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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Mar 13. 2022

늑대가 나타났다

<새 대통령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


 좋은 노래를 만나는 순간은 늘 우연히 길거리에서 보석을 줍거나 예상치 못한 누군가에게 깜짝 선물을 받는 기분이다.


 지난주에도 그랬다. 좋아하는 포크 가수 정밀아 님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뮤지션 '이랑' 님의 새 음반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랑 님은 최근 열린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음반상을 받았고, 5년 전 시상식 무대에서는 "월세 내야 한다"며 트로피를 50만 원에 즉석 경매해서 화제가 된 뮤지션이기도 하다. 출근길에 처음 들어본 그의 새 앨범 노래 중에 유독 한 노래를 계속 돌려 듣게 되었는데, 제목부터 유별난 ‘늑대가 나타났다’였다. 


 ‘이른 아침 가난한 여인이 / 굶어 죽은 자식의 시체를 안고 /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를 울며 지나간다.


 이런 내레이션으로 노래는 시작한다. 노래 한 소절의 끝 마디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외친다. 처음엔 여인을 보고 ‘마녀가 나타났다’고 외치더니, 부자들이 좋은 빵을 전부 사버린 걸 알게 된 사람들이 막대기와 갈퀴를 들고 성문을 두드리자 ‘폭도가 나타났다’고 외친다. 배고픈 사람들이 부자들의 곡물 창고를 습격하자 외침은 ‘늑대가 나타났다’로 바뀐다. 마음 깊이 웃지 못하는 예의 바른 사람들까지 뛰기 시작하니 급기야 ‘이단이 나타났다’고 외치기도 한다.


 멜로디도 물론 좋지만, 되짚어볼 수밖에 없는 가사였다. 노랫말은 공간으로 명확히 계급을 나눈다. 성문 안에는 부자들, 성문 밖에는 가난한 이들이 있다. 처음에 가난한 이들은 굶어 죽은 자식의 시체를 안고 울며 지나가는 여인에게 ‘마녀가 나타났다’며 피한다. 그러나 곧 부자들이 좋은 빵을 전부 사버린 걸 깨닫게 된다. 사회 현상으로 따지면 시민이 의식화하고 연대가 시작되는 순간일 것이다. 그들은 막대기와 갈퀴를 들고 성문을 두드리지만, 부자들은 ‘폭도가 나타났다’고 외친다. 무기를 들었으니 폭도가 맞겠지만, 노래에서 그들이 왜 폭도가 되었는지 부자들은 궁금해하지 않는다. 결국 배고픈 사람들이 들판의 콩을 주워 다 먹어 치우고 부자들의 곡물창고를 습격하자 부자들은 ‘폭도’를 ‘늑대’로 규정하기에 이른다. 배고파서 막대기를 든 이들이 인간 이하의 야생동물로 간주되는 순간이다. 평소 일하고 걱정하고 노동하고 슬피 우는 사람들은 거기 가담한 이유로 마지막엔 ‘이단’으로 취급받는다. 노래가 여기까지 진행되고 나서는 이런 후렴구가 반복된다.


 ‘도시 성문은 굳게 닫혀 걸렸고 / 문밖에는 사람이 / 도시 성문은 굳게 닫혀 걸렸고 / 문밖에는 사람이.


 물론 사회구성원을 부자와 빈자로 쉽게 이분법화할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단순화해 만든 노래에 나는 도리어 지금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갈등과 혐오를 투영하게 된다. 사회 갈등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대부분 약자가 순응하며 살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연대하여 전쟁을 선포하는 방식으로 증폭되기 시작한다. 여성과 남성, 빈자와 부자, 청년과 장년, 그리고 지방과 서울, 혹은 특정 지방 사이의 갈등도 대개 그래왔다. 처음 갈등이 표면화하면 여론은 약자의 말에 귀 기울이지만, 장기화할수록 약자는 불리해진다. 강자들은 여론을 장악할 강력한 무기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싸움의 기승전결은 대략 이렇다. 강자들이 처음에는 어느 정도 약자의 입장을 배려하고 양보하며 ‘이 정도 선에서 타협하자’는 신호를 보낸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것도 진일보이겠지만, 약자들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어렵고 어렵게 폭발하고 응집했는데 그 에너지가 쉽게 묻힐 리가 없다. 결국 위협을 느낀 강자들은 가진 것들을 동원해 위협하고 강압한다. 거기에 온갖 부작용과 역현상과 기현상까지 덧대어진다. 이런 갈등이 길어지면 여론은 지치고, 그럴수록 이 싸움을 일으킨 사람들 탓을 하기 시작한다. ‘평화’를 깬 건 약자들이라고 몰아세운다. 게다가 약자들은 내면화한 폭력을 저지를 역량이 없기에 표면화한 폭력만 일으키니, 겉보기에 무조건 더 폭력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결국 결말은, 뻔하다.


