽉 조여왔다. 우연히 친해졌고 여행도 다니고 깊은 추억을 쌓았지만, 뭔가 나와는 지향점도 가치관도 다른 집단 같았다. 그래서인지 술자리마다 나는 한 살 많은 형임에도 자주 놀림을 받았다. 한때는 서서히 멀어져야겠다고 다짐했던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인연은 줄곧 이어졌다. 이런저런 핑계 대며 피하는 나를 끈질기게 불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서로를 닮아가거나 공통분모를 찾아나갔다. 뭔가 속 깊은 얘기를 터놓거나 진지한 순간을 맞이한 경험은 드물지만, 그냥 서로에게 있어 주었다. 그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꼭두새벽 빈소에 고인의 가족 친지가 아닌 사람은 우리들뿐이었다.


 사흘의 장례기간 동안 우리는 돌아가며 선우 곁을 지켰다. 두 번의 긴 밤을 보내고, 발인을 앞둔 새벽. 문득 선우가 말을 꺼냈다.

 “너네들 우리 엄마한테 인사 안 드렸지?”

 깜빡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사흘 내내 빈소에 머물면서 절 한 번 하지 않았다. 우리는 마지막 문상객이 되어 영정 앞에 섰다.

 “형이 향 피워 드려.”

 한 살 많은 내가 한 발 앞에서 무릎 꿇고 앉아 향초에 불을 붙였다. 엎드려 절하기 전, 물끄러미 영정을 바라보았다. 디저트로 먹으라며 돼지갈비를 불판에 올려주던 친구 어머니. 토라져 집에 가는 내게 택시비를 쥐여주던 친구 어머니. 나에겐 이런 친구 엄마가 또 있었을까. 아마 앞으론 없을 거야. 이젠 나도 꽤 늙었으니까. 우리는 함께 절을 올렸고, 둥글게 모여 서로 어깨에 기대어 잠시 울었고, 이내 영정사진과 관을 나누어 들었다.  




 벌써 꼭 9년 전 이야기다. 그사이 우리 여섯은 모두 마흔 살이 되거나 넘었다는 것 빼고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선우 아버지가 홀로 남아 운영하시는 고깃집에 가서 또 실컷 얻어먹었고, 선우의 결혼식 날 내가 사회를, 나머지 녀석들이 축가를 맡았고, 내가 휴직을 하고 떠나온 춘천에 모여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하고도 우리끼리 선우 어머니 이야기를 꺼낸 적은 드물다. 슬프거나 진중한 분위기와 우리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이렇게 글로나마 오래된 기억을 소환한 건 순전히 날짜 탓이다. 2월 마지막 날 언저리가 되면 2013년의 그 꼭두새벽이 꼭 한 번쯤은 떠오른다. 어쩌면 짧지 않은 생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우리 여섯 중 내가 그나마 나은 재능이 있다면 글일 것이다. 대학시절부터 공대생인 선우의 취업 자기소개서를 봐주기도, 또 다른 녀석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주기도 했다. 내가 선우 어머니에게 진 빚을 갚을 길이 있다면 그것도 그나마 글 말고는 달리 떠오르는 게 없다. 그래서 한 번쯤은 헌사를 하고도 싶었다. 귀천하신 그날, 사랑하는 아들내미 곁에 누군가 잔뜩 있었다는 걸 뒤늦게나마 기록해둔다면 멀리서도 흐뭇해하시지 않을까. 지금 이 글이 그 기적 같은 연결고리가 되어준다면 딱히 더 바랄 것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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