 이 노래에는 결말이 나오지 않지만 아마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만 노래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다음 노랫말을 보면 이렇다.


 ‘내 친구들은 모두 가난합니다 / 이 가난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이 외침은 성밖에 있는 사람에게도, 성문 안에 있는 사람에게도 건네는 말일 것이다. 사회 갈등을 일으킨 약자를 탓하고 폭도나 늑대로 몰아세우기 전에 ‘왜 그들이 그랬는지’ 한 번 생각해 봐 달라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누구에게는 귀찮고 누구에게는 불리해서 아무도 공론화하려 들지 않는 바로 그 질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이건 곧 당신의 일이 될 거랍니다’라고 노래한다. ‘왜’라는 질문을 사회가 외면하면 결국 성문을 더 두껍게 쌓는 방식으로 싸움이 전개될 것이다. 그럴수록 성벽 밖으로 내몰리게 되는 사람도 늘어날 것이다. 무관심과 냉소를 보내다 보면 어느새 자신도 쫓겨나 있을 수 있다는, 섬뜩한 경고인 셈이다. 비단 가난한 자와 부자의 얘기만이 아니다. 모든 종류의 혐오는 그런 방식으로 견고해진다. 결국 사회 곳곳에는 더 많은 선이 그어지고 성벽만 높게 쌓일 것이다.




 고백건대 언젠가부터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잘 듣지 않기 시작했다. 반항기 많던 10대와 사회과학도였던 20대에는 안 그랬는데, 늙어서 에너지가 빠졌거나 기득권이 되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적어도 노래를 듣는 시간만큼은 복잡한 생각을 하기 싫어서일지도. 그런데 유독 이 노래만큼은 지난 한 주 내내 반복해서 들었다. 왜 그랬을까?  가사와 달리 멜로디는 무겁지 않고 경쾌해서 듣기에 부담스럽지 않았나?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지난주에 있던 대선이 더 크게 작용한 것 같다. 투표장 가는 순간까지 나는 고민을 거듭했지만 결국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은 극소수라는 사실만 애처롭게 확인받았다. 게다가 밤샘 개표 끝에 더 크게 우려했던 결과까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말았다. 이게 내가 속한 사회구성원 다수의 선택이라면, 따라야 한다.


 나는 새 대통령이 진심으로 잘하기를 빈다. 적어도 그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는 사회 진화를 이루어냈으면 좋겠다. 다만 그런 바람과 함께 이랑 님의 노래를 수도 없이 돌려 듣게 된 까닭은, 마음 어딘가에서 깊은 우려가 가시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새 대통령이 속한 정당은 그간 일어난 약자들의 숱한 운동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 도리어 외면한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무지에서 깨어난 약자들이 막대기와 갈퀴를 들면 늘 ‘폭도’와 ‘늑대’로 몰아세우기에만 바빴던 이들이다. 그리고 성 밖 보다 성안의 사람들을 호위하는 데 치중하고, 성 밖 사람들을 옹호하려 하면 ‘갈등을 조장한다’고 덮어 씌우는 데 능했다.


 그래도 희망회로를 돌려본다면, 불과 5년 전 그들은 그런 방식대로 이끈 사회의 최후를 목격했다는 사실이다. 똑똑한 집단이니 학습효과가 있을 것이다. 부디 그 학습효과가 ‘전략 수정’이 아닌 국정 철학의 의미 있는 변화이기를 바란다. 물론 지난 정권을 잡은 집단을 옹호하는 것도, 비교 잣대 삼으려는 것도 아니다. 지난 정권은 철학은 옳았을지 몰라도 그걸 뿌리내리기 위한 전략과 경험의 부재를 드러낸 채 허둥지둥 댔으니까. 다만 5년 만에 다시 국민의 신임을 얻은 세력에게, 지금껏 소개한 이 노래의 의 마지막 소절만큼은 간절한 마음으로 읊어주고 싶다.


 ‘우린 쓸모없는 사람들이 아니오 / 너희가 먹는 빵을 만드는 사람일 뿐 / 포도주를 담그고 그 찌꺼기를 먹을 뿐 / 내 자식을 굶겨 죽일 수는 없소.’


 부디 새 대통령의 입에서 ‘늑대가 나타났다’는 말이 나오지만은 않기를 바란다. 그의 행운과 건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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